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미련이 남은 미련한 사랑(2)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먼지가 풀풀 날리는 카펫을 보며 의사는 저도 모르게 소맷자락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집사가 내놓은 홍차는 여전히 아름다운 황금빛이었으나 엘리자베스는 선뜻 잔을 쥐지 못했다.
도금이 벗겨진 컵, 이가 나간 접시, 급하게 얼룩을 닦은 흔적이 남은 은쟁반.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집사가 돌아왔다. 홍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고개만 푹 숙이고 앉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집사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머니는요?"
"마님께서는....”
집사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핥았다.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기에 그는 너무 강직했다.
“아직 누워 계십니다. 원하신다면 서재로 함께 뫼실까요?"
엘리자베스는 가느다란 비명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편지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분은...?"
“어머니께서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모셔 온 황실 소속 의사분이세요.”
그 말에 집사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이, 일단 아버지께 인사부터 드려야겠죠?"
엘리자베스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정말 공작가의 저택이라고? 이런... 귀신도 들어왔다 도망칠 것 같은 곳에?'
의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집사와 엘리자베스의 뒤를 따라 서재로 향했다.
엘리자베스가 응접실에서 착잡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이 엘리시움 공작은 마시던 그녀가 왔다는 말에 술병을 내려놓고 서둘러 깔끔한 옷을 내놓으라며 집사를 닦달했다.
공작 부인은 펼쳐 놓았던 드레스를 옷장 속으로 쑤셔 넣으며 가장 얇고 낡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드러누웠다.
“루트비히는?"
“도련님께선 아직 주무십니다.”
"이졸데가 이곳으로 올 때 데려오도록."
마지막까지 남아 루트비히를 돌보고 있던 하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어린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이졸데!”
“꺄아악!”
집사가 노크를 하기도 전에 검은 문이 양옆으로 벌컥 열리더니 끔찍한 악취와 함께 뚱뚱한 사내가 엘리자베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공작의 품에 강제로 끌어안긴 엘리자베스는 마구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러자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놓더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아버지...?"
엘리자베스는 눈앞의 거대하고 추악한 남자가 정말 자신의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했다.
고개를 잔뜩 들어 올리고 발돋움을 해도 턱 너머론 보이지 않던 큰 키와 꼬챙이처럼 마른 체구,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가장으로서의 권위로 똘똘 뭉쳐 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지?
못해도 세 겹은 되어 보이는 턱과 공처럼 둥글게 튀어나온 배,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가 잔뜩 묻어 있는 주름진 옷을 입고 있는 저 남자가 정말 내 아버지라고?
“이졸데, 이리 온! 우리 딸, 이게 대체 몇 년 만이냐!"
누런 이빨이 전부 드러날 정도로 씨익 웃으며 공작은 팔을 벌렸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의 몸과 입에서 나는 악취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네 이년!”
공작의 얼굴이 성전 속 악마의 삽화처럼 붉으락푸르락 마구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뒤로 물러난 만큼 성큼성큼 다가온 공작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엘리자베스는 곧 이어질 공작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정하십시오, 주인님! 손님, 손님의 앞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늙은 집사가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화, 황실에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왔어요!”
엘리자베스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외쳤다. 그러자 공작은 언제 그녀를 향해 손찌검을 하려 했다는 듯 팔을 내려놓고 어설픈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황실에서? 이졸데, 진작 말하지 그랬니! 하마터면 네 부끄러운 모습을 손님께 보일 뻔했구나. 의사 선생님이라고?"
“어... 어머니께서 아프시다고 하시기에... 그래서....”
“네 어미가? 아, 그렇지. 그랬지. 휴우, 네 어머니가 저렇게 자리에 드러누운지도 한참은 되었다.”
"어... 어머니께서... 정말....”
평소의 그녀였다면 단번에 알아차렸을 공작의 거짓말이었으나 지금 그녀에겐 위화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어머니께 가 봐야겠어요."
“응? 으응. 그래. 같이 가자꾸나! 네가 왔다고 하면 부인도 좋아서는 아주 그 자리에서 씻은 듯이 나을 게야!"
공작 부인의 방문을 여는 순간 황실 소속 의사는 훅 풍기는 지독한 향수 냄새에 숨을 삼켰다.
'환자에게... 향수...?'
병석에 드러누운 환자가 기분 전환을 위해 향수를 쓰는 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의 방에서 나는 향은 흔히들 사용하는 머리가 맑아지거나 숨을 쉬기 편해지는 청량한 향이 아닌 화려한 파티에나 어울릴 법한 농밀하고 진한 향기였다.
엘리자베스는 단숨에 침대로 달려가 공작 부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툭 불거져 나온 광대뼈와 숱 적은 머리칼에 하얀 실내복을 입고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는 공작 부인은 어느 날 엘리자베스의 악몽에 나왔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
공작 부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팔에 힘을 빼 떨리는 손길로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리 이졸데....”
“어머니!”
공작 부인은 최대한 가느다란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이졸데... 내 아가... 보고 싶었단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털썩 옆으로 기울이자 엘리자베스는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너무 힘들게 하지 말거라, 이졸데.”
