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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76화 (76/130)

76화 왕과 친구가 되는 방법(2)

친구라고?

비스콘티에 공작의 하나뿐인 딸이자 어쩌면 엘리자베스의 자리에 그녀 대신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레이디, 베아트리체 로지나 폰 비스콘티에는 조소했다.

사람을 기만하는 데도 정도가 있지.

엘리자베스는 베아트리체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지는 것을 보고 불안함에 입술만 달싹였다.

“...혹시 제 첫인상이 그렇게 별로였나요?"

“그럴 리가요. 레이디 엘리자베스를 본 순간 저는 레이디의 가문이 천사의 후예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답니다.”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베아트리체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 뜻을 뻔히 알면서도 싱긋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영애께서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저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무엇이 있지요?”

베아트리체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날카로운 말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며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음...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신분의 여성과 언제 어디에서든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특권?"

엘리자베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진지한 투로 말했다.

순간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비단부채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베아트리체는 부채를 다시 쥐며 바들바들 떨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리자베스 앞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예법에 어긋난 짓 한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아요, 레이디 비스콘티에.”

“...예?"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베아트리체에게 다가와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당장 저도 지키지 않는 예법을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따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어찌나 상냥하던지. 베아트리체는 순간 신에게 직접 천국을 약속받은 신도가 된 기분이었다.

“레이디 비스콘티에.”

베아트리체는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와 눈을 맞췄다.

“부디 저와 친구가 되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었다. 슬슬 두 번째 드레스로 갈아입을 시간이었다.

“베아트리체.”

드레스 룸으로 향하던 엘리자베스는 등을 돌렸다.

"베아트리체, 그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뒤돌아보며 다시 환하게 웃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디... 아니. 베아트리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예의 바른 동작으로 인사하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베아트리체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실은 베아트리체도 그녀가 무작정 싫은 건 아니었다.

제국에 단 셋뿐인 공작가의 영애로서 그에 어울리는 엄격한 교육을 받아 온 만큼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선 동질감에 가까운 안타까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취하고 있던 태도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린애나 할 법한 유치찬란한 질투와 시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부끄러움에 반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지금 이 순간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쥐구멍을 찾는 대신 서둘러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문 너머에 있는 건 미래의 황태자비가 작은 실수 하나만 범하기만을 고대하는 심술궂은 작자들과 그들 못지않게 표정을 숨기는 법을 모르는 미숙한 영 애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자.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회장으로 나섰다.

그녀의 예상대로 생각보다 말이 먼저 앞서는 미숙한 이들은 그렇게 마구 깎아내리면 정말 그들이 엘리자베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믿는 듯 마구 입을 놀리고 있었다.

'적당히를 모르는 것들 같으니라고.'

베아트리체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언니,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적당히 어린 영애들을 응대하고 있던 로젤린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로즈.”

베아트리체는 로젤린의 애칭을 부르며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귓가에 자신이 내린 결론을 속삭였다.

“....정말이세요?"

로젤린은 베아트리체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 * *

레온하르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볼에 솜털이 보송한 어린 영애들이 병아리 떼처럼 모여서 재잘재잘, 부채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모르고 레이디 엘리시움에 대해 감히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저 자리는 신사분들이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척 미미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던 조언만 아니었다면 이미 저것들을 회장에서 내쫓고도 남았을 텐데.

까르륵, 호호호, 깔깔깔.

다시 한번 세상이 모두 제 것인 줄로만 아는 오만방자한 웃음소리가 부채를 넘어 주위 어른들의 콧잔등 위로 불쾌한 주름을 만들었다.

'어차피 정치 도구로 사용될 게 뻔한데.’

'조금만 지나면 금방 다른 여자를 찾으실지도 몰라.'

'그럼 나도 기회가 있다는 걸까? 아하하하!'

"황, 황태자 전하. 손이....”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유리잔이 산산조각 나 두꺼운 장갑을 뚫고 살을 찔러 붉은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살갖을 찢고 여린 속살을 파고드는 놓는 고통이라 한들 그녀가 흘렸던 눈물과 인내해야 했던 수모만큼이나 괴로울까.

임시방편으로 붕대만 감은 손 위로 다시 장갑을 끼고 엘리자베스가 등장할 문 앞으로 가며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 번 참회했다.

