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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92화 (92/130)

92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1)

시종이 엘리자베스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얼굴 가득 미안함을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 대규모의 티파티에서 주최자가 한 곳에만 있는 건 실례였다.

엘리자베스는 빠른 걸음으로 온실을 빠져나와 다른 사람들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엘리시움 공작가에서 이번에 아들을 봤다지요?"

엘리자베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시종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다른 말을 하는 대신 기둥 뒤로 숨어 그들의 대화를 슬쩍 엿들었다.

"듣자 하니 외모만큼은 엘리시움이랍디다. 왜, 하얀 머리에 푸른 눈 말입니다.”

“채무 관계로 얼마 전 공작가에 사람을 보냈는데 그새 저택이 더 엉망이 되었다던데... 그 아이도 안됐지.”

"아무리 그래도 혈육이 황후 될 사람인데 최소한의 대접은 해 주겠죠?"

“글쎄올시다. 전대 공작과 달리 이번 엘리시움 공작께서 워낙... 성정이 성정이신지라, 이러다 딸에게 절연당하는 아비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오.”

"보통은 그 반대인데, 우습게 되었군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그렇게까지 할까요?"

"엘리시움 공작 성격에 아마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절연을 선고하는 건 아닐까? 자존심 하나만큼은 그 뱃살 만큼이나 두껍던 이 아니던가.”

“자존심은 무슨, 뻔뻔함이겠지. 또 편지가 왔다네. 엘리시움과 우리 가문은 6대조 어쩌고 운운하던데, 대체 6대조 할머님이면 몇 년 전 이야기지?"

“그래도 미래의 황후마마만 하시겠어요? 초대 황후가 엘리시움이었으니, 하며 운을 떼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영애도 참 불쌍해. 오늘 얼굴을 보니 차라리 황실에서 자라 다행이더라 싶더군. 공작가에서 그대로 자랐다간 영락없는 공작가의 인형 꼴이 되었겠지.”

"제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그건 눈 뜨고 못 볼 일이지요.”

“인형 황후를 들일 바에야 차라리 제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라고 투덜거리던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이미 스무 해도 지난 이야기를! 크흠... 조금 전 황태자 전하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사내란 모름지기....”

“특히 황태자께선 외동이시니 더더욱...."

"하여간 이래서 사내들이란! 휴, 상대를 말아야지 원. 조만간 이 아이를 두고 연주회를 열 건데 초대장은 꿈도 꾸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사내들은 귀부인에게 잘못했다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부인은 매정하게 걸음을 돌려 버렸고, 엄살과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기둥을 붙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시종이 곁에서 부축해 줬으니 망정이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한 일이었다.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이야깃거리에 자신의 가문이 빠지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나 직접 그 장면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어도 소용없는 것이었나 보다.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 아니, 괜찮아. 나는....”

“리지?"

하필 이럴 때 레온하르트와 마주치다니.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가벼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달음에 달려온 레온하르트는 우선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어 보였다.

"괜찮아? 역시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들어가서 쉬자, 자리는 어마마마께 맡겨도 괜찮으니까. 응?"

“아니... 아냐, 해야 해... 미래의 황후로서....”

파랗게 질린 얼굴 위로 완벽한 황후의 모습에 집착하던 기억이 겹쳐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엘리자베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이대로 팔을 놓으면 그때처럼 그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직 성인식도 안 올린 주제에 황후 운운하기는. 한참 멀었어. 그러니 괜찮아. 가서 쉬자, 응?"

“레온... 레온은 이미 황태자의 의무를 훌륭히 수행....”

그거야 내가 황제였으니까 쉽게 해내는 거고! 레온하르트는 답답한 마음에 괜히 가슴만 두드렸다.

“쉬어, 무조건 쉬어. 나중에 폐회식 때 나와도 괜찮으니 지금은 쉬자. 응? 너 지금 얼굴 완전 새파래. 누가 봐도 제발 쉬라는 소리가 나오니까....”

레온하르트는 말을 줄이며 시종을 노려봤다. 시종은 그의 눈빛에 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 레이디 엘리자베스, 제가 보기에도 지금 레이디께 필요한 건 휴식이라 사료됩니다만....”

"들었지? 그러니 잠깐만 쉬고 오자.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응?"

엘리자베스는 갈등했다. 고작 그런 소리 조금 들었다고 충격을 받은 몸뚱어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버티지 못한 정신 또한.

한참을 더 실랑이를 한 끝에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부축을 받아 가까운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이라 해도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 침대까지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힘없이 침대에 드러누웠고 레온하르트는 그 곁에 앉아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모르는 것,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차라리 지금 알려 줘."

엘리자베스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한참을 고뇌했다.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 알아야 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상태의 그녀에게 말했을 때 과연 엘리자베스는 버틸 수 있을까?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알아야해."

"리지....”

