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77화 (77/130)

77화 왕과 친구가 되는 방법(3)

왕이 되라니?

아직까지 그가 남기고 간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남아 있었다.

자리에 있는 그 어떤 사내도 다시는 그녀에게 춤 신청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주제에 홀로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데뷔탕트, 이제 갓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며 피어나는 꽃들의 자리.

그곳에서 왕이 되라고 그는 말했다.

그녀를 백안시하는 존재들과 호기심, 흥밋거리로 여기는 이들, 심지어 황후마마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왕이 되라고?

도저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다급히 레온하르트를 쫓아갔다.

그러나 베아트리체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오늘만 날이 아닙니다.”

그녀의 등 뒤로 동경과 선망에 찬 눈빛을 보내는 어린 영애들이 있었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내들 또한 저 멀리서 헛기침과 함께 그녀를 흘끔거리기에 바빴다.

엘리자베스는 갈등했다. 그러나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다시 등을 돌렸다.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조금 전까지 어떻게든 그녀를 헐뜯기 위해 안달이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양 그녀의 외모와 드레스, 그리고 레온하르트와 함께 움직이던 아름다운 춤에 대해 칭송하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는 그녀를 가장 높은 자리로 안내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곳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몰리는 자리, 그 자리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자리에 앉은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왕이 되느냐, 혹은 조롱거리가 되느냐.

모든 것은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부러움으로 가득 찬 시선 속, 아직 속내를 숨기는 법에 미숙한 이들이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조금 전의 춤은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역시 황태자 전하와 깊으신 사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황궁의 담장이 아무리 높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군요. 글쎄요, 저는 그저 전하께서 이끌어 주시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갔을 따름입니다.”

자신의 정숙함을 트집 잡으려던 이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함부로 황실의 일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경고까지 한 문장 안에 전부 들어가 있었다.

처음 사교계에 나온 사람치곤 제법이라는 시선으로 베아트리체는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말을 꺼낸 이가 샐쭉한 표정으로 부채만 부치는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웃었다.

사람의 감정은 아직도 그녀에게 있어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물며 그런 감정을 꽁꽁 숨기고 다시 부채 너머로 가리며 말해야 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이 자리에서 왕이 되길 바랐다.

그녀가 보기에 레온하르트는 이미 제왕의 자리에 올라도 어색함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곁에 있을 그녀 또한 가장 높은 자리에, 가장 중심에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레온,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이 아가씨들의 위에 군림하는 대신 모두와 함께하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남몰래 속으로 웃으며 레온하르트에게 사과했다.

“레이디 엘리시움, 황태자 전하와는...."

"엘리자베스.”

"네?"

"레이디 엘리자베스. 그거면 충분해요. 오늘은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날이니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선 정말 핏줄 속에 천사의 피가 흐르나 봅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노골적인 빈정거림과 결코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웃음소리 속에서도 그저 맑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민망함에 먼저 고개를 돌릴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다시 싱긋 웃었다.

“으흠, 큼...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어떤 침엽수라도 영애 앞에선 그만 붉게 볼을 물들일 것만 같습니다.”

"네...?"

“말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 영광... 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조용히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는 다시 혼자가 되겠지요. 정식으로 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하나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라는 이가 품위도 잊고 밖으로 나다니는 일도 예법에 어긋나는 일,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제 벗으로 맞이하여 가능한 자주, 오래오래 티 파티를 열까 합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들 토끼 눈이 되어 그녀를 쳐다봤다.

심지어 베아트리체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모두 친구 삼겠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반사적으로 부채를 들어 입을 가렸다.

“...미래 황후 되실 분의 명령이라면 그 자리가 어디든 가야... 겠지요?"

베아트리체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영애였다. 이렇게 대놓고 제 편이 된다면 얼마든지 챙겨 주겠노라 말하고 있는데 왜 굳이 그녀를 적으로 돌리려고 하는 거지?

“레이디 엘리자베스, 밀란 공작저의 가을 낙엽이 무척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나, 꼭 한번 보고 싶군요."

로젤린은 베아트리체에게 눈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황궁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으나 종종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단풍잎도 발견되곤 한답니다.”

“이 제국에서 레이디께서 가시지 못 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 공작가의 영애가 이미 그녀의 편이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서둘러 엘리자베스를 추켜세우며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건 그런 인사치레에 가까운 칭찬 몇 마디로 사귈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먼 미래, 레온하르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여차하면 그녀들을 통해 그가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자들.

그러나 동시에 한편으론 그녀가 속으로 품고 있는 마지막 비밀까지 전부 말할 수 있는 절친한 벗.

엘리자베스는 문득 레온하르트가 왜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두었는지 그 뜻을 깨달았다.

더 이상 그가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이 사람과 친하게 지내라면 친하게 지내고, 꺼려야 할 사람이라면 꺼리지 말고, 스스로 사람을 보는 눈을 기르고 또 선택하여 행동하기를.

'만일 그렇게 한다면 레온은 뭐라 할까?'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줄까? 아니면 감격해서 그만 울음이라도 터트리면 어쩌지?

아니야,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말자.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곤 눈을 깜빡이며 특히 눈에 밟히는 영애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레이디 베아트리체.”

“말씀하시지요.”

