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할 때(1)
엘리시움 저택은 이제 집사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 메이드만 남아 있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모두 진작 해고되거나 몰래 도망친 지 오래였다.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풀밭을 밟았던 정원은 이제 벽돌을 깔아 만든 길마저 거무죽죽하게 죽은 이끼로 뒤덮여 마치 늪처럼 보였다.
기름칠을 하지 못한 철문에선 소름 돋는 끼기긱 소리가 났다.
공작이 발로 차 버린 바람에 칠이 벗겨진 문은 솜씨 나쁜 사용인이 건성건성 칠을 하는 바람에 붓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더 이상 홍차 찌꺼기를 사용해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카펫에선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자욱했다.
그녀가 돌아와 이 광경을 본다면 정말 이곳이 내가 살던 그 저택이 맞느냐 되물을 정도로 엉망으로 변한 저택 한 편에서 천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직 공작께서 화풀이 삼아 찢어발기실 커튼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령이 나오는 폐가라 해도 이곳처럼 을씨년스럽진 않을 거야.
집사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벗어난 공작을 향해 눈을 흘기며 바닥을 나뒹구는 커튼 봉을 다시 창문에 설치하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어지간히도 데뷔탕트에 초대받지 못한 충격이 컸던지 공작저의 분위기는 황궁에서 초대장이 도착한 날을 기점으로 가라앉다 못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좋지 않은 쪽으로.
'도련님께서 태어나셨으니 조금이나마 바뀌리라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지....'
집사는 지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걸어온 흔적이 카펫 위에 발자국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래서야 도둑이 들었다가도 제 발로 다시 나가겠군.'
집사는 애써 조소하며 시계를 확인한 뒤 공작의 서재로 향했다.
“그래, 황궁에서 연락은 아직 없고?"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주인님.”
집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을 하나둘 줍기 시작했다.
“늦어져? 하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보통 중대한 사항이 아니니까 말이야! 감히 황후 될 사람의 부모를 이런 식으로 멸시해? 그깟 황실이 뭐라고!"
한때 천사의 후예라는 말이 어울렸던 아름다운 은발은 이제 노인의 백발과 다를 바 없이 푸석푸석하게 마르고 색이 바래 있었다.
한 번 째려보기만 해도 사람들을 벌벌 떨며 발아래 엎드리게 만들던 푸른 눈동자 또한 이젠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푸른빛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흐리멍덩하게 변했다.
호리호리하던 체격 또한 매 계절 새로 바지를 맞춰야 할 만큼 마구 살이 붙어 있었다.
'내가 모시던 주인은 대체 어디로 갔지...?'
순간 집사는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칼로 난도질당한 초상화 속의 엘리시움 공작은 여전히 형형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데, 지금 눈앞의 당사자는 비단옷을 입었을 뿐 마을 어디에나 있는 글러 먹은 낙오자의 꼴을 하고 있었다.
집사는 형식상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그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공작이 다시 담뱃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
계단을 내려가려던 찰나 집사는 한 시녀와 마주쳤다.
숄로 머리를 꼼꼼하게 감춘 시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마님께는 비밀로 하거라."
“그래야지요....”
“뭘 비밀로 한다는 거지?"
"마님!"
좀처럼 낡은 드레스를 받아 주는 가게가 없어 한참 동안 입씨름을 한 끝에 금화 몇 개를 받아 온 하녀는 허리를 숙이며 벌벌 떨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드레스를 판 돈은 집사님께 방금 드린 참입니다.”
“그래? 중간에 빼돌린 건 아니겠지? 이번엔 가게에서도 감탄을 했겠지? 그 귀하디귀한 동쪽 나라의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 아니더냐. 드레스가 아니라 옷감 조각이어도 영광으로 알고 제발 팔아 달라 애원을 해도 모자랄 판에... 건방진 것들.”
매일 몇 번이고 목욕을 반복하던 공작 부인 또한 공작과 다를 바 없이 변해 있었다.
손끝은 주방에서 그릇을 닦는 하녀처럼 습진에 걸렸고, 언제 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녀는 매일 빗질을 반복하며 죄 없는 머리카락만 뽑아 대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비쩍 마른 몸과 피폐해진 마음으로 갓난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아이를 키울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 공작 부인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들을 하녀의 품에 적당히 '던져' 놓았다.
아무리 엘리자베스를 키웠던 하녀라고 한들 그녀가 아이를 보러 오는 시간은 매 순간 긴장하고 또 긴장해야 했다.
“네가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란다."
공작 부인은 아기 침대에 누워 있던 자신의 아들에게 속삭였다.
비쩍 마르고 머리숱도 별로 남지 않은 구부정한 노파와 갓난아기.
멀리서 누가 봤다간 마녀가 아기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녀의 손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그녀는 경기를 일으키며 방을 뛰쳐나왔다.
"목욕! 당장 목욕물을 준비하거라!"
하녀는 아이의 귀를 손으로 막아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는 죄가 없다, 가여운 아이다, 엘리자베스를 지키지 못했으니 이 아이라도 제대로 키워야 한다.
그 생각으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을까.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엘리시움 공작은 새 포도주병을 따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그 발칙한 계집을 이용해 가문을 일으킬 수 있을까?
데뷔탕트에 부모가 참여하지 않았던 것을 알면서도 무시한 계집이었다.
'그 다리몽둥이를 다시 부러뜨려야 정신을 차리겠지!'
