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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91화 (91/130)

91화 미련이 남은 미련한 사랑(5)

경매 결과를 살펴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슬쩍 그 곁에서 총 낙찰 금액을 확인한 레온하르트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 금액이면 아예 나라를 새로 세울 수도 있겠는데?"

"황태자가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짐짓 진지한 그녀의 걱정에 레온하르트가 쿡쿡 웃었다.

경매는 예상했던 것보다 성황리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녀가 준비한 티타임을 즐기는 일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경매가 진행되는 사이 눈여겨본 몇몇 영애들을 포함한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시종에게 넘겼다.

낙찰받은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던 베아트리체에게 시종이 다가와 뭐라 귓속말을 했다. 베아트리체는 재밌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은 이어서 로젤린과 미미르, 그리고 리스트에 적힌 영애들에게도 같은 말을 전했다.

“어서 오세요!"

엘리자베스는 두 팔을 벌려 특별히 초대된 이들을 환영했다.

유리와 유리 사이를 장미 덩굴 모양으로 세공한 은으로 메워 만든 온실에는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서늘한 바깥과 달리 온실 안은 제법 따스했다. 베아트리체는 어쩐지 그 온기가 엘리자베스로부터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은방울꽃... 향?'

로젤린은 유리 온실을 가득 채운 향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방울꽃 향수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선명하고 맑은 향기는 순수한 은방울꽃 그 자체였다.

다른 꽃과 달리 은방울꽃은 꽃이 너무 작아 향을 추출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다른 꽃향기를 섞어 비슷한 이미지를 살릴 수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어떤 조향사도 순수한 향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은방울꽃은 이 계절에 피는 꽃이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정원사라 해도 계절을 되돌려 겨울을 여름으로 만들 수는 없을 텐데. 역시 황실이란 건가?

“향이 참 좋군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진심으로 기쁜 듯 웃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베아트리체를 포함해 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비어 있는 찻잔 속으로 얼음을 하나씩 넣어 주었다. 야외와 달리 온실 안은 살짝 덥게 느껴질 정도로 따스했기에 로젤린은 얼음이 반갑게 느껴졌다.

"어머나...!”

이어서 찻잔 가득 엘리자베스의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맑고 푸른 찻물이 넘실거렸다.

동시에 테이블에 자리한 영애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잘 우러난 수색을 본 순간 로젤린은 엘리자베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깊고 진한 푸른빛은 블루멜로우가 아니면 나오기 힘들었다.

'블루 멜로우... 아직 소녀다운 면이 남아 있으시군.’

얼음은 자연스럽게 푸른 찻물 위로 둥실 떠올랐다. 문득 로젤린은 얼음 모양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세히 보니 얼음은 단순히 큰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닌 장미 모양으로 조각된 것이었다.

푸른빛이 어룽거리는 장미 얼음은 꼭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푸른 장미처럼 보였다. 너무 아름다워 선뜻 손을 대기 아쉬울 지경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눈짓을 하자 시종들이 그들의 앞으로 레몬이 담긴 작은 접시를 하나씩 내밀었다.

손을 닦을 수 있도록 물수건까지 준비한 것으로 보아 티 푸드는 절대 아니었다.

벌써 몇몇 영애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의 의중을 파악하고 미소 짓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친히 찻잔 속으로 레몬즙을 떨어트렸다.

똑,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 속의 푸른 장미가 세상에 다시없을 사랑스러운 분홍빛으로 변했다.

엘리자베스는 평온한 얼굴로 손을 닦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하던 영애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은 그들의 반응을 즐기며 조금 천천히 레몬즙을 떨어트렸다. 예상한 대로 푸른 장미는 순식간에 환상적인 분홍빛으로 변했다.

“영애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장미군요.”

고개를 들자 상냥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로젤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블루멜로우를 레몬즙과 함께 즐긴 적은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장미 모양 얼음을 띄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찻잔 가득 피어난 분홍 장미 앞에서 로젤린은 처음 블루멜로우를 접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처음 온실에 초대되었을 때만 해도 잔뜩 긴장해 있던 다른 영애들 또한 그 특유의 아름다움과 장미 모양 얼음에 들떠 재잘거리고 있었다.

“다들 원하시는 물건은 손에 넣으셨나요?"

엘리시움과 직접적인 접점이 있는 가문도 아니고, 오히려 척을 지면 질 가문의 영애에, 최근 제법 부를 쌓았다는 젠트리 가문의 영애, 심지어 마법사까지....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베아트리체는 다른 영애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찻잔을 기울이며 고심했다. 설마 이런 독특한 구성원과 함께 고작 차만 마시려는 건 아닐 테고, 분명 어떤 계획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제가 그린 그림을 가져가셨지요?"

"예? 아, 역시나.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그림이었군요.”

생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하마터면 실례를 저지를 뻔했다. 베아트리체는 노련하게 실수를 무마하며 응답했다.

“제가 그렸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나요?"

그 질문에 자연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 또한 그녀에게 집중됐다.

타인의 주목을 받는 일이라면 익숙했지만 이렇게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처음으로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조금은 수줍은 태도로 설명했다.

“...수레국화의 꽃말은 행복, 그리고 구원과 희망이라지요. 그림을 본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꽃들이 한목소리로 '나는 행복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더군요. 꼭 레이디 엘리자베스처럼 말입니다.”

