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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89화 (89/130)

89화 미련이 남은 미련한 사랑(3)

착하고, 다정하고, 순수하고, 순진하고, 번쩍 안아다 몸을 흔들면 맑은 종소리가 날 것만 같은 내 사랑.

남을 의심할 줄도 모르고, 세상이 그녀를 헐뜯어도 전부 포용할 정도로 바보같이 착한 내 사랑.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뻔히 보이는 거짓말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기어이 눈으로 확인하기로 나선 용기 있는, 그리고 어리석은 내 사랑.

돌아가자.

너에게 가장 불행한 죽음을 선사한 자의 곁에서 다시 행복해지자.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서늘했다. 모처럼 원하는 만큼 실컷 달릴 수 있게 된 말은 기수의 심란한 마음 따윈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신나게 투레질을 하며 바람과 나란히 달렸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기에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레온하르트는 당황하는 대신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막상 사라진 말과 마차를 보는 순간 그의 세상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변했다.

그가 미치지 않고 공작저로 말을 달릴 수 있던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무사한지 직접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아직 죄인에게 내려진 형벌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설령 그가 아닌 가족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가겠다 한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다.

그러니 이건 엘리자베스를 되찾아 오는 길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사실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그녀가 가족을 선택할까 봐 두려웠다.

눈앞에서 그녀에게 속죄할 기회가 스스로 떠난다는데 말릴 수 없다는 것이 분하다 못해 마구 소리를 지르고 악을 내질러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리지, 리지.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해? 네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그러면 나는?'

식을 올리기 전까지 그녀는 약혼녀 신분에 불과했다. 여전히 황태자비 후보는 많았다. 그러나 그중 엘리자베스 만큼 소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엘리자베스가 아닌 사람과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황제와 황후라 불릴 자신이 없었다.

죄 없는 가문의 아가씨를 황후 자리에 앉혀 놓고 가슴앓이만 하다 셋이 사이좋게 말라 죽는다면 차라리 낫겠지.

황후가 되지 못한 엘리자베스,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황후. 황후를 사랑하지 않는 황제.

시곗바늘을 되돌렸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가 다시 불행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건 싫어!'

내가 왜 시간을 되돌렸는데, 왜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을 자처했는데, 다시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르라고?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저 멀리 공작저가 보였다.

말이나 기수나 사이좋게 땀범벅이 되어 지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안장 위에서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땅으로 내려와 엘리자베스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돌아갈 셈이야?'

레온하르트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여차하면 눈앞의 문을 발로 걷어찰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저택의 문이 박살 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의지로 다시 한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늘을 날아가던 구름마저 애간장이 녹아 문드러질 정도로 슬픈 울음소리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품을 내어 주고 분노를 억제하느라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등을 토닥여 주는 일이 전부였다.

'허락, 허락을 구해야 해... 돌아갈 거냐고... 물어봐야...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야....'

때려치우라지.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짓씹으며 문 너머, 그림자 속에 숨어 눈치만 보고 있는 엘리시움 공작을 노려 보며 선언했다.

“...돌아간다.”

품 안의 엘리자베스가 순간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곤 무사히 마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가 그 자리에서 엘리시움 공작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엘리자베스의 앞이었다.

'저치는 자신의 딸 덕분에 지금 목숨을 부지했다는 걸 과연 알기나 할까.'

레온하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안장 위로 올라갔다.

더 이상 이런 곳에선 눈조차 깜빡이고 싶지 않았다.

황궁으로 돌아온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 없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처소로 돌아갔다.

“레온, 잠깐. 잠깐만! 아파!"

그녀의 말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뒤를 돌아봤다. 엘리자베스의 손목 위로 벌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가 남긴 자국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범인은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깨물며 엘리자베스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아침에 네가 속이 좋지 않아 누워 있다고 알고 계셔."

처소로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그 길로 레온하르트를 등지고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토악질이 일었다.

레온하르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흘끗 뒤를 돌아봤다. 하얀 이불에 동그랗고 작은 언덕이 생겨 있었다.

“파담 낼 거지?"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착잡한 표정을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가리며 지친 목소리로 부정했다.

"엘리자베스, 한 번만 더 파담이라느니, 파혼이라느니. 그런 소리 했다간 정말로 화낼 거야.”

이불 언덕 속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흘끗 뒤를 돌아보고 이불 언덕 위로 손을 올리려다 그만 두었다.

"레온은... 그날 왜 나를 황궁에 데려왔어?"

