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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78화 (78/130)

78화 왕과 친구가 되는 방법(4)

사람을 쓰는 사람이 되거라.

밀란 공작의 딸 로젤린 루피아 폰 밀란은 그렇게 배웠다.

황실의 사람조차 제 것으로 만들어 쓸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거라.

밀란 공작은 어린 딸을 무릎에 앉혀 놓고 매일 속삭였다.

특히나 저 비스콘티에 가문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네 아랫것으로 만들렴!

어린 로젤린은 그 뜻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며 자랐다.

그러나 처음 마주친 비스콘티에의 사람은 그녀가 아랫것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베아트리체 로지나 폰 비스콘티에.

그녀보다 한 살 연상, 같은 공작가의 여식이자 서로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상대방을 물어뜯어 이겨야만 하는 상대.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그녀 앞에 먼저 무릎을 꿇거나 로젤린을 제 아랫것으로 삼는 대신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사람은 가문의 눈을 피해 야트막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꼭 맞잡으며 평생 친구가 되기로 맹세했다.

그렇게 내심 흠모하고, 존경하던 '리체'언니가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편에 서기를 택했다.

로젤린은 군말 없이 베아트리체를 따라 엘리자베스의 곁에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밀란 공작 부인은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초대받은 연회, 야유회, 티 파티마다 공작 부인은 어린 딸을 대동하며 어린 시절부터 사교계의 관습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도록 가르쳤다.

덕분에 이 자리에서 그녀가 모르는 얼굴은 거의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한들 그건 굳이 그들과 친해지거나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가문 출신이란 뜻이었다.

마치 아직도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저 영애들처럼.

“레이디 엘리자베스, 혹시 아직도 시계탑의 미미르 양과 자주 어울리시나요?"

엘리자베스는 가능한 황후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으나 이름이나 가문은 기억나지 않았다.

"환영식 날 있었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감히 황제 폐하께 대가를 요구하는 그 건방진 마법사의 모습이란!”

"마법에는 당연히 대가가 필요한 법이랍니다.”

엘리자베스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투로 말했다.

“설마 레이디께서 마법같이 품위 없는 짓을 배우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품위 없는... 짓?”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 누구야?'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별 볼 일 없는 집안인 모양인데... 쫓아낼까요?'

'...지켜보다가.'

콧잔등의 주근깨가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엘리자베스는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녀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미미르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심히 품위 없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훌륭한 마법사였으니까.

“듣자 하니 시계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들 하던데...."

"미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뭐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일리시스와 함께 춤추는 미미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미르는 사람들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저 좋을 대로 마구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맞춰서 가까스로 엎어지지 않고 버티는 일리시스가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그건....”

로젤린은 속으로 쿡쿡 웃었다. 저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보라지! 어쩐지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환영식에 오셨다면 알고 계시겠지만, 그날 미미르 양이 없었다면 황태자 전하께서 큰 변을 당하실 뻔하셨답니다. 정말로 미미르 양이 미쳤다면 그 순간,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레이디 엘리자베스!"

베아트리체는 한 박자 뒤늦게 엘리자베스가 거리낌 없이 '미쳤다'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함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뭐 어떠냐는 듯 그녀를 잠시 올려다보더니 대답을 독촉하는 표정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대방을 응시했다.

“시...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지 보는 시선이 다를 뿐이지요. 하지만 사과는 미미르 양에게 직접 하시길 바랍니다.”

생각보다 제법이잖아...?

로젤린은 조금 전 베아트리체가 그러했듯 부채 너머로 눈을 크게 떴다.

이대로라면 굳이 그들이 나서서 엘리자베스를 지키거나 입지를 다져 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그녀의 드레스에서 한 번, 외모에서 두 번, 그리고 언행에서까지 패배를 인정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주제 파악을 못하는 이들을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훈계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꼭 필요한 순간만 돌려 말하는 수법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황후가 취해야 할 모습이 저런 걸까?

로젤린은 생각했다. 어쩐지 그녀가 황후가 된다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의 부채 너머에서, 혹은 치맛자락 사이에서 부는 추잡한 소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데뷔탕트 무도회의 마지막을 알리는 곡이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카발리에들이 그들의 파트너를 찾아오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부디 저택으로 돌아가실 때 저와 함께한 시간도 한 조각 챙겨 가신다면 기쁠 것 같군요.”