황실에선 갖은 이유를 들어 그와 엘리자베스가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아비와 딸이 만나겠다는데 말릴 명분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이냐. 가만, 아비와 딸? 가족과 딸이 만난다?
그거다! 공작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술에 완전히 절어 버린 몸은 그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의자에 주저 앉았다.
"당장 부인을 불러오게!"
집사는 불안한 얼굴로 저택을 내달렸다.
“부인, 딸을 보고 싶지 않소?"
"술 냄새 나는 몸으로 가까이 오지 말아욧! 이졸데? 그 망할 년?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나를 망신 준 그년을 내가 왜?”
“그 아이야말로 엘리시움을 다시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야!"
"이딴 가문 따위 무너지든 말든!"
“뭐, 뭐라고?"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습니까? 아이만 아니었으면 당장 당신 같은 머저리와 이혼했을 거야!”
“가장에게 머저리라니! 어차피 이혼한다 한들 돌아갈 곳도 없는 여편네가!"
“여편네? 여편네? 내가 이 지경이 된 게 대체 누구 탓인데!"
"주인님, 마님, 진정하십시오. 품위를, 품위를 유지하셔야지요.”
집사의 만류에 금방이라도 서로를 향해 달려들 것 같던 두 사람은 흥, 하며 벽만 노려봤다.
“젠장....”
“쳇... 부른 이유가 뭐죠? 또 쓸데없는 일로 부른 거라면 다시는 이런 냄새나는 돼지우리에 들어오지 않겠어요.”
“돼지우리? 이게 정말 보자 보자 하니...!"
"주인님! 주인님!"
엘리시움 공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자 등받이가 뒤로 넘어갔다.
“부인은 당분간 병자가 되어야겠소.”
"병자? 나를 이 꼴로 만든 걸로 부족해서 정말 미친년으로 만들어 병원에 처박기라도 하겠다는 말이....”
“그런 게 아니라! 부모가 아프다는데 딸이라는 년이 설마 두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진 않겠지!"
“설마....”
“그 머리는 장식인가? 생각을 좀 해 보게, 매일 드레스나 팔아 치우지 말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드레스를 파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이 망할... 망할...."
“시끄러워! 어디 감히 가장이 말을 하는데! ...편지를 쓰게. 어미가 아파서 오늘내일하는데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말이야!”
“우리가 황실에 편지를 보내 봤자 그 쪽에선 신경도 안 쓰는 걸 아직도 몰라요?"
“뭐... 뭣? 집사 네놈... 감히 그동안 주인을 속였겠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분명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그저 답장이 아직까지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졸지에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리게 생긴 집사가 기겁하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무튼 편지를 보내. 매일이라도 보내란 말이야! 점점 얄팍해져 가는 글씨체로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인 것처럼 애절하게 써서! 계집들이 잘하는 게 그런 일 아니던가?"
"말끝마다 계집 계집! 사내구실도 못 하는 주제에...!”
“그 입 닥치지 못해?"
“편지를 써서, 그래도 이졸데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어쩔 생각인데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아무튼 편지를 써!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저택으로 그 아이를 데려와서... 황후의 친정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아 오는 거야...!"
집사는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황실을 상대로 인질극이라도 벌이시겠다는 건가?
“뭐 하고 있어! 당장 가지 않고!"
엘리시움 공작은 손에 잡히는 잉크병을 냅다 내던졌다.
공작 부인의 귀 옆을 스쳐 지나간 잉크병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내며 공작 부인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깨끗한 드레스에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내 드레스!”
“그깟 드레스 드레스,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여편네야!”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술 좀 작작 마시고 이 썩은 내 좀 어떻게 해 보라니까!”
“마님, 마님! 고정하시고... 뭣들 하느냐, 어서 마님을 모시지 않고! 주인님, 주인님께서도 제발 진정하시지요. 제발!”
지긋지긋하다.
문득 집사는 정녕 이런 저택의 모습을 엘리시움 저택이라 해도 좋은가 회의감을 느꼈다.
'엘리자베스 아가씨께서 계실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집사는 자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엘리시움을 총괄하는 집사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엉망이 된 저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집사는 한탄했다. 그리고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자신을 탓했다.
'도련님, 도련님만은 지켜 드려야 해.'
집사는 애써 결의를 다지며 엉망이 된 저택을 조금이나마 보수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 쓰던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편지를 쓰고 그 위에 물까지 흩뿌리자 어딜 봐도 병에 걸려 심약해진 어미가 눈물을 흘리며 쓴 것 같은 편지가 완성됐다.
그녀 또한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무시하고 있을 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제국과 함께 시작했던 엘리시움의 역사는 조금씩 몰락하고 있었다.
굳이 공작 부인이 쓸 법한 고상한 봉투가 아닌 꽃과 레이스 무늬가 유치찬란한 봉투를 쓴 이유는 명백했다.
심지어 봉투에 찍힌 인장은 엘리시움의 문양이 아닌 어린아이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조잡한 문양이었다.
공작 부인은 얼마 전 쫓아냈던 하녀의 이름으로 주소를 적어 집사에게 봉투를 건넸다.
도저히 한 제국의 공작이 거주하는 저택이라곤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며 공작 부인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황실에게 빼앗긴 딸을 대신해 신은 그녀에게 엘리시움 공작가를 이을 아들을 내려 주셨다.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만 참자. 공작 부인은 그렇게 결심하며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계단 난간을 꽉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