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85화 (85/130)

85화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할 때(3)

도로테아 샤펠, 제국 전체를 손꼽아도 채 열 사람이 되지 않는 단골 고객에게 친근함과 그 손가락에 대한 경의를 담아 도로시라 불리는 재단사는 실과 바늘로 그녀의 세상을 펼쳐 놓은 희대의 천재였다.

그녀는 처음 황궁으로 들어가 뮤즈를 만났던 날을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색 하나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하얀색만 집착하던 작은 소녀. 천사보단 등지에서 떨어진 새 같던 작은 아가씨.

그런 아가씨가 이젠 어엿한 숙녀가 되어 그녀의 가게에 직접 찾아왔단다.

그녀의 뮤즈가 찾아왔다는 말에 도로테아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왔다.

"화, 화, 화....”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할까?"

"그러지요!”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도로시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고객님을 모시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이미 완성된 의상을 거래하거나 짧은 주문, 상담 예약으로 분주한 1층과 달리 홈질 한 땀에도 정성을 다해 진지하게 임하느라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2층의 작업실.

그 위에 그녀의 성이 있었다.

오늘은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가 아닌 가명을 쓰고 있다는 말에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슈 트리스탄과 마드무아젤 이졸데라... 아, 이번에 새로 비단을 수입해 온 나라에선 그렇게 부른다더군요. 예쁜 어감이죠?"

공중을 풀풀 날아다니는 실밥과 먼지에 토끼 눈이 된 엘리자베스와 달리 레온하르트는 이전에도 온 적이 있는 사람처럼 익숙하게 엉망이 된 방을 가로질러 소파에 앉았다.

풀썩 소리와 함께 하얀 가을볕 위로 먼지가 부들 씨앗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청소 좀 하고 지내는 게 어떤가?"

도로테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큼큼 헛기침만 하더니 엘리자베스가 앉을 자리에는 하얀 비단으로 만든 방석을 깔아주었다.

"드문 일이네요. 이렇게 두 분께서 함께 나오시다니.”

“백성 시찰. 슬슬 이졸데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제 매장이 아닌 조금 더... 평범한 곳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도로테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가게는 빈말로라도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가 아니었다.

특히나 데뷔탕트 이후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양말 하나까지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완전히 사실로 드러난 이후론 더더욱.

"2층을 드나드는 가장 어린 직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의중을 알 수 없는 레온하르트의 부탁에 도로테아는 눈만 깜빡였다.

“이졸데에게 길은 한 방향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어.”

“...레이디 이졸데에게...?"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는 그렇지 않아도 바쁜 시즌에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직원을 불러내라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대놓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해도 될까요?"

그러나 그녀의 뮤즈가 부탁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아예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작업실에서 사용하는 가장 작은 바늘 하나까지 설명해 줄 기세로 변하는 것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2층 작업실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받은 지 오늘로 드디어 일주일.

선배들의 조언을 빙자한 구박에 겨우 익숙해진 엘리는 이미 고참들로 가득찬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늘도 그녀의 작업 공간은 그늘진 모서리인 모양이었다.

'뭐... 막내니까 어쩔 수 없지.'

엘리는 실을 입술에 물고 부러운 시선으로 볕 아래에서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는 수석 재봉사들을 응시했다.

'나도 언젠가 저곳에서 바느질할 수 있을까...?'

"엘리, 멍하니 있다 또 바늘에 찔려 원단에 피 묻힐 생각이야?"

“죄송합니다!”

“엘리, 점장님이 잠깐 좀 보자고 하시는데?"

“죄송합... 네?"

엘리는 물론 작업실에 있던 재봉사들의 시선이 모두 소식을 전달한 직원에게 날아가 꽂혔다.

‘서, 설마 해고당하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 엘리가 드레스 하나를 완전히 망쳐 놨잖아, 역시 그 일 때문에 쫓겨나는 거 아닐까?'

'모처럼 쓸 만한 손이 들어왔나 했더니... 그러니 덤벙거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평소엔 성물이 보관된 신전보다 더 조용하고 경건하던 작업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엘리는 떨리는 동작으로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걸음이 작업실을 나서는 마지막 걸음은 아니겠지?'

눈물이라면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밤 질리도록 흘렸다. 그러니 여기서 울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는 단단히 각오한 뒤에야 직원의 뒤를 따라 작업실을 나섰다.

“점장님은 위층에 계세요. 무척 중요한 고객님이니 예의를 갖추는 것 잊지 말고.”

“중요한... 고객님이요?"

해고는 아니구나! 엘리는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작업실 너머까지 들리도록 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요!"

작업실의 재봉사들은 아직 어리고 순수한 열정으로 반짝거리는 엘리의 목소리에 저마다 얼굴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감을 조금이나마 볕이 들어오는 자리로 옮겨 두었다.

* * *

“에... 엘리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도로테아 님의 작업실에서 일하게 된 건 3년 전이고, 작업실을 드나들게 된 건 일주일 전부터입니다.”

도로테아의 방은 수석 재봉사도 허락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대체 왜 나를 부르신 걸까?