“그럼 레이디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로 곁에 있던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기척을 죽이고 엘리자베스의 등 바로 뒤로 다가온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위로 붙잡았다.

모두들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소리 없이 경악하는 와중에 오직 엘리자베스 혼자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턱을 위로 들더니 레온하르트를 눈웃음으로 반겼다.

"영애들이 놀라시잖아. 그럼 못 써요,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뭐 어떠냐며 어깨만 으쓱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의 손등을 부채로 탁 때리며 타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엘리자베스는 영애들을 향해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곤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마지막 춤이 남았는데 어디 가는 거야?"

“나는 누구누구와 다르게 속 넓고 자비롭고 아량도 있고, 하여간 그런 착한 놈은 못 돼서. 데뷔탕트의 마지막 춤의 규칙은 알고 있지?"

마지막 춤만은 설령 반역죄에 가담했던 가문 출신이 황실 일가에게 춤을 신청하더라도 거부해선 안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을 선택할까 봐 미리 채 가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네 의사를 존중하며 어마마마와 함께 춤을 추거나 베일리와 춤췄겠지. 내가 걱정하는 건 그 반대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춤을 신청하는 것?”

“설령 아바마마라 해도 허락할 수 없어.”

"으음...."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보아하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질투해?”

그것보다 더한 것. 더 추악하고, 시커렇고, 새빨개서 차마 드러내긴 민망한 것.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얼굴만 붉히며 보폭을 넓게 벌려 정원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아무도 못 보겠....'

“레온, 레온. 저기 수풀이 막 움직이는데?"

"망할! 때와 장소도 구분 못 하는 놈들 같으니라고!"

레온하르트는 이를 갈며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엘리자베스를 이끌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분수대에선 땅으로 떨어졌던 빗방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을 담아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다시 떨어지며 은은한 조명 아래 자그마한 무지개 아래로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리지.”

"응?"

“부디 그대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데?"

“이렇게 되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고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그래도 거절하면?"

“그동안 수련한 결과를 오늘 드디어 확인하겠군!"

레온하르트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레온하르트!"

“좋은 노래 구절을 알고 있거든. 네가 새라면 나는 네가 끝없이 날아갈 수 있는 하늘이 되고, 바람이 되고, 쉬어 갈 수 있는 구름이 되어 줄게!"

"내려 줘!"

"하늘을 봐, 리지.”

레온하르트의 목에 매달려 있다시피 하던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엔 엘리자베스를 향해 레온하르트가 사랑을 고백한 횟수만큼의 별이 있었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멍한 표정으로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가볍다 한들 더 이상 어린애라 볼 수 없는 몸을 오랫동안 높이 들어 올리는 일은 힘에 부쳤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조금씩 후들거리기 시작하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레온?"

"괘... 괜찮아. 더 버틸 수....”

"내려 줘!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영광의 상처가 하나 생기는 거지, 뭐!”

"내려 달라니까?"

엘리자베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레온하르트는 꼭 무엇인가에 홀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는 그녀가 마치 북극 하늘을 수놓은 극광이라도 되는 듯 엘리자베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

“...내려 줘.”

엘리자베스의 작은 발이 분수대에서 튄 물로 인해 촉촉하게 젖은 잔디밭 위로 내려앉았다.

"음, 으음... 춤 안 출 거야?"

“놓기 싫어.”

“나 어디 안 가.”

"알아, 아는데... 이대로 놓아 주면 그대로 날아갈 것만 같아서... 그래서....”

"안 날아가.”

“정말로?”

“정말로, 그러니까 레온하르트, 우리 춤추자.”

어느새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목에 팔을 감고 오른쪽, 왼쪽으로 천천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짓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 맞지?"

“응?”

모르는 거 맞네. 레온하르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잠깐만, 나 구두 벗을래.”

“응?”

“그때처럼 해 줘. 으응?"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러고 있었다. 그 사이 엘리자베스는 구두를 벗어 분수대 위에 올려놓고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레온하르트의 발등을 밟고 올라섰다. 레온하르트는 한 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다른 손으론 작고 하얀 손을 꼭 붙잡았다.

음악도, 예법에 맞는 절도 있고 우아한 동작도 필요 없었다.

분수대에 설치된 하얀 대리석 종달새 조각상이 물소리를 내며 노래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레온하르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의 발아래에서 바스락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다시 이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발등에서 내려오며 동시에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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