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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84화 (84/130)

84화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할 때(2)

“이졸데, 정신 차려. 내가 오늘 왜 너를 데리고 나왔는지 잊었어?"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툭 하고 건드리는 순간 거품이 터지듯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네 눈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온 날이야. 공작가의 일은... 황궁에 돌아가서 알아봐도 늦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공작가인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그렇지만....”

“이졸데.”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구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한 시선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저 눈빛을 억지로 뿌리치고 완전히 잊으라고 하는 건 역시 너무 잔인한 일일까?

아니, 이제 그녀도 홀로 서는 법을 익혀야 한다. 설령 정말 공작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한들 경솔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

레온하르트는 혀를 깨물고 부러 차가운 태도로 그녀의 애타는 시선을 무시하며 말을 돌렸다.

“사람들이 사시사철 따스한 물을 쓸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지?"

“...할 수만 있다면.”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혀를 깨물었다.

그들이 지금부터 이야기를 나눌 주제는 공작가의 사정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미래의 황제와 황후로서 의논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조금 전 우물가에 있던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지?"

"...응."

그녀의 긴 속눈썹이 평소보다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건 마땅히 네가 누려야 할 권리니까.”

"하지만....”

“이졸데, 너는 상냥한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해.”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맞잡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충분하지 않아. 생각만 해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면?"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충분히 고민하고 또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뭔가 하고 싶어.”

역시 시곗바늘이 백 번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그녀는 황후가 되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눈물을 거두고 결의에 찬 눈빛을 빛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뭘 하고 싶어?"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다시 고민에 빠진 그녀의 옆얼굴을 지켜 봤다.

은방울꽃의 꽃말은 '틀림없이 행복해 질'이라고 하던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엘리자베스는 은방울꽃 그 자체라 해도 좋을 거라고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화려하게 만개한 작약도, 눈처럼 새하얀 장미도 그녀 앞에선 작은 종소리처럼 형태 없는 아름다움으로 변하고야 만다.

그녀가 나름대로 강구한 방법을 두고 몇 가지 조언을 해 주던 레온하르트는 문득 엘리자베스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말을 멈췄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이졸데, 왜 그래?"

엘리자베스는 달뜬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을 마치 커다란 종이 위에 막힘없이 그림을 그려 내듯 술술 말하는 레온하르트가 어쩐지 정말 황제처럼 느껴졌다.

“...트리스탄이 정말 황제 폐하 같아서.”

'...그야 정말로 황제였으니까. 그것도 다 망해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켰을 정도로 훌륭한.'

“이래 보여도 아바마마를 도와 본격적으로 배우고 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머리칼을 한 움큼 쥐어 키스했다.

“그러니 그런 계획에 대한 미래의 황후마마 생각은 어떠신지요?”

엘리자베스는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대답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황후가 정치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예법에 어긋난다고 어머니께서 그러셨으니까....”

그 잘난 부모가 너를 통해 어떤 부정부패를 저질렀는지 너는 평생 모를 거야. 아니, 모르는 편이 나아. 이젠 일어날 일 없는 일이니까.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장난스러운 손짓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말했다.

“새로운 사교계의 주인은 너야, 이졸데.”

“.....무슨 뜻이야?"

“네가 명령만 한다면 저 바다 너머에서도 올 귀부인들이 아주 많다는 뜻이지. 그 사람들과 함께 티타임에 차만 마실 생각이야?"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햇볕 아래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모습에 속으로 감탄했다.

문득 그는 화가들이 가여워졌다. 이렇게 반짝이고 아름다운 색을 그들은 절대 화폭에 담아내지 못할 테고, 평생 그 점을 안타깝게 여길 테니까.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모아 기부하는 건 어떨까?”

"응, 으응?"

화가들을 동정하느라 그녀의 말을 놓친 레온하르트가 눈만 껌뻑였다. 엘리자베스는 조금은 자신 없는 투로 막 생각난 계획을 설명했다.

“아까... 드레스를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난 건데, 더 이상 입지 않는 옷 같은 걸 기부하면.”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평민들이 입는다고? 이졸데, 조금 전 우물가에 있던 사람 중 그런 드레스를 입고 물을 길으라고 하면 열 사람 중 열 사람이 거부할걸?"

"그... 그러네? 으음... 아! 그럼 경매는 어때?"

“경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종종 굳이 무명 화가를 자처하며 자신의 그림을 경매에 내놓곤 했다.

