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숨을 죽이고, 손을 맞잡고(2)
가을바람은 아직 제도에 머물러 있었다.
에스페도르 제국은 선황과 현황의 선정 덕분에 다시없을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수확제의 상징인 커다란 불꽃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거름과 퇴비로 변했지만 더운 기운을 쐰 바람은 제도로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문득 바람은 그 속에서 언젠가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이들을 발견하고 앞으로 내달리던 몸을 뒤로 돌렸다.
"이졸데, 뛰면 위험해!"
“빨리, 빨리 가자니까?"
요즘 제도에서 유행하는 드레스에 꽃을 장식한 보닛을 쓴 아가씨가 금빛 머리칼을 가진 청년의 손을 꼭 쥐고 아직 아무도 없는 대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바람은 이내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나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건 날아가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바람은 제도를 크게 한 바퀴 돌고서야 가야 할 길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한 번 지나간 거리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회 한 점, 미련 한 점 없이 홀가분하게 날아가는 그를 축복하듯 태양은 감히 그를 가리려 드는 솔개의 날개깃 위로 하얀 햇살을 흩뿌렸다.
비단으로 만든 꽃을 듬뿍 장식한 챙 넓은 보닛과 가슴선 아래로 풍성하게 퍼지는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는 우아한 젠트리 계급의 숙녀로 보였다.
레온하르트 또한 오늘은 황태자의 예복 대신 평범한 린넨 셔츠와 조끼, 타이에 가벼운 코트만 걸쳤다.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로 숄을 걸쳐 준 레온하르트는 실크해트와 지팡이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장갑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이졸데.”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식료품은 천국에나 있다는 소문이 도는 시장이었다.
“여기, 여기가 제도의 중앙 광장이야?"
“이졸데. 보닛이 비뚤어졌잖아.”
"음유 시인은 어디 있어? 광대들은?"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알아? 그들이 나오려면 아직 한참은 있어야 해. 그러니까 뒤집어진 치맛자락이나 바로 하고...."
레온하르트는 이제 갓 제도에 상경한 사람처럼 마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장에 들어오는 과일이며 생선 따위가 신선한지 확인해야 한다, 라는 이유로 새벽부터 부리나케 나온 것까진 좋았다.
엘리자베스는 아직 흙이 묻어 있는 당근이나 야채는 물론, 특히 살아서 펄떡거리는 생선을 보며 흥미로워했다.
이런 이른 시각에 시장을 찾아오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밖에 없다. 소매상인, 귀족가의 주방 담당 하인, 입덧하는 부인을 위해 한겨울에 열대 과일을 구하는 남편.
그러나 꼼꼼한 눈빛으로 야채를 살피며 거리낌 없이 넙치, 대구, 가재 따위를 뒤적이고 있는 청년은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혹시 임신한 부인과 함께 이른 새벽부터 장을 보러 나온 걸까, 라고 하기엔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문어를 구경하는 숙녀는 너무 어려 보였다.
물론 높으신 분들이야 아직 걷기도 전에 서로 약혼을 하니 결혼을 하니 한다지만....
상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풍년이라더니, 바다에도 풍년이 들었나?"
“아이고 나리! 그런 말 마십쇼. 바다에 풍년이 들면 그만큼 사람들 울음소리도 깊어진다는 말 못 들으셨소?"
“크흠... 내가 말실수를 했군. 신경 쓰지 말게. 유난히 싱싱해 보이는데, 이런 내륙까지 잘도 이런 상태로 가져왔군.”
레온하르트는 얼음 위에 눕혀진 갈치 꼬리를 툭 건드리며 은근한 어투로 상인을 떠보았다.
예상대로 상인은 그를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 취급하며 가슴을 쑥 내밀고 자랑스럽게 가게의 생선의 신선도에 숨겨진 비법을 알려 주었다.
“그야 이 녹지 않는 얼음 덕분이지요. 이게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저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라고 한들 소금에 절인 정어리 말곤 생선은 썩어 빠진 눈깔도 구경하기 힘드실 게요!"
"호오, 녹지 않는 얼음이라...?"
“예에, 몇 년 전까지야 저기 저 높으신 분들께만 허락되던 것이 드디어 우리네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되었답니다. 뭐, 여전히 어지간한 가게는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싸긴 하지만 이것들이 아주 그 값을 톡톡히 해냅디다, 그려”
"그런가. 다행이군. 이졸데, 이졸데?"
상인은 말이 나온 김에 어제 뭍으로 올라온 생선이나 다시 바다로 걸어서 돌아가기 전에 한 마리 사 가라며 그를 꼬드겼다.
그러나 이미 볼 일을 마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챙기는 척 자연스럽게 가게에서 물러섰다.
“...뭐 하고 있어?"
"가만있어 봐, 저 문어 녀석... 조금만 있으면 내가 이길 것 같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를 갈대 줄기를 쥐고 마찬가지로 다리마다 지푸라기 따위를 휘감은 문어와 진지하게 대치 중이었다.
어물전 주인은 그 모습을 보며 숙녀 분이 이긴다면 문어를 싸게 해 주겠다며 마지막까지 상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게 행동했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이겼는데!"
“팔, 아니 다린가? 하여튼 개수부터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이기려고 그래.”
“여차하면 총을 쏘면 되지!"
“그래, 그것도 방법... 이졸데, 너 설마?”
엘리자베스는 혀를 쏙 내밀더니 몰래 치맛단 속에 숨겨 놓았던 총을 슬쩍 내보였다.
"맙소사. 대체 언제 가지고 나온 거야?"