엘리자베스의 방을 나서려는 순간 그녀가 물었다.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

시간을 되돌린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오직 그 생각만으로 살아왔다.

엘리자베스의 행복, 그녀의 행복한 삶. 행복한 미소. 그러기 위해 그는 그녀를 어린 나이에 저택에서 황궁으로 데려왔다.

“저택에서 뭘 봤는지는 몰라. 하지만 지금 네 모습을 보아하니... 네가 만약 그날 황궁으로 오지 않았다면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바로 며칠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웃지 못했을 것 같네.”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려던 레온하르트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리고 이불 속에 꽁꽁 숨어 버린 엘리자베스를 덮치듯 품에 끌어안았다.

“레온!”

이불 덩어리 속에서 내내 울고 있던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

레온하르트는 천장만 노려보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턱을 잡아 강제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울지 마.”

“안 울어.”

거짓말을 할 거면 조금 더 능숙하게 해야지. 평생 너를 속이고 살아야 하는 나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 냈다.

"안 울 거야?"

“안 울 거야.”

“...너를 속인 사람들이야."

이참에 아예 모진 소리를 해 버릴까. 그러면 그녀가 그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까지 벗어던질 수 있을까.

“기만하고,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이용하려고 했지.”

"하, 하지만 그분들은....”

...아무래도 아직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네 가족이라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지, 네가 가족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간섭하지 않을게. 하지만 엘리자베스, 리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내 사랑. 나는... 네가 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 닦고, 세수하고 나와. 저녁까지 굶는다고 하면 어마마마께서 의사를 부르실지도 몰라.”

홀로 남은 엘리자베스는 다시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래도 가족인데.’

레온하르트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고, 심지어 가짜 편지를 보내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족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어쩌면 좋지?'

눈앞이 캄캄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이 세 단어가 그녀가 결정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무 죄 없어.'

아직 강보에 싸여 있던 어린아이가 눈에 어른거렸다.

단지 엘리시움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인 어린 소공자.

그리고 그 이유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엉망이 된 저택에서 그 아이를 신경 써 줄 존재라곤 고작해야 늙은 집사와 하녀 몇이 전부일 텐데.'

그래도 사내아이니까 잘 먹이겠지? 코르셋도 없을 거고, 신발도 편한 걸 신기겠지. 그리고 사내답게 행동하라며 억지로 사냥터에 데려가거나....

'안 돼! 그만 생각하자.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건 그 아이를 위해서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거울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다짐했다.

'그래, 이건 내 선택이야. 나는... 그 사람들은... 어쨌든 내 가족이야.'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엘리자베스는 끝내 결정을 내렸다.

레온하르트는 예상대로 그녀의 말에 한숨을 백 번쯤 내쉬며 불만을 표시했다.

"네 선택이 그렇다면 나는 존중해. 하지만... 리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동생이 태어났어.”

"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리자베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저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그 남동생을 위해 그런 선택을 내렸다고?"

"그 아이는...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저택에서?"

남동생이라고?

그래도 여자아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자아이라면 분명 어느 귀족 가문으로 시집보내기 위해 엘리자베스처럼 가혹하게 가르쳤겠지.

'아니, 남자애여도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사내답게 행동하라며 아직 말도 못 뗀 어린아이가 울 때마다 회초리질을 하는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쳐들었다. 엘리자베스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허공에서 걱정 가득한 두 시선이 마주쳤다.

“...아바마마 내가 말할게.”

엘리자베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엘리시움 공작가의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맡겨 놓은 물건을 돌려달라는 투로 엘리자베스에게 사소한 일 하나까지 요구했다.

[루트비히에게 어울리는 방을 꾸며 줘야 하는데 황후의 동생이 될 아이에게 어울릴 만한....]

[루트비히가 감기에 걸렸는데....]

[루트비히가....]

[루트비히를....]

[루트비히.]

[엘리시움의 후계자.]

[황후의 하나뿐인 남동생.]

엘리자베스는 거절의 답장을 쓰다 말고 새로 도착한 편지를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편지를 가져다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 민망함에 얼굴을 제대로 못 쳐다볼 지경이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너무 착하세요. 소문 들으셨어요? 황실에서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작은 영지를 내려 주셨는데 그 영지에서 나는 돈으로 공작가는 다시 사치만 부리고 있대요!"

“...루트비히를 위해서야.”

[...염소젖이 그렇게 성장에 좋다던데....]

엘리자베스는 한숨과 함께 책상 위로 엎드렸다.

편지를 가져온 하녀는 고개만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가 마침내 자선 경매 겸 티 파티 당일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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