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숨을 죽이고, 손을 맞잡고(1)
엘리자베스의 손길은 민들레 홀씨조차 흩날리게 하지 못할 만큼 가벼웠으나 사랑에 빠진 황태자를 손쉽게 뒤로 넘어뜨릴 만큼 강력했다.
레온하르트는 척추 가운데에 배기는 단단한 돌덩이가 불편해 조금 몸을 움찔거렸을 뿐,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가을 잔디와 이끼 위에 드러누웠다.
오로라에 홀린 사람들은 여신이 내려오는 환각을 보며 몰아치는 눈바람 속에서 얼어 죽는다고 하던가.
레온하르트는 그의 위로 천천히 내려앉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그 말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의 등 뒤를 장식한 시폰으로 만든 망토가 순풍을 맞이한 돛처럼 휘날렸다.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또한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짚은 채 아무런 말 없이 말간 눈빛으로 레온하르트만 응시했다.
이대로 너를 안고 싶어.
레온하르트의 자색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한 사내로서 사랑하는 여인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칼을 훅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유성의 꼬리처럼 가느다랗고 하얀 머리칼 몇 올이 느릿하게 어깨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설령 지금 이 순간, 뾰족한 구두 굽으로 그의 눈동자를 찌른다고 한들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그리고 덤덤히,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을 수행한 양 받아들일 것이다.
그 점이 엘리자베스는 싫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는 마냥 받아주는 레온하르트가 못마땅했다. 때로는 조금 거칠어도 좋으니 먼저 손을 내밀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양배추밭에서 아이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렇 다고 황새가 대신 아이를 물어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는데 왜 너는, 당신은, 그대는.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할 용기는 아직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그의 콧대를 붙잡고 마구 비틀지만 않았어도 레온하르트는 끝까지 눈을 감고 있었을 터였다.
"나를 봐.”
“보고 있어.”
"나를 봐 줘.”
“나의 우주는 오직 너로 구성되어 있어. 태양도, 달도, 별도, 그리고 그 사이 사이를 연결하는 여신의 숨결 하나까지 모두 너로부터 비롯한 것들이야.”
“그런데 어째서 레온은 나를 탐하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벌써 스무 해 가까이 지났으나 죄책감은 가장 강력한 재갈이자 그의 발목을 옥죄는 쇠사슬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허락했어. 그래도 레온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먼저 키스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용기를 얻었다.
이어서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향한 곳은 그의 우뚝한 콧대였다. 아직 하늘과 땅이 하나로 붙어 있던 시절, 처음으로 그 사이를 가르고 우뚝 솟아난 산처럼 깎아지를 듯한 콧날은 옆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그 시원시원하고 날렵한 선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갔다.
어린아이들의 서툰 인사처럼 코와 코를 맞대고 잠시 비비적거리던 엘리자베스는 몸을 일으켜 레온하르트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저항도, 재촉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지만 그의 손엔 찢기듯 뜯겨 나간 마른 잔디 냄새가 잔뜩 스며 있었다.
“...계속... 해도... 돼...?
계속? 무엇을? 내 피를 천천히 말려 죽이려는 이 행위를? 얼마든지, 내 사랑. 네가 원한다면야 이대로 나를 피 말려 죽여도 좋아.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손을 쥐어다 제 얼굴 위로 올려놓았다.
젠장, 엘리자베스 얘는 다 큰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가벼운 거야?
까딱해서 크게 숨을 내쉬기라도 했다간 그 길로 엘리자베스의 가벼운 몸이 훅 날아갈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흐린 불빛 아래에서 보니 꼭 처음 보는 것처럼 낮설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의 단정한 턱선과 분명 아침에 깔끔하게 면도했지만 어느새 조금씩 돋아 있는 수염, 그리고 얇지만 그녀를 향해 웃을 때면 진주처럼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입술을 매만졌다.
"내 이름, 불러 줄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그의 입술 위에 손을 댄 채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똑똑히 느꼈다.
"한 번만 더.”
"엘리자베스.”
이번엔 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엘리자베스는 요즘 들어 위엄 있다는 말이 어울리게 깊어진 그의 눈빛이 여전히 그녀에게만은 바다처럼 끝도 없이 다정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한 번만 더, 불러 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 위를 간질이는 엘리자베스의 은빛 머리칼을 한 줌 쥐어다 그것에 대고 속삭였다.
"엘리자베스, 내 사랑.”
엘리자베스는 몸을 숙였다. 그녀의 망토가 다시 한번 허공 위로 연기처럼 풀썩 날아올랐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레온하르트의 입술 위로 아직 연지를 바르는 것도 어색한 맑고 순수한 입술이 겹쳐졌다.
달이 그들의 모습을 못 본 척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는 눈을 들어 엘리자베스의 파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녀의 손바닥을 가볍게 간질인 레온하르트는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좋아해.”
