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할 때(4)
늦은 점심시간이었지만 제도의 중앙 광장에 위치한 150년 전통의 카페 루피아는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루피아의 카운터 담당인 캐롤은 쉴 틈도 없이 다시 몰려드는 손님 무리를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저 사람들은 점심시간도 있고 제도에 관광 올 시간도 있고 심지어 연극 속 주인공 놀이를 할 여유까지 있는데 왜 나는 화장실 한 번 갈 여유조차 없는 거지?
“옥상에 자리가 남았나?"
캐롤은 흘끗 옥상 자리의 번호표 여유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피아의 옥상 테라스는 연극 속 여주인공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배경으로 연극, 또는 원작인 소설을 읽고 방문하는 사람들로 유난히 붐비는 장소였다.
“에스프레소 하나, 캐러멜마키아토에 휘핑 추가, 시럽 추가, 초콜릿 드리즐은 갈아서 우울함이 싹 날아갈 만큼 달게 만들어 줘. 아, 그리고 샌드위치 둘."
루피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뭐라고 묻는다면 캐롤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녀가 루피아에서 일한 이래 그 외의 주문을 받아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러나 눈앞의 손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래서 루피아가 미처 기억할 여유도 없을 만큼 길고 복잡한 커스텀 주문을 요구했다.
캐러멜마키아토에... 그다음이 뭐였더라? 결국 캐롤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 요...?"
맙소사.
캐롤은 눈앞의 손님에게 에스프레소는 가장 작은 잔에 갓 추출한 커피 원액이 담겨 나오는 아주 쓰고 소수의 매니아층이나 선호하는 음료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내가 연극 무대 위에 있나?'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아하게 생긴 청년이 눈앞에 서 있었다.
키는 평균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크고, 살짝 내리깐 눈동자는 선명한 제비꽃색에, 어지간한 여배우보다 촘촘한 속눈썹과 달리 우뚝한 콧날과 그 아래 자리한 얇은 입술은 친절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런 청년에게 어울릴 법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당연하단 듯 서 있었다.
'하여간 잘생긴 남자는 이미 짝이 있다니까.'
캐롤은 아가씨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한순간이나마 청년에게 혹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아주 오랜만에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에스프레소 하나, 캐러멜마키아토에 휘핑 추가, 시럽 추가, 초콜릿 드리즐은 갈아서 우울함이 싹 날아갈 만큼 달게. 그리고 샌드위치 둘.]
준비되면 옥상으로 가져다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번호표를 건네주는 순간 그의 옷에서 풍기는 청량한 향기에 캐롤은 저도 모르게 근무 시간용 미소가 아닌 진짜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예의를 차리기 위한 말이란 것이란 걸 알면서도 마구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우아하고 화사하다 못해 어딘지 요염하기까지 한 눈웃음이었다.
캐롤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아침 담당으로 임명한 사장을 저주했던 것도 잊고 그의 주문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해 준 루피아의 사장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그의 곁에 서 있던 아가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미인은 폐병에 걸려도 아름답다고 한다더니, 캐롤은 그 말이 꼭 저 이름 모를 아가씨를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초콜릿 칩 많이, 아주 아주 많이, 방금 지나간 아가씨의 얼굴에서 수심이 사라질 만큼 달게!]
캐롤은 메모지에 한 문장을 덧붙여 주방으로 보냈다.
'혹시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여자들은 단것만 주면 풀린다는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막무가내로 끌고와 달래 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캐롤은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주문 안 받나?"
그러나 그들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캐롤은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녀 앞에는 연극에서 주인공이 먹었던 커피와 샌드위치 하나를 사기 위해 저 멀리 대륙 끝에서부터 달려온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옥상 난간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같다고 생각했다.
저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뭘까?
서늘한 청동 난간에 턱을 괴며 엘리자베스는 고민에 빠졌다.
“이졸데, 음식 나왔어.”
엘리자베스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트레이 위에 올려진 것들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야?"
커다란 휘핑크림으로 된 산이 올라간 잔과 달리 그 옆에 있는 하얀 컵은 어린아이의 소꿉놀이용 장난감처럼 작다 못해 레온하르트의 손 크기에 비해 앙증 맞게 보였다.
“하나는 네 것, 하나는 내 것.”
엘리자베스 쪽으로 하얀 크림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잔을 밀어 주며 레온하르트는 그의 커다란 손에 비하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은 도자기 잔을 들어 올렸다.
하얀 컵에 담긴 것은 평범한 커피라고 보기엔 힘들 만큼 진한 액체였다.
"그게 아니라, 그건 뭐냐고."
엘리자베스는 에스프레소에 흥미를 보였다. 이곳에 있는 커피 향을 몽땅 모아도 저 작은 잔 하나에 들어 있는 진하고 깊은 향을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른의 음료.”
“어른... 너 나랑 두 살 차이인 거 알지?"
“알다마다.”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꼴깍 삼켰다.
그동안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허가받지 못한 쓰고 떫고 시큼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특유의 맛을 음미하며 레온하르트는 등나무를 엮어 만든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으음...."
