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미련이 남은 미련한 사랑(1)
'어떻게 하지?'
늦은 저녁, 엘리자베스는 혹여 누가 볼까 두려워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시 책상으로 다가가 문제의 편지를 꺼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몇 번을 읽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황실이 작정하고 그녀와 공작가 사이의 모든 연락 수단을 막아 버려....]
[...엘리시움 공작 부인이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임에도 연락을 취할 수 없었으나....]
[매일 밤 열에 들떠 아가씨의 이름만 부르는 마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가슴이 아파....]
엘리자베스는 편지를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정말 이 내용이 사실일까?
엘리자베스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딱히 좋은 수가 떠오르진 않았다.
문득 어머니의 드레스를 팔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하녀가 생각났다.
혹시나,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던 엘리자베스는 편지를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건너편 방,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의 방으로 향했다.
"레온... 레온, 자?"
늦은 시간까지 황제와 오늘의 시찰 결과에 대해 보고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레온하르트는 이제 겨우 침대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베개를 몇 번 툭툭 치며 모양을 다듬던 레온하르트는 두꺼운 문 너머 들리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지?"
"들어가도 돼...?"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잠들고도 남은 늦은 시간, 문 두드리는 소리조차 없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문을 열어 달라 청하는 약혼녀의 부탁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레온하르트는 문 너머에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마물이 서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기로 단단히 각오하며 문을 열었다.
“...리지?"
차라리 마물이 그를 덮치는 쪽이 더 나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잠옷 차림으로 그에게 덥석 안겨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한 손으론 그의 목에 매달리다시피 한 엘리자베스의 등을 토닥이고, 다른 손으론 가까스로 문을 닫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리지, 안 돼. 아직 너는 미성년자고 나는 네가 원하는 어지간한 일은 뭐든 들어줄 생각이지만 이건 아직 너무 이르....”
“도와줘!”
"난 준비됐어. 그래, 뭘 도와줄까?"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대로 목에 힘을 풀었다.
쾅. 이 소리와 고통도 오랜만인걸.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배를 타고 올라앉아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한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엘리자베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옷 안에 숨겨 둔 편지를 꺼냈다.
레온하르트는 한순간이나마 불손한 생각을 한 자신을 반성하며 그녀가 내민 편지를 받아 펼쳤다.
“...어디에서 온 편지야?"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엘리자베스는 반쯤 흐느끼며 가까스로 공작저 소속 하녀라고 대답했다.
'흔들리고 힘 조절이 엉망인 글씨체. 그러나 옆으로 잉크가 번진 흔적을 보아 오른손잡이인 사람이 왼손으로 쓴 모양이군. 눈물 자국? 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택에서 나온 하녀가 마님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엘리시움 공작 부인을 위해? 무척 충직한 하녀로군. 하지만 정말 울면서 썼다면 편지지 아랫부분에 흘린 눈물은 펜이 닿을 무렵엔 말라 있었겠지. 특히나 이런 얇은 종이라면, 잉크가 번진 모양으로 봐선 마르기 전에 물이라도 흩뿌린 모양인데....'
레온하르트는 갈등했다. 이 편지가 완벽하게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엘리자베스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지옥에 떨어질 확률이 높을까?
"어... 어머니가... 정말로 드레스를 팔아야 할 정도로... 약값조차 없을 만큼... 그러면... 그러면....”
...일단 엘리자베스부터 진정시키자.
"리지. 진정, 진정해. 이 편지 언제, 누가 가져다준 거야?"
“모... 모르겠어. 황후마마와 함께 티 파티에 관해 의논하고 처소에 돌아오니 책상에 있었는데....”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아예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리지, 리지. 잘 생각해 봐. 아무리 그래도 공작가야. 약값이 부족해서 드레스를 파는 공작 부인? 들어 본 적 어?"
엘리자베스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황실에서... 일부러 공작가에서 온 편지를... 그게 사실이야...?"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아바마마께 한번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그... 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지, 리지. 진정해. 그리고... 음... 슬슬 내려와 줄래...?"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자신이 레온하르트를 깔고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옆으로 내려왔다.
“...마실 거라도 줄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때까지도 얼얼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허브를 띄운 물 한 잔을 가져와 내밀었다.
"이제 좀 진정이 돼?"
“...미안해.”
“네가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다고? 물론 남들 다 잘 시간에 성인식이 얼마 남지 않은 레이디께서 약혼자의 방에 잠옷 차림으로 몰래 들어오더니 대뜸 끌어안고 뒤로 넘어뜨리고 올라타서는....”
