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미련이 남은 미련한 사랑(4)
경매 일주일 전부터 하나둘 도착한 물건은 동일한 규격의 상자에 담겨 황실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물건들을 나르기 위해 모여든 인부들은 미미르가 수십 개가 넘는 보호 마법들을 정교한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풀어내는 장면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예비 황태자비가 여는 티 파티 겸 자선 경매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저마다 파트너 한 사람과 함께 자리에 나타났다.
황후는 황제를,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파트너로 선택했고 사회를 맡게 된 미미르는 단순히 일리시스가 계산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를 보조 사회자로 내세웠다.
붉은 낙엽 아래 노란 국화꽃이 만발한 황실 정원에 도톰한 새틴 테이블보를 깐 동그란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각 테이블마다 꽃 장식의 모양이 전부 다른 것을 본 레온하르트는 언제 저런 걸 준비했냐며 엘리자베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말에 조금 전까지 공작저에서 매일같이 날아오는 편지에 시달리다 못해 꿈에서까지 나올 지경이라고 그의 어깨에 기대 한탄하던 엘리자베스가 배시시 웃었다.
“나만 한 거 아니야. 황후마마께서도 얼마나 도와주셨는걸. 어느 쪽이 내가 만든 건지 맞춰볼래?"
레온하르트는 그 말에 테이블을 둘러보다 주저 없이 어느 테이블로 다가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작게 박수를 치며 그를 칭찬했다.
그가 떠난 자리엔 그 테이블을 차지하기 위한 영애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애들은 마냥 가장 앞자리가 좋은 자리라 여기며 맨 앞줄로 향했다.
그러나 몇몇 영애들은 꽃말과 향기, 형태 등을 통해 엘리자베스가 내민 첫 번째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저 없이 가장 맨 뒷줄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과 친분이 있는 영애가 다른 좋은 자리를 두고 왜 굳이 꽃 장식도 가장 초라한 자리에 앉느냐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웃으며 꽃 장식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가을은 바람이 온 세상을 누비는 계절이지요. 그러니 바람이 어디든 막힘 없이 지날 수 있도록 충분히 넓은 공간을 마련해 줘야 하고."
베아트리체는 부채 끝으로 화려한 꽃 무더기가 쟁반 위에 얹힌 꽃 장식을 가리켰다.
베아트리체의 설명을 듣고 보니 어지간한 바람에는 끄덕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두꺼운 덤불과 크기만 커다란 꽃송이가 어딘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침 풍년이 들었다는데, 그렇다고 마냥 휑한 느낌이 들면 그 또한 계절에 어울리지 않겠지요.”
이번에는 로젤린이 부채를 들어 올렸다. 마른 나뭇가지를 겨울 문고리 장식처럼 둥글게 엮어 자그마한 노란 꽃을 휘감은 장식은 소박하지만 선명한 색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파리 하나 없이 보름달처럼 둥글게 뻥 뚫린 구멍은 거센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또 그렇다고 무작정 계절 꽃에만 매달리면 교양이 부족하다 뒤에서 소곤거리기에 딱 좋겠지요.”
색색의 국화꽃을 한 아름 모아다 꽂아 놓은 화병은 아름답기는 했으나 황실의 장식이라기엔 어딘지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질문을 했던 영애는 어느새 테이블 고르기를 포기하고 그들과 합석했다.
“그럼 영애께선 어째서 이 자리를 선택하셨나요?"
베아트리체는 웃으며 테이블 가운데에 있는 꽃 장식을 설명했다.
"황후마마께서 꽃꽂이에 일가견이 있으시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지요. 레이디 엘리자베스 또한 마찬가지로 황후마마께 직접 배워서 솜씨가 훌륭하다고 들었지만... 아직 마마의 솜씨에 비하면 조금 미숙한 티가 남아 있을 겁니다. 특히나 이런 자리라면 마땅히 할 줄 아는 기교도 실수인 척하겠지요.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선 자신이 직접 만든 꽃 장식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을 먼저 눈여겨 보실 겁니다.”
“역시 레이디 비스콘티에십니다.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금만 자세히 둘러보면 알 수 있는 일인걸요. 로젤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저기, 저기. 그리고 저 테이블은 언뜻 보기에도 황후마마께서 직접 만드신 장식 같군요.”
“네 말이 맞구나. 뭐,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서 굳이 황후마마와 지금부터 파벌을 나누시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크게 상관은 없겠다만....”
베아트리체는 피곤한 표정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로젤린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평소 어머니께서 행동하시는 것을 보고 각오하긴 했지만 사교계는 훨씬 어렵고 살얼음을 걷듯 위태위태한 곳이었다.
벌써 그런 곳에 환멸을 느끼고 자택에 칩거한 영애들만 해도 열 명이 넘어 간다더라.
어느 가문에선 추문이 사실로 밝혀져 수모를 당했다지.
그런 곳에서 공작가의 품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베아트리체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또 예민해져야 했다.
“이 경매는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눈에 들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야."
“기회요?"
“이곳에 온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건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라고.”
“시험... 이라니요?"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손수 테이블 장식을 꾸미실 이유가 없잖니? 황궁에 넘치는 것이 사람인데.”
“으음... 친해질 기회와 시험이라... 곁에 두어도 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시려는 걸까요?"
“영리하기도 하지! 보셨지요?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선 경매에 임하는 영애들의 모습을 통해 사람 보는 눈을 기르시려는 모양입니다.”