"아주 대히트작인 연극이 있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공주님이 어느 날 궁을 빠져나와서, 이 가게에서 처음으로 평민들이 먹는 아침 식사를 하고, 평민 남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졌지만 끝내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별을 고하며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를 했던 장소가 바로 여기야.”
“아, 혹시 소설에 나온 그곳? 어쩐지 사람들이 계속 이 자리만 흘끗거리더라.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 찾는 거야? 말 돌리지 말고. 그 음료는 뭐냐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찾는 거지. 어른의 음료라서 아직 이졸데는 먹으면 안 돼. 대신 이거 먹고 기분 풀어.”
“하지만 트리스탄이 그러니 더 신경 쓰이는걸?"
이럴 때만 고집을 꺾지 않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레온하르트는 잠시 갈등했다. 한번 먹여 보면 다시는 찾지 않을 테니 이참에 그냥 내버려 둘까?
“...나는 분명 말렸어. 티스푼으로 한 숟갈, 그 이상은 안 돼.”
엘리자베스는 활짝 웃으며 레온하르트의 컵에서 검고 향기로운 액체를 한 스푼 듬뿍 퍼내어 입 안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황금빛 캐러멜시럽이 듬뿍 끼얹어진 크림 산을 마구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 이런 걸 어떻게 먹어?"
"그러니 말했잖아. 어른의 음료라고.”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점심시간이었다.
달콤한 음식은 엘리자베스의 고민거리를 잠시나마 잊게 해 줬고, 레온하르트는 누군가 두고 간 신문을 몰래 슬쩍해 읽기 시작했다.
과거, 그와 일리시스가 하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놓치지 않고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칭찬할 것은 칭찬하던 신문사였다.
'이곳도 지금은 내가 아닌 아바마마를 칭찬하고 있으려나....'
그런 심정으로 레온하르트는 사설 부분을 찾아 눈으로 훑어내렸다.
[황태자 전하께선 특히나 예비 황태자 비신 레이디 엘리시움을 은애하시며....]
레온하르트는 아예 특집으로 실린 자신과 엘리자베스의 기사를 읽다 결국 신문을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 놓았다.
"트리스탄, 얼굴이 빨개.”
“...카페인 탓이야!”
달콤한 것을 먹고 기분이 조금 나아진 엘리자베스는 약속한 대로 광장에서 음유 시인의 거리 공연을 즐기고 제도의 풍경을 담은 엽서와 기념품 과자까지 한가득 산 뒤에야 황궁으로 돌아갔다.
* * *
“레온.”
황궁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없다. 미래의 황태자비, 황후가 될 엘리자베스는 다시 수심 깊은 얼굴로 황태자를 불렀다.
“공작가의 사정을 알아봐 줘. 나는... 티 파티 일로 황후마마를 잠깐 뵈어야겠어."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뭘지 생각해 봐.”
으응...."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줬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눈을 보며 웃어 보였다.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성당에 들렀다.
신의 꽃밭을 감히 자처하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 너머로 한 줄기 빛이 그녀의 머리 위에 부드러운 베일을 덮어 주었다.
레온하르트는 문에 기대서서 그녀가 기도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봤다.
이대로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간다 해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경건하고 신성한 모습에 그는 숨을 죽이고 엘리자베스의 기도문에 집중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허락하시고.
우리 모두, 모두라.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편으론 그 행복을 허락받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엘리자베스는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로테아의 작업실에서 만난 엘리라는 미래의 재단사는 학교보단 작업실을 다닐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건 뭘까?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엘리자베스는 티 파티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황후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차가 다 식을 동안 한숨만 폭폭 내쉬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황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이 말을 안 듣니?"
"네? 그럴 리가요!"
슬쩍 떠보듯 해 본 말인데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펄떡 뛰어오르며 부정했다.
“그럼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겠구나.”
"으음.”
엘리자베스는 한참을 고뇌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로서 생각해야 하는 문제라면 그래도 마지막까지 조금 더 고민해 보렴.”
황후는 식어 빠진 차를 한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겪어 봐서 아는 일이지만, 이미 관을 물려준 황후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거든. 그러니 엘리자베스. 우선 도전해 보렴.”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가 해결할 문제인 것 같네요. 아니, 제가 해결하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황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정말 관을 물려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는 잠시 잊자꾸나. 티 파티 준비로 내 조언이 필요하다고 했지? 테마는 정했니?”
엘리자베스는 방싯 웃으며 그녀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그녀의 말에 눈을 빛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구나! 나도 몰래 그림 하나를 출품할까?”
“저도 그림을 출품하려 했는데...!"
"엘리자베스의 그림이 내 그림보다 더 높은 값으로 낙찰된다면 그림 스승으로서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황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비하자면 완전히 구름을 둥둥 걷는 것 같은 걸음으로 엘리자베스는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발신인은 처음 보는 주소, 수신인은 엘리자베스.
한물간 꽃무늬 편지 봉투 속에 담긴 필체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얇고 이리저리 획이 튀어 있었으며 곳곳에 물에 번진 흔적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내용만 확인하고 서랍장 속에 편지를 숨겼다.
겨우 진정을 되찾았던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불길한 예감에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