"레온!"
“...까진 미안해할 일이지만, 너는 천둥 번개만 치면 늘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매달렸잖아. 새삼스럽지도 않으니 그냥 넘어갈게. 그리고 그 뒤의 일도."
"...참 아량도 넓으셔라.”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등불을 켜지 않아 달이 구름에 가릴 때마다 어둑한 그림자가 방을 가득 채웠지만 잔뜩 상기된 엘리자베스의 볼만은 이상할 정도로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엘리자베스.”
"으응.”
레온하르트는 정말로 이런 말을 해야 할까 세 번쯤 다시 고민했다. 그리고 세 번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일은 아바마마와 나에게 맡기고 리지 너는... 티 파티와 자선 경매 행사에 집중할 수 있을까?"
"뭐?"
"리지. 너는 황후가 될 사람이야.”
"아,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황후는 누군가의 딸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주인이야. 황제가 그러하듯.”
“...레온은 황후마마께서 앓아누우셔도 황제의 의무를 우선시하겠다는 거야?"
글쎄. 과거의 나였다면 이미 부모님이 안 계시니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레온하르트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지금은 늦었으니 가서 자자. 이러고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 내일 한 소리 들을 거야.”
레온하르트는 문을 열고 복도에 누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내보냈다.
“리지, 잠깐만.”
엘리자베스는 의심이나 경계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진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
"그럼 이 나이가 되어서 야밤에 약혼자 방을 찾아와 놓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어? 조금은 조심해, 이 아가씨야.”
엘리자베스가 멍하게 입술만 만지작거리는 사이 황태자의 침실 문은 다시 닫혔다.
마지막으로 언뜻 보인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아침노을보다 더 붉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다시 방으로 후다닥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침대에 누워 커다란 베개를 끌어 안으며 한 시간쯤 전과는 다른 의미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 * *
그날 아침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리지는?"
하녀들은 모두들 서로 눈치만 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실 마구간으로 내달렸다.
가장 빠르고 날랜 말과 마차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다시 처소로 돌아온 레온하르트는 하녀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며 그의 애마를 타고 엘리자베스를 뒤쫓았다.
황궁 소속의 의사 한 명만 대동한 채 엘리자베스는 공작저로 향하고 있었다.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저택으로 가는 내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레온이 나에게 실망할 거야.'
어쩌면 단순히 실망하는 수준을 넘을지도 모르지. 화를 내겠지? 어머니도 왜 왔냐며 타박하실지도 몰라.
하지만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옳고 그른 건 어머니께서 무사하신 걸 확인한 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아.
'늦지... 않겠지...?'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얼굴로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녹슨 쇠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늙은 의사가 고개를 돌리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만약에, 정말로, 혹시라도.
황실이 의도적으로 그녀와 공작저 사이의 연락을 가로막는 바람에 어머니와 공작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거라면.
엘리자베스는 황실은 물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저 멀리 엘리시움 저택의 철문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제발 어머니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한편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치맛자락을 꼭 붙잡았다.
'여기가... 정말 내가 살던 그 저택이라고...?'
저택까지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심어진 나무는 가지치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덩굴처럼 마구 얽혀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빗자루질을 하지 않아 마구 굴러다니고 있었고 심지어 마차 바퀴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자국 사이론 잡초 더미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황실에서 마차가 나왔는데 반겨 주는 사람이라곤 그새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늘어난 집사가 전부였다.
"어머니, 어머니는 무사하신가요?"
집사를 만난 엘리자베스는 가장 먼저 공작 부인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예정에 없던 아가씨의 방문에 당황하던 집사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예에?'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집사로서 자격 미달인 반응을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집사의 손을 뿌리치고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갔다.
끼이익. 얼마나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았던지 절로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뒤늦게 그녀의 뒤를 쫓아온 집사는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른 아침부터 엘리자베스에게 이끌려 공작저로 와야 했던 의사는 눈만 꿈끔뻑이며 환자를 찾아 저택 안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군요.”
의사는 쯧쯔쯔 혀를 차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집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집사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다는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엘리자베스는 뭐라도 좋으니 그가 한마디 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집사에게 매달렸다.
“말해 주세요. 이건 엘리시움 가문의 장녀 엘리자베스의 명령이에요. 당장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요!"
집사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선 그녀와 의사를 그나마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유지하고 있던 응접실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