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왕과 친구가 되는 방법(1)
데뷔탕트가 열리고 있는 황궁은 물론 수확제의 불꽃 축제로 후끈 달아오른 제국은 무더운 여름 태양 아래 노역을 하는 이들만큼이나 서늘한 가을바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손수건 대신 이마의 땀을 닦아 주던 바람에 얌전히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여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제부터 그가 마주할 미래는 온전히 그의 힘으로 그려 가야 하는 하얀 스케치북과도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그 첫 페이지에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담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오프닝 댄스를 추며 데뷔탕트의 시작을 알린 엘리자베스는 이제 황제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황후와 춤을 몇 번이나 춰 봤더라? 레온하르트는 덜 아문 상처를 억지로 헤집는 기분으로 회상했다.
춤은 무슨, 차라리 하루에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세는 쪽이 더 빠르겠다.
말쑥하게 위로 빗어 넘겼던 머리를 마구 헤집던 레온하르트는 이제부터라도 잘하자는 심정으로 뒤를 돌았다.
아바마마 다음으론 기사단장, 그러고 나서야 귀족 자제들의 차례가 돌아오겠지만 그는 엘리자베스를 제 품에서 놓아줄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저와 함께 한 곡 추신다면 다시없을...."
"영광이겠지만 오늘은 아니야.”
“황태자 전하.”
눈치가 빠른 친구군.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름 모를 젊은 귀족으로부터 엘리자베스를 다시 넘겨받았다.
"그 다시없을 영광을 나에게 주겠어?"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기꺼이 응했다.
데뷔탕트의 메인 커플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동작을 멈추고 자리를 내어 주었다.
레온하르트의 시야에 엘리자베스가 가득했다.
그녀의 얇고 가녀린 몸을 번쩍 들어 올릴 때면 그녀의 드레스에서 꽃잎이 낙화하는 소리가 났다.
멀어졌다, 다시 품으로 끌어당기면 황홀하고 달큰한 향이 품 안으로 훅 안겨 왔다.
"달이 꼭 이런 기분일까?"
"응?"
“밤새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잖아. 리지, 지금 내가 딱 그런 심정이야. 이대로 너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 그대로 소금 기둥이 된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너는... 무척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나를 내가 아니게 만들어."
엘리자베스가 빙글 몸을 돌렸다. 꽃가지를 꺾어 허공에서 흔들 때처럼 부드럽고 향긋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다시 그와 마주했다.
음악이 끝났지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허공에 들어 올린 채 그대로 멈춰 섰다.
“레온, 레온?"
"가만히... 그냥 이대로 있어 줘. 이대로 나의 별이 되어 줘. 응?"
엘리자베스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참 뒤에야 가벼운 동작으로 엘리자베스를 땅으로 내려놓으며 그녀의 손끝을 잡고 함께 인사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폭죽보다, 수확제의 불꽃보다 크고 높이 울려 퍼졌다.
레이디들이 충분히 두 번째 드레스로 갈아입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는 사이 황제와 황후는 데뷔탕트 축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올해도 이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오. 봄과 여름 동안 자란 것은 비단 밀밭의 밀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황후의 정원에 있는 모든 꽃들을 모아 놓아도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운 숙녀분들 보다 싱그럽고 아름답진 않을 것이라 감히 장담하네.”
황제는 가벼운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고 축사를 이어 갔다.
"특히 올해는 즐거운 소식이 둘이나 있어. 하나는 이미 알다시피, 황태자의 약혼녀 레이디 엘리시움이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황제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유모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 황녀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우리 황녀님이 벌써 두 살이나 되었다는 일이지.”
이미 소식을 들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황제의 공식적인 선언 앞에서 귀족들은 하나둘 축하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바, 황후께서 드시지 못하는 술은 짐이 오늘 대신 마실 생각이야. 황후, 짐이 그래도 되겠습니까?"
“너무 무리하지만 마셔요. 제가 걱정하면 배 속의 아이도 함께 걱정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하는군. 황제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끗해 보였다.
"황후께서도 한 말씀 하시지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해야 할 말을 전하께서 이미 하셨으니 구태여 말을 보태진 않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갈 젊은 청춘들이니까요. 그들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황제와 황후를 필두로 어느새 손에 잔을 들고 있던 귀족들이 각자 황후의 회임과 데뷔탕트의 주역들을 축복하며 건배를 외치기 시작했다.
황후의 몫까지 두 잔의 술을 연달아 마신 황제는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그녀와 함께 자리에 가 앉았고, 흐뭇한 표정으로 회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엇을 그리 깊이 생각하시나요?"
황제는 다정한 얼굴로 황후를 마주하며 대답했다.
“짐이 그래도 폭군은 아니었구나 싶어 스스로를 칭찬하던 중이었소.”
“폐하께선 역사서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실 거예요.”
“성군까진 바라지도 않소. 내게 필요한 건 황후의 칭찬 한마디뿐인 것을 잘 알면서.”
황후는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황제를 따라 회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연회를 꾸민 모든 것들이 너무 조촐하지도 않고, 과할 정도로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리지가 제법 훌륭하게 자랐어요.”
“그 아이가?"