“제가 좀처럼 밖으로 나서질 못해 선뜻 말을 건네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영애께서 먼저 본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베아트리체는 그제야 엘리자베스의 진짜 속뜻을 알아듣고 가장 먼저 로젤린을 소개했다.

“밀란 공작가의 여식 로젤린입니다. 아버지들께서 사이가 좋든 나쁘든, 저희야 알 바 아니지요.”

"베아트리체 언니의 말씀대로입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만나게 되어 진정 영광입니다. 조금 전 무례는 깊이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레이디 밀란께서 무슨 무례를 저질렀다구요. 그러고 보니 비스콘티에와 밀란은 엘리시움과 함께 제국의 셋뿐인 공작가지요. 괜찮다면 저 역시 영애를 로젤린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영광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베아트리체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나둘 영향력 있는 가문의 영애들을 소개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미르는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일리시스를 찾았다.

“미, 미미르 님?"

“너, 당장 나랑 춤 좀 추자. 지금은 그래야 할 때야.”

"예?"

미미르는 냅다 일리시스를 끌고 연회장 중앙으로 나섰다.

말이 좋아 카발리에지, 에스코트만 하기로 했던 일리시스는 당황하며 반쯤 질질 끌려가다시피 미미르와 마주 섰다.

"미미르 님! 저는 춤 같은 건 춰 본 적도 없다구요!"

"응, 알아.”

"아시는 분이 어째서...!”

"우리에겐 마법이 있잖아.”

“예에? 싫, 싫습니다.”

“싫어? 그럼 그냥 출래? 추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라도 되게? 미래에 페리안의 이름을 이을 사람이?"

"차라리 그편이 낫지, 마법의 힘을 빌어 춤을 추고 싶진 않습니다!"

"어쭈... 그냥 소심한 줄로만 알았더니 할 때는 하네?"

“뭐가 말입니까, 미미르 님!"

미미르는 음정 박자 따윈 그대로 무시하며 일리시스를 마구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귀족들은 역시 마법사는 저래서 안 된다느니, 아무리 그 잘난 시계탑의 두 번째 주인이라도 무례하기 그지없다느니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일리시스를 탓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널 살려 주는 거니 너는 나중에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해.”

일리시스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녀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다.

"올해 데뷔탕트는 재미있게 흘러가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황제와 황후는 흐뭇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미미르를 차례대로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을 터인 이름난 대신들을 먼저 찾아가 얼굴을 익히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또 사람의 힘을 빌리는 법을 홀로 깨우치고 있었다.

그리고 미미르는 페리안 가문의 공자가 공부만 한 나머지 카발리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예를 들면 파트너인 레이디를 홀로 내버려 두는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먼저 나서고 있었다.

언제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시계탑의 마법사라는 이름은 그녀가 어떤 춤을 추더라도 어떻게든 따라가려 애쓰는 일리시스가 가엾게 느껴지게 하는 면죄부가 되어 주었다.

“미미르 저 아이가 춤에 소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데뷔탕트라고 홀로 연습이라도 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흐음, 마법과 학식이라....”

“무슨 재밌는 생각이라도 하시는 모양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후, 그냥... 그냥 슬슬 저 아이들에게 시계를 넘겨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시계를요...?"

황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그가 말하는 시계가 단순한 시계가 아니라는 건 당연했다.

“물이 너무 고이면 썩는 법 아닙니까.”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주물렀다.

그가 황제가 된 지도 서른 해가 가깝게 지났다. 그러는 사이 황후가 황실로 들어오던 날 심었던 나무만큼이나 아이들도 자랐다.

“딸 키우는 재미로 여생을 보내는 일도 즐거울 것 같지 않습니까?"

“폐하!"

황후는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직 아바마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황녀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가 못미덥다거나, 황제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었다. 황후가 걱정하는 건 어린 나이에 황후의 관을 쓰게 될 엘리자베스였다.

겨우 성인이 된 아이를 황태자비도 아니고 곧바로 황후로 만드는 일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그러나 한편으론 엘리자베스를 누구보다 극진하게 여기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황후는 착찹한 심정으로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황녀님 입맛에 전복으로 만든 죽이 맞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전복죽이라...그 말을 들으니 또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지요. 내 사랑이 첫째의 입덧에 시달릴 때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음식이 전복죽이라 매일 새벽 같이 신선한 전복을 구하기 위해...”

"폐하! 정말이지....”

“농담입니다, 농담. 어이쿠, 우리 황녀님. 아바마마와 함께 춤이라도 출까요?"

어느 새 유모의 품에서 내려온 황녀가 황제의 바짓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잡고 움직이는 모습이 어린 황녀님에겐 재밌는 놀이로 보였나 보다.

황제는 자신의 구두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황녀의 작은 발을 자신의 발등 위로 얹은 뒤 좌우로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레온하르트를 쏙 빼닮은 금빛 고수머리와 제비꽃 빛 눈동자가 까르륵 웃었다.

“어머나? 저것 보세요, 엘리자베스가 어느새 레이디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웃고 있습니다.”

황녀의 자그마한 손을 꼭 쥐고 있던 황제가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군. 황후, 기억합니까? 저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

“정말 시간이 지났군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황후와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황후에게 인사했다.

맑게 웃는 그녀의 등 뒤로 깃털 같은 하얀 빛이 순간 반짝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