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숨을 죽이고, 손을 맞잡고(4)
“얼마 전 아바마마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네가 성인이 되는 해에 나에게 황제의 관을 넘겨주고 싶다 하셨어.”
달그락, 이번엔 그녀가 쥐고 있던 자그마한 포크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우리도 이제 마냥 어린애로 있을 수는 없어. 그렇지?"
끄덕끄덕.
“나는 오늘 너에게 네가 다스려야 할 제국을 보여 주고 싶어.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사는지 보고, 느끼고,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했으면 해.”
엘리자베스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레온하르트만 쳐다봤다.
햇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가 갑자기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이자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 어엿한 한 나라의 군주처럼 보였다.
“그러니 이졸데. 조금 전 우물가를 잊지 마. 누군가에겐 단순한 흥밋거리나 짧은 체험이었을지 몰라도 그들에겐 삶 그 자체니까.”
엘리자베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겐 체험이지만 누군가에겐 삶이라는 말이 무겁게 들렸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제도 구경을 시작했다.
마차 여섯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넓은 대로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탄성을 내뱉었다.
"왜 진작 제도에 나오지 않았을까?"
“그러게. 네가 이렇게 즐거워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나올걸. 바닷가와는 또 다른 느낌이지?"
“조금 더 웅장하고... 위엄 있고... 벽돌 하나하나가 전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실제로 제국보다 더 오래된 건물도 있으니까.”
“정말?"
“정말. 당장 저기 저 분수대만 해도 초대 황제께서 제도의 위치를 고민할 때 지나가던 성자가 지팡이를 꽂았더니 샘이 솟아나... 이졸데! 혼자 가면 위험해!”
여긴 황궁이 아니라 네 얼굴을 보고 알아서 비켜 줄 사람들도 없단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광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와 그 분수대 근처에 동판으로 새겨진 설명을 읽으며 다시 감탄했다.
“책에서 보는 거와 실제로 보는 차이는 어때?"
"다음엔 하루 종일 유적지 구경만 하면 안 될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날은 오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재단사의 공방으로 갈까?"
이졸데? 레온하르트는 뒤따라오는 소리가 없자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길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을 따라가자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으며 웃는 커플 한 쌍이 보였다.
"이졸데.”
레온하르트는 웃으며 그녀의 팔을 멋대로 들어다 팔짱을 꼈다.
엘리자베스는 붉어진 얼굴로 살며시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엘리자베스의 의상을 도맡아 만들던 재단사의 공방은 고급 상점가의 언덕 꼭대기에 있다고 한다.
레온하르트는 생각보다 강한 아침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리려다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이제 막 문을 연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친절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익숙하게 명령했다.
“저 레이디에게 어울릴 양산을 하나 추천받았으면 하는데.”
직원은 눈을 깜빡이며 몇 가지 양산을 꺼내 왔다.
"이졸데, 와서 하나 골라 볼래?"
“응?”
어느새 직원이 전신 거울을 가져와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엘리자베스는 햇살을 가리기보단 손에 들고 다니는 액세서리에 가까운 자그마한 레이스 덩어리부터 레온하르트와 함께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양산까지 한 번씩 펼쳐 보고 드레스에 대어 보았다.
"글쎄... 그런데 양산은 갑자기 왜?"
"아직 아침 햇살이 뜨거워."
직원은 두 사람이 입은 차림새와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익숙하게 명령하는 투를 보며 두 사람의 관계를 멋대로 짐작했다.
부부일까? 아니, 부부보단 아직 연인이란 말이 어울린다. 사내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아예 이 가게를 전부 사 버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귀족 집 안의 도련님일까?
상대방 또한 입은 옷과 몸가짐을 보건대 평범한 집 여식은 아닌 듯했다.
얼마 전 데뷔탕트에서 만난 한 쌍이려나? 점원은 막연히 짐작하며 여인이 내려놓았던 양산을 다시 곱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점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른 양산은 언뜻 보기엔 평범한 린넨 양산이었으나 실은 짜임이 굵고 튼튼한 린넨의 올을 뽑아서 그 자리를 다시 실로 휘감아 모양을 내는 하덴거 자수로 장식한 양산이었다.
레이스가 물결치는 양산보다 소박하지만 정교한 하덴거 자수 양산이 그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른 자수에 비해 특히 손이 많이 가는 하덴거 자수는 최근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물건이라며 점원이 은근한 목소리로 권유했다.
양산에, 겸사겸사 비단 손수건도 몇 장 산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즐거운 표정으로 상점을 나섰다.
‘...어?'
레온하르트가 잡아 준 문을 나서던 엘리자베스는 순간 곁을 스쳐 지나간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인데...?'
“왜 그래?"
엘리자베스는 눈썹을 모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으음, 아니야. 아무것도."
분명 기억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 만난 사람이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온하르트의 팔짱을 끼고 새로 산 양산을 펼쳐 들었다.
* * *
엘리시움 공작저에서 나온 하녀는 조금 전 스쳐 지나간 아가씨가 제발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녀는 지금 공작 부인을 대신해 물건을 '팔러' 나온 참이었다.