“트리스탄이 검날이 달린 지팡이를 챙겼을 때?"
못 말리겠다. 레온하르트는 정말 이 사람이 십여 년 전만 해도 감정에 서툴던 그 아가씨가 맞는지 의심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바다에 풍년이 들면 사람들 울음소리가 깊어진다는 건 무슨 말이야?"
과일 가게 앞에 멈춰 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사과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음...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닌데, 괜찮겠어?"
엘리자베스는 순진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바닷속 생선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먹잇감이 뭐가 있을까?"
역시나. 그 말뜻을 이해한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럼... 그러면....”
“바다가 짠 이유는 그렇게 흘린 눈물이 고이고 또 고여서 그렇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괜찮겠냐고.”
엘리자베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레온하르트는 반쯤 넋을 잃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이끌고 과일가게로 향했다.
생선은 몰라도 향기로운 과일이라면 손에 들고 다녀도 괜찮겠지. 아침 식사도 겸해서 엘리자베스가 진정할 수 있게 사과라도 하나 사 줄까?
“꼭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군.”
레온하르트는 잘 익은 사과를 집어들고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보기보다 묵직한 무게와 싱그러운 향기가 과육의 달콤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습죠? 얼마 전 새로 길이 뚫리면서 제도 근처 과수원에서 시장까지 오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답니다."
“새로 길이 뚫렸나?"
“소식이 늦은 분이시네. 지금이야 아침이니 조용하지, 조금만 지나 보시오. 그 길을 타고 저 멀리 외국에서도 제도 구경을 하러 온다오.”
“그런가. 잘된 일이군."
레온하르트는 슬쩍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자베스는 처음 보는 길고 둥그스름한 노란 과일을 들고 그 향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망고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망고를 아십니까?"
“아, 책에서 본 게 전부일세. 그런가. 저런 과일이 들어올 정도로 발달한 건가....”
레온하르트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법을 평민들도 실생활에서 누릴 수 있게 하고, 도로를 재정비하고, 이대로라면 아마 그가 황위를 물려받을 즈음이면 외국에서 먼저 조공을 바칠지도 모르겠군.
"아이고 아씨! 그거 그렇게 누르면...!”
조공품으로 북쪽 유목민들에게 불로 만든 반지라도 하나 달라고 해 볼까? 장수를 비는 문양을 새겨서 말이야.
까지 생각했을 때 가게 주인이 기겁을 하며 엘리자베스를 만류했다.
덩달아 레온하르트 또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그는 속으로 신음하며 이마를 짚었다.
엘리자베스의 손바닥 위에 터져 버린 망고가 놓여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황실에나 진상하는 귀한 과일이란 말입니다! 이를 어째!"
“가... 값을 지불하면...”
"아씨가 입고 있는 옷을 몽땅 내다 팔아도 이것 한 조각도 사기 힘들게요! 이를 어쩌나... 어째....”
"얼만가.”
순식간에 서글서글한 인상에서 표독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표정으로 바뀐 상인은 레온하르트의 행색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더니 쯧쯔, 하며 혀를 찼다.
"얼마냐고 물었다.”
“나리께서 상상도 못 할 액수요!"
“세 번째로 묻지는 않겠다."
레온하르트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가능한 위엄 있는 투로 말했다.
상인은 고민했다. 잘 쳐줘야 갓 제도에 상경한 젠트리 계급으로 보이는 저 사내가 과연 이 비싼 값을 치를 수 있을까?
상인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펼쳤다.
“참고로, 금빛이오.”
가격을 들은 레온하르트는 코웃음을 치며 그 자리에서 주머니를 뒤졌다. 상인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화... 황실에 진상할... 과일이었는데... 아이고... 아이고오....”
“여기서 먹고 가겠네. 망고는 즙이 많은 과일이니까.”
상인은 눈앞에 있는 손님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평범한 코트 주머니에서 마치 마술처럼 금빛 동전이 끝도 없이 나왔다.
오늘부터 황실에 진상될 예정인 망고를 아는 것도 그렇고, 이런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온 것도 생각해 보니 영 수상했다.
'설마 잠행을 나온 황실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황태자가 딱 지금 저 청년 같은 나이대였던 것 같은데....
에이 설마, 상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손자국이 남은 망고와 몇 가지 다른 과일들을 잘라다 가장 깨끗한 접시 위에 올려 바쳤다.
“저어... 미안해요.”
"미안할 짓을 하긴 했지. 하지만 덕분에 오늘, 아니 이달 치 매상을 다 올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니 봐주겠소. 그리고 이건 아가씨 볼 같은 색이라 주는 덤...."
“이졸데, 한번 먹어 봐. 마음에 들 거야.”
저 상인이 미쳤나? 레온하르트는 뻔히 동행한 사내가 있는데 그 사내의 눈 앞에서 수작질을 부려?
물론 상인의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한 일이었다.
이렇게 비싼 과일을 냉큼 사는데 덤으로 뭐라도 하나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그냥 주기에 놀라서 상기된 그녀의 볼이 딱 사과와 같은 빛이었기에 누구나 할 법한 농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년의 눈빛이 변하더니 냉큼 말꼬리를 잘라먹으며 끼어들었다.
상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손 씻을 물을 가지러 우물가에 다녀올 테니 잠시만 과일 가게를 봐 달라며 가게를 비웠다.
졸지에 임시 과일 가게 사장이 되어 버린 황태자 레온하르트는 황당함에 입만 벙긋거리며 후다닥 사라진 상인의 등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