비록 그린 이는 알 수 없으나 특유의 화풍과 그림 속 풍경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 매료된 사람들은 높은 값에 그녀의 그림을 입찰했다.

"황후마마께선 그렇게 번 돈을 전부 빈민 구제를 위해 기부하셔.”

"어마마마께서?"

처음 듣는 말에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후가 그렸다고 하면 그것이 구겨진 포장지 위에 대충 그린 선 하나라고 해도 비싼 값에 사 들이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아들에게까지 비밀로 해야 하는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쩐지 서운한데....'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래서, 경매를 한다고?"

“응. 출품자는 무조건 익명으로, 티 파티 전날까지 황궁에 미리 보내 놓으라고 하고, 황후마마처럼 낙찰된 금액으론... 음... 뭘 할 수 있을까?"

“굳이 익명으로 할 필요 있어? 네가 내놓은 물건이라면 베일리가 물고 뜯던 장난감 공이라고 해도 비싸게 살 사람들이 널렸는데....”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라거나, 나 라거나, 나 말이야.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는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경매에 나온 물건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내 곁에 누굴 둬야 할지도 알 수 있을 거야.”

“곁에 둘 사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탕트에서 느꼈어. 두 영애처럼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해.”

“흐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래?"

흥미가 생긴 레온하르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집중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지만... 아마 영애들은 가능한 비싸고 진귀한 물건을 가져오려고 하겠지? 익명이어도 출품자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라거나... 하지만 나는 그림을 내놓을 생각이야.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림을.”

"보이는 사람?"

"황실에서 열린 경매에서 작가의 이름조차 없는 하얀 강아지 스케치가 나온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야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아!"

“트리스탄이 생각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여 줄까...?"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실패하면 실패할 때를 대비해 제대로 된 물건을 준비하면 돼.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나도 뭔가 출품할까?"

“이건 숙녀들의 문제니 신사분은 얌전히 계셔요.”

“으음.”

레온하르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느새 멀리서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점원과 왜 아직까지 가게를 열지 않았냐고 타박을 주러 온 사장을 발견하고 입술 위로 검지를 대며 경고했다.

'쉿.'

사장과 점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싶어.”

“학교를?”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안 돼...?"

“그럴 리 없잖아. 그냥...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학교, 학교라....”

귀족과 젠트리들은 가정교사가 집에 상주한다.

몇 년 전 제정한 법에 따르면 아무리 가난한 이들이라도 일정 나이가 되면 제국에서 세운 학교에 다니며 기초적인 읽고 쓰는 방법과 역사, 산수 등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수준 높은 '학문'은 아직도 아카데미에서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워야 하는 상류층만의 특권에 가까웠다.

'계집애가 똑똑해 봤자 어디에 쓴다고. 차라리 그 돈으로 시집갈 준비나 해!'

'너무 똑똑한 여자는 귀여운 맛이 없어서 싫다니까. 무슨 말만 하면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대니까 내가 여자를 만나는 건지 아카데미에 있는 건지....'

'딸은 어차피 시집보내면 끝이지만 아들은 아니잖아?'

'설마 엘리자베스도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란 건가?'

그 공작 부인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런 식으로 엘리자베스를 얽어매고도 남았다.

“아까 광장을 지나치며 봤어. 옆구리에 책을 끼고 똑같은 망토를 입은 어린 애들... 학교에 가는 학생들 맞지?"

"으응. 여기는 제도니까... 사립 학교에 다니는 학생일지도 모르겠네.”

엘리자베스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중 여자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어. 다른 곳도 아니고 제도인데도. 그럼 제도 밖에선 대체 몇 명의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냥 어린애라고 생각했던 엘리자베스가 지금은 어엿한 숙녀, 아니 황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좋아. 학교 건은 돌아가는 대로 아바마마께도 말씀드릴게. 내가 아닌 이졸데 네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그야 네가 생각해 낸 일이니까. 하지만 이졸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생각이야?"

"그건....”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다시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며 미소지었다.

“이졸데, 우리는 세상을 만들고 다스려야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어떤 일이든 그에 대한 차선책과 그다음 대안까지 생각해 놓는 편이 좋아.”

“...트리스탄은 그렇게 하고 있어?"

레온하르트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할래. 만일 학교를 세울 수 없다면... 없다면....”

어떻게 하면 좋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래도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이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고 생각해 볼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손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제도 구경을 할 생각에 마냥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른 아침 황궁을 나설 때와 달리 가게를 나서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조금 더 진중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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