“이런 유행 다 지난 물건을 누가 사요? 다른 곳 알아봐요.”
“하, 하지만 이건 엘리시움 공작 부인께서 특히 아끼시던 드레스로....”
“낡고 한물갔지요. 저 아래 이런 드레스도 취급하는 가게가 있는데 그곳이라도 소개해 드릴까요?"
점원은 턱짓으로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이 상점가엔 이런 낡은 비단 드레스를 다시 사들일 가게는 없었다.
하지만 평민들이나 드나드는 가게라면 제법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제발 어떻게 안 되냐며 다시 한번 점원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점원은 이런 물건을 매입한다면 오히려 가게의 명예에 누가 될 뿐이라며 매몰차게 하녀를 내쫓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와 버린 거지...?'
하녀는 혹시라도 조금 전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엘리자베스 아가씨가 그녀를 알아보고 다시 돌아올까 봐 머리 위로 숄을 다시 둘러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저의 사정은 단순히 좋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어렵게 되었다.
가문의 영지와 십여 년 전 황실로부터 돌려받은 영지가 있어 겨우 월급은 받을 수 있었지만 공작과 공작 부인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제 공작 부인의 낡은 드레스는 버리는 대신 다시 팔아서 가문의 재정에 보태야 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사랑받고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하녀는 그 점을 위안으로 삼으며 갈등했다. 평민들이나 드나드는 가게에 자신의 드레스를 팔아 새 드레스를 마련하는 데 보탰다는 사실을 알면 그 자존심 높은 마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절대 그럴 리 없지. 마님 성정에 분명 명예가 어쩌고, 품위가 어쩌고 배부른 소리만 골라 하실 게 분명해.'
하지만 이대로 다시 드레스를 들고 돌아가는 일 또한 마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실 터였다.
결국 하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언덕 길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도 한때 공작 부인이 입으셨던 옷인 만큼 비싸게 받을 수 있길 바라며.
"이졸데, 무슨 걱정 있어?"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라서 그래. 혹시 양산이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바꾸러 갈까?"
“그런 건 아니고... 조금 전 문에서 마주쳤던 사람 기억나?"
“어, 어어. 대충 여자였던 것 같긴 한데....”
“나 그 사람 본 적 있어.”
"뭐?"
“그런데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아. 스쳐 지나간 황실 소속 메이드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귀족의 차림새는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가만, 옆구리에 뭔가 끼고 있던 것 같았는데... 물건을 팔기 위해 방문한 몰락 귀족의 하녀인가?"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몇몇 손버릇 나쁜 하녀들이 귀부인의 낡은 옷을 몰래 내다 판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 있었다. 어쩌면 그녀 또한 그런 걸지도....
“이졸데?"
“...우리 집 하녀였어.”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양산이 툭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한 손으론 바닥으로 떨어진 양산을 줍고 다른 손으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엘리자베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등을 천천히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이졸데. 설마 그 사람들이 네가 제도에 나오는 걸 알고 행동했겠어?"
“그런... 그런 게 아니야, 트리스탄.”
“그러면?"
"왜... 이런 이른 시간에 우리 가문 소속 하녀가 물건을 팔기 위해 나왔을까...?"
"그야 뭐... 공작 부인의 물건에 손을 댔거나.”
“그럴 리 없어!”
“이졸데, 너 설마....”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어머니께서 드레스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특별히 허락된 레이디스 메이드가 아니면 드레스 룸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
“그럼 그 레이디스 메이드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드레스를 처분하러 왔다는... 하여튼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잠... 잠시만 앉았다 가자."
엘리자베스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가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숄을 더욱 단단히 여몄다.
레온하르트는 볕이 잘 드는 벤치 위에 엘리자베스를 앉혔다.
“어머니께서... 설마... 설마 드레스를 팔아야 할 정도로 가문에 힘든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가장 그럴듯한, 동시에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는 추측이었다.
“여, 역시 쫓아가서 확인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고, 또....”
“이미 가 버린 사람을 어떻게 찾으려고 그래? 괜찮아. 괜찮을 거야. 네 말대로 잘못 본 걸지도 모르지."
"가게에 가 볼래.”
"이졸데!"
엘리자베스는 막무가내로 양산을 레온하르트에게 떠넘기며 조금 전 들렸던 가게로 다시 돌아갔다.
레온하르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렸다.
'아까 그 하녀요? 엘리시움 저택에서 종종 나오는 사람인데, 평민들이라면 모를까 그런 구닥다리 낡은 드레스는 이 상점가에 어울리지 않지요. 아마 광장 저편에 있는 전당포에 갔을 겁니다.'
점원의 말을 들은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뻔했다.
“레이디가 조금 놀라신 듯한데 차 한 잔만 내오겠나?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워 주게.”
레온하르트는 계산대 위로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금화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점원은 그의 얼굴과 금화 주머니만 빤히 쳐다보다, 핫 하며 서둘러 가게 창문의 차양을 내리고 문패를 바꿔 달았다.
“이졸데, 이졸데? 괜찮아?"
“저택에... 저택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럴 리 없다고 엘리자베스를 다독이는 한편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에 입 안의 살만 깨물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