“...저처럼요?”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 행복이라... 엘리자베스는 꼭 처음 배운 단어를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처럼 행복이란 단어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다른 분들은 어떤 걸 낙찰받으셨나요? 모처럼 마련한 자리인데 너무 굳어 있지만 말고,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네?"

...베아트리체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다시 찻잔으로 뱉을 뻔했다.

아무래도 미래의 황후께선 정말로 다른 뜻 없이 소박한 티파티를 즐기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완전히 긴장이 풀린 영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이 손에 넣은 보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사이 베아트리체는 떨리는 손으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오이와 햄 한 장만 넣은 얇은 샌드위치였지만 황실의 재력을 증명하듯 겨울임에도 오이는 충분히 아삭하고 싱싱한데다 햄 또한 특유의 풍미가 잘 살아 있었다.

이어서 그녀는 클로티드 크림과 세 가지 잼 앞에서 잠시 갈등했다. 한 가지만 바르기엔 너무 아쉬운데, 그렇다고 두 가지를 섞어 바르자니 교양 없이 식탐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 걱정이었다.

“레이디 베아트리체,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이 제법 잘 어울리는 궁합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네?"

엘리자베스는 보란 듯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얹은 스콘 위에 빨간 딸기잼을 발랐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작은 입이 한껏 벌어지고 앙, 하는 소리와 함께 다물어졌다.

“음! 역시 좋네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레이디가 먼저 행동으로 보였다.

베아트리체는 주저 없이 저택에서 홀로, 혹은 로젤린과 단둘이 티타임을 즐길 때처럼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함께 발라 먹었다. 스콘은 차와 함께 마시기에 딱 좋을 정도로 퍽퍽했고, 크림은 그런 스콘을 살짝 촉촉하게 해 줄 정도로 부드러운 데다, 딸기잼은 딸기 특유의 상큼한 향이 살아 있었다.

'맛있어...!'

정신을 차려 보니 모두들 취향대로 티 푸드를 즐기고 있었다.

유리잔 위에 속껍질을 벗긴 오렌지를 꽃처럼 펼쳐 투명하게 굳힌 젤리를 한 스푼 크게 뜨던 로젤린과 베아트리체의 눈이 마주쳤다.

베아트리체는 그만 푸스스 웃어 버렸고 로젤린 또한 눈을 휘어 가며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예법 상관없이 느긋하게 자리를 즐기던 게 얼마 만이더라?

블루멜로우에 이어 나온 차에선 신기하게도 몽블랑 향이 났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셔 본 차는 다른 홍차와 다를 바 없이 적당히 씁쓸했다.

"미미르 언니가 향을 입혔답니다. 어떤가요?"

"향을 입힌다... 재밌는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인의 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시다시피 홍차는 특유의 향에 따라 질이 결정되지요. 가난한 하층민조차 귀족가에서 우리고 남은 찌꺼기를 우유에 타 마시는 요즈음, 질 낮은 홍차라도 향을 입힌다면 제법 재밌는 일이 생길 거라 예상됩니다.”

그녀의 말에 몇몇 귀족 영애들이 쿡쿡거리며 조소했다.

'누가 젠트리 아니랄까 봐.'

'저급 홍차 따윌 누가 마신다고!'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러분께 내놓은 차가 그렇게 만들어진 저급 홍차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한 영애가 찻 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저급 홍차 운운하며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질을 하던 사람이었다.

"농담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이라도 손님 대접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황실인데 어련할까요.”

엘리자베스가 해사하게 웃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던 영애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손잡이를 쥐었다.

“딸기 향이 나는 홍차, 눈 내리는 겨울을 연상시키는 홍차, 향신료를 넣지 않아도 이미 그 향이 스며든 홍차라...."

엘리자베스의 말에 모두들 저마다 좋아하는 음식 향이 나는 홍차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로즈힙 특유의 시큼한 맛 대신 순수한 장미 향이 나는 홍차를 상상해 보았다.

"만약 개발에 성공한다면 백성들의 티타임이 더욱 즐거워지겠군요."

"그... 그 말씀은....”

“제국에서 유통되는 찻잎은 한 번씩 영애의 가문을 거쳐 간다지요?"

영애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엘리자베스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는지 까르륵 웃으며 그녀를 격려했다.

“쿠키 향이 나는 홍차라면 저도 마셔보고 싶군요! 부디 성공하시길 바라요.”

그것을 시작으로 엘리자베스는 다른 영애들에게 저마다 숙제 하나씩을 내주었다.

북부 출신 영애에게 혹시 모를 지독한 한파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그 지방 특유의 겨울나기 비법을 담은 책을 쓸 것을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짝, 하고 다시 박수를 쳤다.

“지루한 숙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다시 마저 즐길까요? 다들 마카롱은 좋아하나요?"

베아트리체는 그제야 그녀의 진짜 의중을 깨달았다. 미래의 황후마마께선 꼭 필요한 인재들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닌 동등한 '친구'로 대접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가치를 저울질하며 친목을 다져야 하나 가늠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다행스러웠다. 저런 사람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어쩐지 굉장히 즐거울 것 같았다.

'조만간 로젤린과 함께 셋이서 티타임을 가져 볼까....?'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생각하며 몽블랑 향이 은은한 홍차를 다시 한 모금 꼴깍 삼켰다. 초콜릿 향이 나는 홍차라면 저급이든 아니든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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