그녀 곁에서 데뷔탕트 회장을 어떻게 꾸미고 음식은 어떤 걸 준비할지 함께 검토하던 엘리자베스를 떠올리며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언제든지 국고의 열쇠를 넘겨줘도 괜찮겠지요?"
황제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 아이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레온이 듣겠습니다. 서운할 말은 하지 마셔요.”
“장담하건데 레온 저 녀석은 황녀를 위해서라도 성군이 될 거야."
* * *
두 번째 드레스로 갈아입은 아가씨들이 다시 등장할 차례였다.
기둥에 기대어 나른한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과연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 줄까 기대하며 빈 잔을 다시 새로운 잔으로 바꿔 들었다.
저마다 잔뜩 상기된 얼굴과 떨리는 발걸음으로 대기실에 들어선 레이디들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서로 자기 카발리에가 얼마나 잘났고, 또 누구에게 춤을 신청받았는지 자랑하기에 바빴다.
엘리자베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높은 단상 위에 따로 마련된 자리에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앉은 엘리자베스는 민트 잎을 띄운 차가운 레몬수를 마시고 숨을 고르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요정의 힘을 빌려 무도회에 참여한 아가씨가 지금 이런 기분이었을까?
황태자의 정복을 입은 레온하르트는 여느 때보다 더 의젓하고 늠름해 보였고 춤을 추는 내내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그의 세상 전부인 것처럼 다정하고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엘리자베스는 그만 몇 번인가 그의 발을 밟을 뻔했다.
이대로 내 별이 되어 달라고?
"레이디 엘리시움, 괜찮으세요?"
엘리자베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네 별이면, 레온은 내....'
“레이디 엘리시움?"
"아, 괜찮아요. 저는 괜찮으니 다른 이들에게도 물수건을 나누어 주겠어요? 향수는 뿌리지 말고, 대신 민트 우린 물로 적셔서.”
“알겠습니다.”
베아트리체는 자연스럽게 황궁의 시녀에게 명령하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민트 특유의 맑고 청량한 향은 차가운 물과 어우러져 어린아이가 서툴게 볼에 바른 연지처럼 잔뜩 상기되어 있던 숙녀분들의 볼을 식혀 주었다.
저마다 새로운 드레스로 갈아입는 사이 엘리자베스와 두 공작가의 영애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레이디 밀란, 미안한 말이지만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로젤린은 저도 모르게 허락을 구하듯 베아트리체를 쳐다봤다.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부채를 움직여 대답했다.
로젤린이 드레스 룸으로 떠난 뒤에도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몫으로 은쟁반 위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에 손조차 대지 않은 채 꼿꼿하게 등을 세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쉬기 위한 공간이니 편히 앉으세요, 레이디 비스콘티에.”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엘리자베스가 속으로 감탄을 할 정도로 우아한 자태로 고개를 내저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이 닿지 않도록 조각 같은 단정한 자태로 앉아 고개는 살짝 쳐들되 턱은 잡아당기고, 흐트러짐 없이 고른 호흡을 내쉬며, 부채를 쥔 손과 팔의 각도는 일정하게.
10여 년 전, 무엇이 좋고 싫은지 스스로 생각하는 법도 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인형처럼 살았던 엘리자베스는 이미 잊어버린 딱딱한 태도였다.
푹신한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얼음 조각처럼 싸늘한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다.
"레이디 비스콘티에.”
“네, 레이디 엘리시움.”
"엘리시움보단 엘리자베스라고 불러 주시겠나요? 그 성은 저택을 떠나던 날 방에 두고 나왔답니다.”
“...네?”
베아트리체는 저도 모르게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릴 뻔했다.
그러나 스무 해 동안 몸에 익혀 왔던 예법은 그녀의 목 근육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목에서 가벼운 통증을 느끼며 베아트리체는 입 속으로 몇 번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발음해 본 뒤에야 떨떠름한 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고마워요. 레이디께 오늘 하루가 잊지 못할 밤이 되길 바랍니다.”
“저야말로요. 음,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고작 이름을 불러 달라는 이유로 부른 건 아니겠지.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그저 엘리시움보단 엘리자베스라 불리는 쪽이 좋아서 부탁드렸어요. 영애께서 먼저 저를 그렇게 불러 주신다면 다른 영애들도 더 이상 저를 엘리시움이라 부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휴, 벌써부터 이렇게 지치면 안 되는데. 레온을 따라 저도 운동을 할 걸 그랬나 봐요.”
“레... 레이디 엘리자베스?"
"이상한가요?"
"네?"
“너는 황후가 될 몸이다, 제국 그 어떤 숙녀보다 우아하고, 기품 있고, 정숙하고, 품위를 지켜야 하며....”
엘리자베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베아트리체와 눈을 맞췄다.
"지금 제 모습을 어머니께서 보셨다면 아마 무척 실망하시겠지요?"
“레이디께선 이 제국에서 황후마마 다음으로 높으신 위치에 계신 분, 그런 분께 그 누가 감히 불경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것도 그렇네요."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레이디께 무례한 행동을 했던가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베아트리체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만일 그런 게 아니라면, 저는 레이디와 친구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