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데뷔탕트(4)
밀란 공작가의 딸 로젤린 루피아 폰 밀란은 베아트리체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베아트리체는 이런 수모를 겪고도 가만있을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역시나, 베아트리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몸만 돌려 물끄러미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지만 노골적이다 싶을 만큼 얕보는 시선에 몇몇 영애들이 힉, 하며 기겁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배짱도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확실히 엘리시움의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웠다. 순간 천사의 후예라는 말을 사실이라고 믿어 버릴 만큼.
그러나 엘리시움의 위상이 땅으로 처박히다 못해 아예 사교계에서 더 이상 입에 오르내리는 일조차 없게 된 지금, 그녀는 황태자의 약혼녀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발조차 디딜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비록 비스콘티에와 밀란의 사이가 지독히 나쁘다고 해도 황제에게 두 가문의 연합 가능성은 늘 좌시해야 할 문제였다.
공작 가문 두 개와 황실, 그리고 황실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공작 가문 하나.
그것도 개국 공신이자 첫 번째 황후를 배출하였으며 여러 귀족들과 두루두루 혼약을 맺어 온 가문이라면 어느 정도 천칭의 수평이 맞겠지.
그런 생각으로 황제는 엘리시움과 태중 혼약을 맺었을 거라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용된 줄도 모르고 웃기는....'
로젤린은 속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베아트리체가 어떻게 나오는지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아끼는 정원의 꽃이 여름을 버티지 못하고 시들었기에 정원사에게 내다 버리라고 했더니, 레이디 엘리시움의 드레스에서 다시 피어났군요.”
영애들 사이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베아트리체를 대하고 있었다.
“황후마마께서 친히 꽃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덕분이지요.”
다시 베아트리체의 웃는 얼굴이 굳어졌다.
“레이디 비스콘티에, 무례가 아니라면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지요.”
로젤린은 베아트리체만큼이나 긴장했다. 과연 저 입술에서 어떤 명령이 내려올 것인가.
네 주제를 알거라? 더 이상 오만하게 굴지 말거라?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은방울꽃처럼 맑고 어린 웃음으로 베아트리체에게 부탁했다.
“제가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행동해 주시겠어요?"
“....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베아트리체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문자 그대로 예법 교사처럼 행동하라는 건가? 그럼 조금 전의 무례함을 인정하고, 사죄드리고, 정식으로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아니면 사교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는 걸까?
설마, 아무리 황실에서 곱게 자랐다 한들 그런 걸 모를까 봐.
베아트리체는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 순간의 치욕은 꼭 되갚아주리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식으로 엘리자베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부디 넓으신 아량과 한없는 자비로움으로 조금 전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라며, 비스콘티에의 베아트리체가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 올립니다.”
이번엔 엘리자베스가 당황할 차례였다. 순수하게 사교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 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어쩐지 단단히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를 받게 되었으니 그 뒤를 따라 다른 가문의 영애들도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받아 주느라 엘리자베스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미미르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저런 식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틀어지면 좋지 않은데, 매우 좋지 않은데....'
어휴 나는 모르겠다. 미미르는 그저 빨리 문이 열리고 준비된 카발리에들이 정중한 동작으로 그녀들을 모시고 가기만을 바랐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베아트리체와 로젤린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 있었다.
그녀의 선량하기만 한 표정 속에 무슨 악의가 있을지 몰라 두 사람은 데뷔탕트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잔뜩 긴장하다 못해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아트리체가 행동하고 입에 올리는 대화 주제를 머릿속에 새겨 넣기 시작했다.
'참 우아한 레이디다.'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조금 콧대가 높은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매일 마주칠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신분만으로 따졌을 때 친정인 엘리시움이 거의 몰락하다시피 한 지금 황태자의 약혼녀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베아트리체에게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레온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 베아트리체와 다른 영애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그리고 어떤 웃음이 진짜 웃음이고, 안타까움 속에 숨어 있는 심술궂은 악의와 잘되었다는 말 속에 감춰진 질투와 시기를 구분하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슬슬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시종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뷔탕트가 끝나면 정식으로 티타임에 초대 드리고 싶습니다. 세간의 소식에 어두운 저에게 지금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이번에도 엘리자베스는 악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뜻으로 말했다.
베아트리체는 슬슬 자기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선... 모르겠구나. 저런 레이디는 처음이야.”
로젤린은 눈만 깜빡이며 베아트리체의 등 뒤에 섰다. 세 마디 대화만으로 상대방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베아트리체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 정말로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순수한 의도로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로젤린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무튼 조금 더 지켜보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 * *
드디어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악보다 크게 들리는 와중에 엘리자베스는 준비된 분홍 장미 부케를 들고 레온하르트를 기다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등에 정중한 동작으로 입을 맞추고 붉은 융단이 깔린 연회장 가운데로 나섰다.