'저 영애는....'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영애들의 무리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누군지 기억해 냈다.

누구보다 황후를 향해 막말을 일삼고 무시하기에 앞장서던 비스콘티에 공작의 딸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같은 행동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신 그들을 향해 시선을 흘끗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고 있었나요?"

“레이디 비스콘티에!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레이디 엘리시움의....”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함부로 입에 올릴 만한 이름은 아닌 듯하군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보아하니 이번 생의 레이디 비스콘티에는 엘리자베스의 편이 되어 주려는 모양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영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가문의 이름도, 화려한 드레스도 아닌 영애의 입술이랍니다.”

숨은 말뜻을 알아차린 영애들은 저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로 식히며 어쩔 줄 몰라 하다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떠올린 듯 울상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실례하지요.”

결국 그들 중 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로 도망쳤다.

베아트리체는 고아한 자태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부채 너머로 피식 웃었다.

“레온?"

“레이디 엘리자베스, 조금만 더 일찍 나왔다면 좋은 구경 했을 텐데.”

“응?"

"아니야. 그럼 갈까?”

이제 막 대기실에서 나온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의 팔 위로 손을 얹었다.

황태자와 그의 약혼녀가 지나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몸을 깊이 낮추며 예를 표했다.

엘리자베스는 환하게 웃으며 레온하르트와 함께 다시 중앙으로 나섰다.

“이제 긴장은 좀 풀렸어?"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친구? 갑자기 무슨?”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대답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혹시 조금 전 레이디 비스콘티에와 관련 있는 일인 걸까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춤추기 시작했다.

"내가 레온의 별이라고 했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지.”

엘리자베스는 방긋 웃으며 그 말을 다시 돌려주었다.

“레온은 나에게 있어 태양 같은 존재야. 늘 내가 가야 할 길을 비춰 주잖아."

“그리고 늘 지켜보고 있지. 또 리지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여름 태양보다 더 뜨겁고....”

빙글, 접시꽃처럼 드레스가 펼쳐지며 엘리자베스가 멀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시 엘리자베스가 멀어졌다.

이 손을 놓으면 엘리자베스가 그대로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아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품으로 돌아온 순간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술자국을 남기고서야 뒤로 떠밀었다.

손을 넓게 펼치면 손바닥 안에 겨우 차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얇고 가녀린 선이 유연하게 뒤로 젖혀지며 그의 팔에 걸쳐졌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바이올린의 솔로 연주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상체가 다시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백조처럼 우아한 몸짓에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너... 언제 이렇게 커 버린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고, 순수한 내 엘리자베스,

사람들의 악의에 대처하는 방법도 모르고, 그들의 비웃음을 역으로 돌려주는 방식도 모르는 새장 속의 새.

매일 아침 비단 손수건으로 잎을 닦아 주며 소중하게 기른 온실 속 꽃 같은 내 엘리자베스.

내 사람, 내 사랑. 감히 그렇게 칭하느니 신의 이름을 발로 밟고 말지.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엘리자베스.”

그런 내 사랑아, 언제 이렇게 불쑥 자라선 나를 다시 한번 죄인으로 만드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의 제비꽃빛 눈동자는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감정이 눈빛이 되어 그녀의 숨결 하나까지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가까스로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왜 하필 지금 비 오는 날 수레국화 꽃밭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는 거지?

서로의 숨결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을 정도의 거리, 눈빛은 이미 허공에서 한데 뭉쳐 상대방을 끌어안고 뒹굴고 있었다.

"물어보지 마.”

엘리자베스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간절한 애원이자 그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반, 세 걸음 앞으로.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며 더욱 바짝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하얀 장갑에 싸인 손가락 하나하나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움직였는지.

눈송이를 어루만지는 겨울바람도 그의 움직임을 흉내 낼 수 없을 거라 그녀는 확신했다.

레온하르트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시간이 멈춰 버리길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시곗바늘은 끝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레온하르트는 박자를 놓치기 전에 아쉬움과 미련 가득한 얼굴로 다섯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엘리자베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데?"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입술 위로 남몰래 짧은 키스를 남기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너야. 그러니 엘리자베스, 부디 왕이 되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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