“황제 폐하 납시오!"
각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마다 어떤 물건이 나올까 기대감에 들떠 재잘거리던 어린 아가씨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와 그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긴 연설 대신 모두들 원하는 물건을 낙찰받길 바란다는 축사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에 앉았다.
"공정함을 위해 시계탑의 미미르와, 이 제국에서 숫자 계산으로는 누구보다 뛰어난 페리안 공자께서 경매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곧바로 첫 번째 물건을 소개하겠습니다!”
나무로 된 커다란 정육면체 상자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자그마한 유리 케이스를 올려놓은 테이블 하나였다.
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하얀 수정으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팔찌와 반지 세트였다.
물건 보는 방법도 익히라는 레온하르트의 충고에 엘리자베스는 저 물건이 어느 시대의 어떤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또 당시 사회상이나 외교 관계는 어떠했는지 고찰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세공이 유행하는 요즘 트렌드와 달리 투박한 원석 그 자체의 매력을 살린 펜던트를 보아 적어도 황후, 혹은 그 윗대의 물건.
당시 제국은 한창 대륙 너머의 나라와 길고 긴 전쟁을 마치며 서로 평화를 약속했고... 아마 저 물건을 판 사람은 그 대가로 이곳에서 비슷한 값어치의 보석을 가져갔을 것이다.
"천삼백, 천삼백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골동품으로서 가치는 훌륭하나 따로 세공을 거치지 않는다면 원석이 아까운 물건이었다.
원석의 값어치를 알아본 누군가가 처음부터 높은 가격을 부르자 다른 이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는지 침묵을 유지했다.
누군가 고작 저런 원석 덩어리에 금화 천삼백 개를 내놓는다며 수군거렸다.
낙찰자만 귀한 수정 원석을 거저 얻었다며 좋아하는 와중에 다음 상자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나무 상자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온 건 얼핏 보기엔 평범한 바이올린이었다.
미미르는 물 한 잔을 마시고 물건을 소개했다.
“비르투오소 바이올린.”
그 흔한 소리가 좋다거나, 유명 연주가가 특별히 아꼈다는 수식어조차 없이 미미르는 한 문장으로 소개를 끝냈다.
조금 전까지 수정 목걸이에 대해 소곤거리던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시작가는... 금화 천오백 개... 입니다.”
일리시스가 작은 목소리로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입찰하지 못했다.
비르투오소 바이올린의 이명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현 없는 바이올린'이었다.
녀석의 마음에 든 연주가는 악보를 읽는 방법을 몰라도 악마조차 울며 빛 아래로 나설 만큼 뛰어난 연주를 할 수 있지만, 설령 음악의 신이라도 그가 내켜하지 않는다면 부서질지언정 절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루기 까다로운 악기였다.
“낙찰해 볼래?”
레온하르트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엘리자베스에게 권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결국 바이올린을 가져간 건 그녀도 아는 커다란 오페라 극장을 소유한 백작가의 부인이었다.
"가여워라.”
"응? 뭐가?”
“저 바이올린 말이야. 이제 다시는 소리 내는 일이 없을걸.”
“그걸 레온이 어떻게 알아?"
레온하르트는 희희낙락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백작 부인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표정을 봐.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해 산 사람이 할 만한 얼굴은 아니지. 저택에 도착하는 대로 박제를 만들어 전시해 놓을 거라는 데 내 머리카락 한 올을 걸 수도 있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백작 부인이 바이올린을 대하는 태도를 관찰하고 이내 납득했다.
엘리자베스는 단 한 번도 입찰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봤다.
옆 사람을 따라 무작정 가격을 올려 입찰하는 사람.
고심 끝에 물건을 놓치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사람.
호기심에 덜컥 입찰했다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들인 사람.
그 가운데에서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물건만 손에 넣는 이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등장한 건 엘리자베스가 그린 그림이었다.
과연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일부러 이름도, 단서가 될 만한 상징적인 물건도 없이 황실 꽃밭 한구석을 그렸던 엘리자베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입찰을 기다렸다.
그리고 베아트리체는 처음으로 번호표를 들어 올렸다.
“언니...?"
로젤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베아트리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속속들이 그녀를 따라 그림을 입찰하는 사람들을 보며 묵묵히 그보다 높은 가격을 불렀다.
금화 서른 개에서 시작한 그림 한 점이 금화 삼백 개까지 올라갔다.
'삼백? 아니지, 삼천을 줘도 모자라지.’
베아트리체는 삼백을 외치자마자 다시 순식간에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저거 가짜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액자 속에 담긴 건 분명 '그날' 그들이 함께 뒹굴었던 수레국화 꽃밭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티 파티까지 진행할 수 있겠어?"
레온하르트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시 소곤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여느 때보다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해.”
“힘들면 언제든 말해. 그나저나 저거 원본은 따로 있지? 그렇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려는 건 아니지?"
“어머? 그저 수레국화가 만발한 풍경화일 뿐인데 소중한 추억이라뇨?"
“리지!”
엘리자베스는 새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금화 삼백 개가 아니라 삼천 개를 부를 기세인 레온하르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달랬다.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걸... 아무리 따라 그리려고 해도 안 그려지던데 뭐....”
레온하르트는 조금 달아오른 엘리자베스의 옆얼굴을 보며 마른 입술만 혀로 핥더니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