“그리고 막을 거야. 내 가족이... 내가 사랑하고, 앞으로 다스려야 하는 이 땅과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면... 나는 미래의 황후로서 내 가족을 막아야 해."

너 대체 언제 이렇게 커 버린 거야. 대견할 만큼 훌쩍 자라버린 그녀가 그를 두고 멀리, 홀로 앞서 걸을까 두려워졌다.

결국 레온하르트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중간중간 그의 손을 꼭 붙잡긴 했어도 특별히 괴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리지?"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기겁하며 손수건을 꺼냈다.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엘리자베스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슬프다? 왜? 누가 슬픈 거지? 레온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내가? 아니면 그런 곳에서 자라야 하는 루트비히가?

분하다? 어째서?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결국 그들을 외면하지 못한 내 나약함이? 그들을 막지 못한 행동력이?

“리지, 리지!"

"괜... 괜찮아....”

"전혀 안 괜찮은 얼굴로 그런 말 해도 소용없어....”

그러나 후회는 없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가장 두꺼운 유리 벽에 쩍,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염려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금방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괜찮겠냐는 말을 뒤로한 채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나요?"

미래의 황후로서 지금 해야 할 일은 가족들의 악행에 괴로워하고 그들의 처분을 놓고 갈등하는 일이 아닌 모처럼 황후와 황제께서 참여하신 티 파티를 훌륭하게 마치는 일이었다.

울적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숨긴 채 웃는 모습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곗바늘을 돌렸다. 모든 일이 없었던 일로 돌아갔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선 안 될 일은 막아냈다. 그러나 결과가 이 지경이라면....

'완벽한 황후...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다고! 리지 이... 이... 바보같이 착한 황후가!'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완벽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게 아닌 충분한 휴식이었다.

'시곗바늘을 돌린 그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온다면....'

레온하르트는 마른 헛웃음만 흘려 댔다. 턱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등으로 쓱 훔쳐 내자 손등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제발... 제발 너를 우선시해....”

뒤늦게 흐느껴 봤자 듣는 이는 이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이래서야 그때와 다를 바 없지 않나. 레온하르트는 십여 년 전, 미미스 브룬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과정만 다를 뿐 결과는 같다. 결과는 바꿀 수 없다. 결과는....

“웃기지 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온하르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걷어차고, 주먹으로 내리치고,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그판 운명 따위! 결과 따위! 몇 번이고 시곗바늘을 되돌려서라도! 바꾸고야 말겠어!”

그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도 상관없었다. 설령 엘리자베스가 행복하다, 라고 말하기 직전 10살로 돌아가는 형벌에 처하더라도 얼마든지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그녀가 행복해진다면, 얼마든지.

“웃기지 말라지....”

난장판이 된 방에 홀로 꿇어앉은 채 레온하르트는 오열했다.

"엘리자베스를 위해서라면...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까지 바꿔 보이겠어. 그녀는 무조건, 절대, 절대 불행해지지 않아. 행복해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대기실에 딸려 있던 욕실에서 가볍게 얼굴을 정리한 레온하르트는 어딘지 비장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전하?"

"방의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금 손을 봤다.”

"예? 예에? 전하! 레온하르트 전하!"

저 멀리 엘리자베스가 보였다. 작은 심장에 새까맣고 무거운 돌을 몇 개나 매단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맑게 웃고 있는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오히려 분노했다.

“오, 마침 여기 다 모여 있었군.”

"아바마마... 그리고 어마마마까지. 아, 음. 리지가 잠시 속이 좋지 않다 하여...."

“그래서 멀쩡한 방을 박살 냈느냐?"

"크흠...."

"확실히 엘리시움의 행태는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기 힘들지.”

"리지가 슬퍼할 겁니다.”

“그 말대로야. 그의 악행을 모두 처벌하려면 기껏 내일모레 식을 올리니 마니 하던 것까지 없던 일이 되겠지."

“...그 정도입니까?"

황제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황후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그녀 또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그러셨지요. 자기 여자는 자기가 지키는 법이라고."

“그랬지. 그래서 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짐에게 검이라도 겨눌 생각이냐?"

“...솔직하게 대답하면 그대로 반역죄로 끌려갈까 두려워 말 못 하겠습니다.”

“솔직하지 못하긴. 조금만 기다리거라.”

“뭘 말입니까.”

"황후는 그 아이에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쳤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 그런 의미로 사격을 가르쳐 준 건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도 소용없습니다. 잘 듣거라 레온하르트.”

"경청하고 있습니다.”

"엘리시움에 관한 일은 엘리자베스, 저 아이에게 일임하거라."

"네?"

레온하르트는 잠시 고뇌했다. 황후의 친정에 대해 황제가 직접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래야겠군요.”

모든 경우의 수를 가늠했고, 그에 따른 모든 결과를 예측했다. 그러나 그중 엘리자베스가 행복해진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시곗바늘을 되돌렸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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