설마 키스까지 해 놓고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너를 찬양할 수 있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엘리자베스는 못 들은 척 괜히 마른 잔디만 쓰다듬었다.
“...무거워?"
아니, 전혀. 이대로 훅 불면 날아갈까봐 걱정마저 드는걸?
레온하르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웃었다.
“레온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다가갈게.”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몸을 숙여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 * *
"우리... 데이트할래?"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데이트? 바닷가에서 한 것처럼?"
어둑한 밤이었지만 그의 턱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만은 똑똑히 보였다.
"조만간 시찰을 나갈 거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서와 다른 점은 없는지, 민심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등등. 직접 확인해야 해."
레온하르트의 마디 굵은 손이 엘리자베스의 손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진득하게 문지르고 또 꾹꾹 눌렀다.
야릇한 뉘앙스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굳이 비유하자면 고양이나 강아지의 말캉말캉한 발바닥을 만지는 행위나 다름없었지만 엘리자베스의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제발 어두운 밤이 자신의 얼굴을 가려 주길 바라며 말을 돌렸다.
“....제도에는 뭐가 있어?"
참 우습지. 제도, 아니 제국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곳에 살면서 정작 그곳에 대해 모른다니.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그가 알고 있는 제도의 명물들을 하나둘 늘어놓았다.
제도에 내려앉은 푸른 안개를 헤치고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실은 수레를 끄는 상인의 수레바퀴 소리가 새벽 성당의 종소리보다 더 일찍 아침을 깨우면 분수대 근처론 삼삼오오 음유 시인과 광대 패들이 모여든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도에 갓 방문한 촌뜨기들의 동전 하나.
멋모르고 그들을 위해 지갑을 연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 손에 들려 있던 동전 주머니가 텅 빈 주머니로 바뀐 것을 알고 분통을 터트리지만 그들 중 다시 주머니를 찾을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조금씩 분주해지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유난히 조용한 골목이 있었다.
대대로 그곳에 자리 잡아 평생을 부모님이, 조부모께서, 증조부모와 그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일에만 몰두하는 장인들의 거리엔 귀족들 특유의 오만함과 선민의식이 길에 깔린 벽돌 사이마다 이끼처럼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에 네 드레스를 만들어 준 그녀의 작업실도 있지. 직접 보고 싶지 않아?"
“...궁금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생 그녀의 옷을 책임진 사람의 공방이었다.
한 번쯤 들려서 감사 인사를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점심 무렵이 되면 하나 둘 노점상이 장사를 시작할 준비를 하지."
"저번에 본 그런 거?"
“그런 거.”
물론 이번엔 그 문어구이며 그런 괴악한 음식은 없겠지만.
엘리자베스는 길거리 음식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재단사의 공방을 가자는 말만큼이나 기대로 들뜬 표정을 지었다.
“또... 아, 성당도 있구나.”
지금까진 황궁에 속한 성당을 찾았던지라 잠시 잊고 있었다.
제도에 있는 성당은 교황이 거주하고 있는 성소만큼 거룩하진 않았으나 제도라는 이름에 어울릴 정도의 격식과 위엄은 갖추고 있었다.
평소 신실한 신자인 엘리자베스라면 분명 좋아하리라 레온하르트는 확신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어?"
"오페라 극장? 흠, 운이 좋다면 미우치아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리고, 라니?"
엘리자베스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눈만 껌뻑였다. 설마 그녀가 다시 한번 그런 위험에 처하는 걸 원치는 않을 테고.
“그걸로 끝이야?"
레온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보통 데이트라고 하면 함께 근사한 옷을 차려 입고, 쇼핑을 하거나 극장을 가고, 식사 한 끼를 같이 하고, 그러고 돌아오는 걸로 끝 아니던가?
“음... 혹시 원하는 거라도 있어?"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코를 살짝 비틀었다.
"바보.”
말을 해 줘야 알지! 어느새 몸을 일으켜 그의 위에서 새처럼 포르르 날아간 엘리자베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레온하르트는 입만 벌렸다.
여름 내내 황금 같은 시간을 보냈던 이들은 가을이 오고서도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런 그들을 위로하듯 하늘 위로 끝없이 화려한 불꽃이 수놓아졌다.
유난히 별빛이 반짝이는 밤, 엘리자베스는 정말 여신처럼 밤하늘 한 조각을 등에 걸친 채 뒷짐을 지고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엘리자베스를 뒤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시찰이라....'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황궁 밖으로 나섰던 때가 언제였지? 혼자였던가? 혹은 누군가 함께했나?
설마 이 나이가 되어 베른 경을 호위기사로 붙이진 않으시겠지? 아니, 붙이실 것 같은데. 그럼 적당히 떼어 놓고 오붓하게 다녀야겠군.
레온하르트의 걸음마다 잡생각이 마른 풀과 함께 후두둑 떨어졌다.
'데이트, 데이트인가....'
괜히 실쭉 웃음이 나왔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엘리자베스는 제도의 풍경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여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