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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81화 (81/130)

81화 숨을 죽이고, 손을 맞잡고(3)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시장 거리를 흘깃거리며 생각했다.

'우물에 간 게 아니라 수맥을 찾으러 갔나?'

“저... 저기....”

“오늘 영업 안 합니다. 딴 데 가서 알아보시든가.”

“네?”

레온하르트는 아주 보란 듯이 신문을 펼쳐 얼굴을 가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데 가만,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 있다.

“레온하르트 황....”

“거기까지, 가만. 자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가?"

레온하르트는 신문과 함께 빈 사과 궤짝에 턱 올려놓고 있던 다리를 내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명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던 알베르트 디트리히 베른 경이 황당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부인이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해서 사러 나왔습니다만, 전....”

"트리스탄.”

"트리스탄 공은 여기서 뭘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알베르트에게 손짓했다.

과일 가게 안으로 들어온 알베르트는 서늘한 응달 아래 달빛처럼 앉아 있는 하얀 덩어리를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어머나! 좋은 아침이에요, 베른 경.”

황태자에 이어 레이디 엘리자베스까지? 알베르트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두 분... 이런 이른 아침부터 제도 시찰이라도 나오신 겁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엘리자베스는 망고즙으로 끈적끈적한 손을 허공에 털어 말리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알베르트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기사의 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과일 가게에 위장 취업까지 하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사장이 우물가에 다녀오는 사이 잠시 봐주는 것뿐이다.”

"소드 마스터가 지키는 과일 가게라...."

알베르트는 피식 웃었다. 드래곤이 제도를 마구 밟고 지나다닌다 한들 이곳만은 안전할 것 같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베른 경 아니십니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또 사과 입니까? 그럴 줄 알고 미리 챙겨 놨습니다. 숙녀분, 미안하지만 손을 닦을 수건은 적당히 아무 천이나 찾아 닦도록 하시구려.”

“자네....”

“아침에 먹는 사과는 약이라고들 합니다.”

알베르트는 뻔뻔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당당한 태도로 익숙하게 과일 가게 사장의 손에서 사과 한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앗 차가...!'

손끝만 살짝 닿았을 뿐인데 여름을 제외하곤 차가운 물에 손을 댈 일이 없는 엘리자베스에게 우물가에서 바로 길어 온 물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못해 따끔하게까지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양동이 속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재빨리 빼내고 풍성한 치마폭으로 둘둘 말았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하얗던 손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 베른 경, 즐거운 휴일 보내기를."

엘리자베스의 손에 여벌로 챙겨 왔던 장갑을 끼워 주며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잠깐. 그대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면? 경은 오늘 쉬는 날이고,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유로 내 호위를 자처할 필요는 없어.”

알베르트는 아직 까치집처럼 뒤집어진 뒷머리를 긁적이며 제안했다.

"황궁에서 가장 뛰어난 사수가 곁에 계시는데 제가 무얼 걱정하겠습니까. 호위가 아닌 안내역이라면 어떻겠습니까?"

"황궁에서 제일 뛰어난... 설마 리, 아니. 이졸데?”

“제가 아는 총 다루는 여인 중 그 이름을 사용하시는 분은 단 한 분이지 말입니다.”

"그렇게 봐 주다니 고마워요, 베른 경."

"디트리히라 부르셔도 됩니다, 레이디 이졸데. 그럼 오늘 하루 제도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필요 없어. 자네는 자네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레온하르트는 사과 바구니를 지팡이 끝으로 가리켰다.

알베르트는 잠시 갈등하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혹시 모르니 제도 경비대원들에겐 미리 언질을 해 놓겠다는 말과 함께 사과 바구니를 들고 돌아갔다.

“저 사람이 여기 자주 오는 모양이지?"

앞치마로 사과 표면을 반질반질하게 문질러 닦고 있던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오다마다요. 아주 유명하지요. 틈만 나면 부인과 함께 장을 보러 오는 남편이 어디 흔합디까.”

"베른 경 정도면 굳이 시장에 나올 필요도 없을 텐데....”

“그거야 핑계고 실상 데이트지요, 데이트.”

"데이트?"

다 됐다. 사장은 꼼꼼한 눈길로 사과에 흠집은 없는지, 덜 익은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깨끗한 천으로 사과를 닦아 레온하르트에게 내밀었다.

"뭐, 겸사겸사 사람 사는 구경도 하고 질 나쁜 놈들 버릇도 고쳐 주고... 황태자 전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받아 주시지요.”

"어, 어떻게....”

"그만한 눈치도 없이 장사는 어떻게 한답니까?"

사장은 사람 좋아 보이는 푸근한 웃음과 함께 주섬주섬 모자를 벗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가문에 다시 없을 영광이옵니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누가 볼세라 서둘러 그를 일으켜 세우며 쉬잇, 입술 위로 손가락을 댔다.

“...레온, 나 우물가에 가 보고 싶어.”

가게 밖으로 나온 엘리자베스가 손에 양동이를 들고 길을 따라 걷는 소녀를 눈으로 쫓으며 말했다.

“우물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온하르트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하긴, 리지가 우물을 본 적은 없을 테니까.'