“천사의 후예라 불리는 엘리시움 공작가의 하나뿐인 따님이시자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 되시는 레이디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과 그 카발리에, 제국의 작은 태양이시며 레이디 엘리시움의 약혼자이신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황태자 전하십니다!"
사람들을 향해 엘리자베스는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그 순간 사람들은 그녀의 등 뒤로 빛으로 된 날개가 펼쳐지는 환상을 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황제와 황후가 기다리는 곳으로 안내했다.
베아트리체부터 미미르까지, 올해 데뷔탕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유난히 많았고 그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소개말은 더욱 길었다.
덕분에 레온하르트는 충분히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감상하고, 감탄하고, 또 조금이나마 익숙해질 수 있었다.
“리지... 너 화장했어?"
“여, 역시 안 어울려?"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입술연지를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움직임을 저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예뻐. 너무 예뻐서 지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동안 배운 온갖 시며 노래며 심지어 고대어까지 가져와도 지금 네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거야.”
이날을 위해 내가 시곗바늘을 되돌렸구나.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입장하는 엘리자베스를 본 순간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젠장, 저 모습을 고작 예쁘다는 말로 표현할 거라면 내 혀는 대체 왜 존재하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깨물었다, 이내 혀가 잘려 나가면 그 예쁘다는 서툰 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얌전히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눈앞이 핑글 돌기 시작했다. 정말로 사랑에 빠져 앞뒤 분간 못 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일이라면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했다.
그러나 그 옆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레온하르트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 저 멀리 떼구르르 굴러다니지 않도록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구름 위? 혹은 파도가 부서지는 가장 끄트머리? 어디든 좋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마구 심장이 요동칠 리 없었다.
단순히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내가 한심한 놈이었나?
그랬지, 한심하다마다. 엘리자베스 앞에서 그는 늘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머저리이자 다시없을 천하의 얼간이였다.
"시계탑의 주인 미미스 브룬느 님의 손녀따님이시자 제국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마법사이신 레이디 미미르와 그 카발리에, 페리안 후작가의 장자이신 일리시스 엘디르얀 폰 페리안입니다!"
“일스가 왜 저기 있어?"
눈 몇 번 깜빡하고, 힘겹게 숨을 내쉬고, 고작 그랬을 뿐인데 순식간에 길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간 모양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미미르와 함께 달달 떨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일리시스가 나타났다.
“미미스 브룬느 님을 대신해서 일스가 미미르 언니의 카발리에 해 주기로 한 거, 몰랐어?"
“전혀 몰랐는데... 리지 너는 알고 있었던 거야?"
엘리자베스는 작게 혀를 내밀었다.
"며칠 전에 일리시스가 그러더라고. 숙녀분을 에스코트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그 녀석....”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데뷔탕트의 주역들이 모두 등장했으니 이제 파트너와 서로 마주 보고 예의를 갖춰 인사할 차례였다.
레온하르트를 필두로 이미 약혼식을 올린 상대, 혹은 그렇게 되리라 예정된 상대, 또는 아버지, 극히 드물게 친구가 상대방을 마주 보고 나란히 섰다.
먼저 신사분들의 정중하고 절도 있는 인사, 그리고 숙녀분들의 우아하고 화사한 화답.
그리고 오프닝 댄스가 시작됐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며 자리를 마련해 주고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만 중앙에 남았다.
"레온, 긴장했어?"
"조금. 너는?"
“숨도 못 쉬겠어.”
“...발은 밟으면 안 돼. 너 지금 구두 신었잖아.”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서로의 어깨에 이마를 마주 대고 소곤거렸다.
오케스트라의 세련된 왈츠곡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어느 여름 다른 이들 몰래 함께 연습했던 것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한 바퀴 몸을 돌릴 때마다 그녀의 드레스 또한 허공으로 살짝 몸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흐뭇한 표정으로 어린 연인들의 춤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그녀와 서로 주고받는 뜨거운 호흡과 스텝이 끝남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나는게 아닐까 문득 두려워질 만큼 황홀한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 지금 어떤 기분이야?"
나는 떨려서, 긴장돼서, 좋은데 좋다고 말하는 순간 비눗방울처럼 이 순간이 끝날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대신 말해 줘.
레온하르트는 그런 시선으로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엘리자베스는 대답 대신 싱긋 웃으며 그가 자신의 허리를 잡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릴 준비를 하자 그에 맞추어 단단한 어깨를 붙잡았다.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아.”
레온하르트는 상기된 얼굴로 춤을 마무리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춤을 추는 사이 바람이라도 쐬며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