예상대로 중요한 손님은 귀족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귀족이 아닌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높으신 신분.

도로테아의 소파에 길게 기대 누운 젊은 귀족과 초상화에 그려진 그림처럼 우아하게 앉아 있는 레이디 앞에서 엘리는 완전히 긴장한 목소리로 벌벌 떨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이는?"

“다, 다음 달이면 열여덟 살이 됩니다!"

“제법 쓸 만한 손을 가진 모양이군, 도로시.”

엘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점장님의 애칭을 부르는 청년을 보며 경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점장님의 말에 엘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홈질하는 방법만 익힌 수준입니다.”

인정받았다? 인정받은 건가? 점장님이 나를 인정하셨어?

엘리는 순간 눈앞에 있는 고객님의 존재도 잊고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처음 바늘을 쥐는 것을 허락받은 일 이후로 지금처럼 기쁜 순간은 없었다.

“열여덟이면... 애매한 나이군. 학교는 다녔나?"

레온하르트의 말에 엘리는 귀족에게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내저었다.

“읽고 쓰는 것 정도는 부모가 가르쳤던 모양이지만 재봉사가 쥐어야 하는 건 책보다 바늘이지요.”

도로테아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에게 엘리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굳은살로 울퉁불퉁해진 중지, 바늘에 찔려 너덜너덜해진 엄지손가락과 가운 데가 움푹 팬 손톱은 그녀가 이곳에서 어엿한 한 사람분의 일을 하고 있다고 증명하고 있었다.

"엘리가 학교에 다녔다면 이런 손은 가지지 못했겠지요. 엘리, 학교에 다니지 못해 서운하니?"

"아니요! 전혀!"

엘리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말하는 조각상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같이 화려한 용모의 청년이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제가 이곳에서 일한 덕분에 제 동생 중 가장 똘똘한, 아니. 그러니까 가장 영리한 동생은 이제 아카데미도 다닐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전혀 아쉽지 않아요.”

"그것 말고, 진짜 이유.”

“진짜... 이유요...?"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는 상기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말을 이었다.

“...학교에선 수를 놓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옷본에 필요한 치수를 계산하는지도 배울 수 없구요. 저는 점장님 같은 훌륭한 재단사가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오히려 학교보다 이 가게에서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게에서...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네...!"

엘리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를 본 순간 직감적으로 그녀가 점장님의 뮤즈임을 알아차렸다.

“저어, 저는 이곳에서 일하는 게 정말로 즐거워요. 어머니께서도 그러셨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서 일하고 배웠다면 어딜 가서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구요.”

“...그러니?"

엘리는 위아래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운 숙녀분은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숙이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엘리... 라고 했니? 재단사가 되고 싶다는 그 꿈, 응원할게.”

가게를 드나드는 다른 귀족 집안 아가씨와 달리 화려하다기보단 정갈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었다.

한편으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으나 말에 담긴 마음만은 진심인 듯 그녀는 웃으며 엘리를 응원했다.

그 순간 엘리는 귀에 이어 자신의 눈까지 의심했다.

그리고 왜 그녀의 고용주가 다른 재단사처럼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아닌 한 가문의 아가씨를 뮤즈로 삼았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소파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사내의 존재만으로도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구름처럼 하얗고 가벼운 바람이 되어 그녀의 붉게 상기된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졸데, 다른 길을 찾았어?"

소파에 늘어져 있던 청년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이졸데라 불린 숙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그 또한 마주 웃어 보였다.

엘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얇은 시폰 한 겹조차 그들 사이에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두 고객님을 도로테아가 직접 배웅하고 돌아오는 사이 엘리는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엘리, 너도 저분의 옷을 만들고 싶니?”

"네, 네! 점장님!"

도로테아는 엘리의 손을 앞뒤로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픽 웃었다.

“아직 십 년은 일러.”

“그 말은, 십 년 뒤에는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긍정적인 성격은 여전하구나. 어서 가서 작업이나 마저 하렴. 새로운 황후 마마의 대관식 드레스에 진주 하나라도 달고 싶다면 말이야.”

엘리는 한 박자 늦게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소리내어 만세를 외쳤다.

조만간 엘리자베스의 이름으로 열리는 자선 경매회 겸 티 파티가 있을 거란 말에 도로테아는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엘리를 본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행동은 순 엄살이란 것을 눈치채고 키득키득 웃었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 같던 분이 어느새 저렇게 우아한 백조로 자라셨을까....’

레온하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가게 밖으로 나서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며 도로테아는 감상에 젖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도로테아는 가게로 돌아왔다.

“이졸데, 안 피곤해?"

“으음... 조금. 아까 앉아있는 동안 긴장이 풀렸나 봐.”

“그럼 점심이라도 먹고 조금 쉴까? 겸사겸사 사람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도 좀 들으면서.”

엘리자베스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졸음에 겨워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하품을 했다.

오후로 넘어가기 시작한 햇살 아래 하얀 양산을 든 엘리자베스의 그림자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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