레온하르트는 과일 가게 사장에게 이 일은 절대 비밀이라는 약속을 받아 낸 뒤에야 엘리자베스와 함께 우물로 향했다.

아침부터 빨랫거리와 양동이를 들고 우물가에 모여든 처녀들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빨갛게 곱은 손을 호호 녹이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투박한 모직 스커트와 달리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의 등장에 여인들의 수다가 순간 멈췄다.

그러나 그 곁에 서 있는 레온하르트의 존재를 알아차린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은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이졸데?"

엘리자베스는 축축한 이끼와 물비린 내가 남은 우물 위로 손을 대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깊은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새까만 구멍 속에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이 보였다.

"비켜요, 아가씨. 그러다 빠지면 제도 사람 여럿 배탈 나.”

“미, 미안해요!”

콧잔등에 주근깨가 가득한 메이드가 그녀를 밀치며 우물 속으로 밧줄이 달린 두레박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끙차 소리를 내며 천천히 끌어 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도와 축축하게 젖은 굵은 밧줄을 함께 쥐었다.

양동이는 생각보다 더 무거웠고, 장갑 낀 손등 위로 튄 물방울은 살얼음이라 해도 좋을 만큼 차가웠다.

“...아가씨가 할 만한 일은 아닌데. 그래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제 다시 비켜 주시겠어요? 아가씨가 물 길기 체험을 하기엔 지금은 좀 바쁜 시간대라!"

“미, 미안해요! 어... 음... 그러니까...."

"이졸데, 가자.”

레온하르트는 우물가 주위에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흥미에서 놀람, 그리고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따가운 시선으로 바뀐 것을 알고 서둘러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우물가를 떠났다.

등 뒤에서 꺄아, 좋단다, 저래서 귀족들이란! 등등 한차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차갑게 얼어 버린 엘리자베스의 손을 아예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넣어 버렸다.

"물이... 생각보다 많이 차가웠어.”

"그야 지하수니까.”

“매일 저런 일을 하는 거야?"

“집에 수도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저런 차가운 물로 세탁도 한다고?"

조금씩 붐비기 시작한 시장길을 거닐며 엘리자베스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뜨거운 물은 수도꼭지를 돌리면 나오거나, 혹은 하녀들을 시켜 끓는 물을 찬물과 적절히 섞으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충격이 상당했는지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졸데, 저들을 동정하거나 도움을 주는 건 상관없지만 네가 누리고 있는 권리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레온하르트는 사람들을 피하는 척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착하고 선량한 미래의 황후마마께선 아무래도 백성들의 모습이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냥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없을까? 그 옆에서 커다란 솥으로 물을 끓인다거나....”

“이졸데. 이졸데? 정신 차리세요. 그런 일을 네가 직접, 매일 하겠다고?"

엘리자베스는 그럼 어떡하냐는 얼굴로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금 더 본질적으로 생각해 봐. 그리고 그런 표정 하기엔 너는 아직 너무 일러.”

"으으음....”

걷다 보니 어느새 광장이었다. 화려한 조각상 사이에 숨겨진 돌고래가 시원하게 하늘로 물을 뿜어 댔지만 엘리자베스의 미간엔 여전히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침 먹으러 갈래?"

“아침?"

"이 근처에 괜찮은 노천카페가 있거든. 샌드위치랑 커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인데 사람이 많네...?"

“출근하는 사람들. 저기 선반 같은 게 보이지? 앉아서 먹을 시간도 없는 이들을 위한 자리야.”

아직 아침이라 바람이 차가웠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로 제 코트를 덮어 주며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늦게 나와도 상관없으니 저 사람들 주문부터 먼저 처리하도록.”

"네? 네, 알겠습니다.”

가장 바쁜 시간대가 조금 지난 뒤에야 두 사람은 따끈따끈한 샌드위치와 커피 두 잔, 그리고 배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항상 제도에서 유행 중이라는 한입 크기의 작은 조각 케이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감상은 어때?"

"음... 황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어."

“그야 당연한 거고, 그것 말고는?"

이 집 샌드위치는 내가 기억하는 맛 그대로군. 레온하르트는 설탕과 크림 하나 넣지 않은 커피를 홀짝이며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시간을 되돌린 대가는 단순히 그와 엘리자베스의 관계만 바꿔 놓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마법을 실용화하고, 도로를 재정비하고.

그 모든 업적이 실은 그와 일리시스가 죽어라 노력해서 이룬 것이었는데.

어마마마께서 무사하시니 아바마마께서도 폐인이 되지 않으셨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선정을 베풀며 제국을 발전시키고....

'그럼 난 뭘 하면 좋지?'

발전한 제국을 더욱 발전시키느냐, 혹은 이러한 황금기를 유지하느냐.

레온하르트는 뒤늦게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아침 햇살이 그들의 테이블 위로 팔을 드리웠다. 빛 아래 엘리자베스의 손과 팔이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이졸데.”

"으응?"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간질이며 말했다.

“조금 전 그들이 사시사철 따스한 물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그럼 만들자.”

“응?”

"너랑 나랑, 황제와 황후가 되어서. 이 제국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막 입으로 가져가던 케이크가 접시 위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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