공작은 부인의 연기가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강제로 침대 곁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아버지, 대체...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먹먹한 목소리로 공작을 추궁했다.
공작은 착잡한 척 마른세수를 하며 웃음을 숨겼다. 순진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모를 줄이야!
"이졸데, 우리 엘리시움 가문은 이제 끝이란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만드시려는 모양이야.”
“....네?"
“잘 생각해 보렴. 우리 이졸데. 뒤를 봐줄 세력도 없는 종이 인형 같은 황후를 과연 누가 황후 대접을 해 줄까? 이졸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단다. 폐하께 말씀 좀 잘 드려 보렴. 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보다 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데려왔어요. 그러니 어머니 먼저.”
“네 어미는 우리 이졸데가 파혼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매일 걱정하고 또 걱정하고 있단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아버지?"
뭘 보고만 있어요, 어서 어머니를 진찰하지 않고! 공작에게 두 손이 붙잡힌 엘리자베스는 눈으로 의사를 재촉했다.
잠시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던 의사는 허둥지둥 공작 부인의 침대로 다가갔다.
“아버지?"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공작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참, 그러고 보니 우리 이졸데에게 소개시켜 줄 새 식구가 있구나.”
“새... 식구요?"
의사가 공작 부인의 상태를 살피려는 찰나 공작은 루트비히를 안고 있던 하녀를 불러들였다.
공작 부인은 의사의 손을 뿌리치고 루트비히를 향해 팔을 뻗었다.
“고, 공작 부인. 혹시라도 아이에게 병이 옮으면 안 되니 가능한....”
“그 누구도 더 이상 내 아이를 빼앗아 가지 못해!”
공작 부인은 조금 전까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던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큰 소리를 지르며 루트비히를 끌어안았다.
“자아, 이졸데. 이리 와서 한번 보려무나. 루트비히 모르트 폰 엘리시움, 네 남동생이자 이 엘리시움을 이을 유일한 후계자란다.”
“이 아이의 누나는 황후가 될 거고. 엘리시움은 다시 한번 부흥하게 될 거야!”
"그러니 이졸데. 누나 된 도리로서, 동생과 가문을 위해 애써 보렴! 루트비히, 네 누나란다! 어서 인사해야지? 응?"
“황실에서 네가 무척 사랑받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단다. 우리 이졸데는 착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니 이해해 줄 거지?"
의사는 광기 어린 공작 부인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엘리시움 공작은 난폭한 손길로 그녀를 강제로 루트비히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문득 엘리자베스는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구역질을 느꼈다.
강보 속에 있는 아이와 눈빛만 형형하게 살아 있는 어머니, 지금 이 순간조차 가문 운운하는 아버지가 불에 타다만 그림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선생님, 제 어머니는... 괜찮으신... 건가요?"
“...공작 부인의 병명은 습진입니다. 부인께서 직접 설거지를 하셨을 리는 없을 텐데....”
흘끗 공작 내외의 눈치를 살피던 의사는 침대에서 떨어지더니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가을바람과 함께 맑은 공기가 들어오며 그녀의 방 안 가득 퍼져 있던 지독한 향수 냄새를 조금 거둬 갔다.
“아직 어린 아기에게 이런 독한 향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약만 바르면 낫는 부인의 습진보단 공작 각하의 충치가 더 염려되는군요. 혹 치아가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의사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서 그럴 리 없다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고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깨져 나갔다.
“아가씨!"
“레, 레이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저택의 공기가 역겹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한 번에 두 개씩 계단을 내려가더니 문 앞에서야 겨우 멈춰 섰다.
“아가씨....”
“저는... 저는... 그 편지는....”
“면목 없습니다.”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려온 집사는 그때와 같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명령을 기다렸다.
"문을... 열어 주세요.”
집사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문 너머, 태양을 등진 채 빛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보며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레온, 어머니가 아프다는 말은 정말로 거짓말이었나 봐. 내가 아니라 내가 가져올 기회가 그렇게도 아깝고 그리워서 가짜 편지를 썼나 봐. 나는,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전부 눈물에 녹아내리고 고작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다였다.
"레... 레온... 레온....”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쉬지 않고 먼 거리를 달려오는 바람에 온몸이 땀범벅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손이 벌벌 떨리고 빠드득 이가 갈렸다.
지금 이 순간 문 너머에서 화들짝 놀라 몸을 사리기에 바쁜 저 버러지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남은 평생치 인내심을 쓰고 있었다.
“...돌아간다.”
돌아가자, 돌아갈까? 평소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닌 화를 잔뜩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역시 화난 거겠지....'
의사는 엘리자베스를 부축하며 마차로 먼저 들어갔다.
레온하르트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엘리시움 공작만 노려보았다.
"저... 전하, 그러니까....”
"닥쳐.”
몸속에서 날뛰는 짐승을 힘겹게 다스리며 레온하르트는 손에 쥐고 있던 말 채찍을 휘둘렀다.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파열음은 그가 아닌 다른 것을 스치고 지나갔다.
“....리지 앞이야.”
공작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하며 레온하르트는 채찍을 거뒀다.
바람을 할퀸 자국이 엘리시움 저택의 대문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