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데뷔탕트(3)
시계탑의 주인 미미스 브룬느의 하나뿐인 손녀이자 최연소로 그의 자리를 이을 것이라 예상되는 마녀 미미르는 가엽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실험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데뷔탕트를 미루고 있던 그녀였지만 귀여워하는 동생의 데뷔탕트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새로 드레스를 맞추지 않겠냐는 황후의 호의를 미미르는 어머니가 입었다는 하얀 드레스를 적당히 수선하는 선에서 받아들였다.
창밖으론 끝없이 이어지는 마차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 속에서 하나둘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의 모습이 꼭 하나 둘 피어나는 장미처럼 아리따웠다.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너희들이 아니야.”
미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탑의 문을 열었다. 문은 곧바로 대기실로 이어져 있었다. 슬슬 입장을 위해 모여야 할 때였다.
'이야, 이건 누가 물이라도 꼴깍 마셨다간 그대로 얼어 버릴 것 같은 분위긴데.'
미미르는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넓은 대기실을 가득 채운 어린 레이디들은 저마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얼음 조각을 사람처럼 보이게 채색을 했다 해도 믿을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는 그들이 입은 하얀 드레스와 어울려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들 중 미미르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미르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비어 있던 자리에 가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레이디로서 저렇게 조신하지 못한 행동을! 이란 뜻의 시선이 백 개쯤 날아와 꽂혔지만 미미르는 그 시선을 그대로 흘려 버리며 레몬수를 마시고 어서 저 문이나 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이디 비스콘티에.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평온하셨는지요.”
조신하게 앉아 있다 문이 열리면 슬쩍 누군지 얼굴만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기에 바쁘던 레이디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하나같이 풍성한 치맛단을 자랑하는 와중에 홀로 흰 백합처럼 깔끔한 라인의 실크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난 레이디는 미미르가 저도 모르게 치맛단을 정리할 만큼 우아한 동작으로 무릎을 굽혔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밀란. 영애야말로 평온하셨는지요.”
베아트리체 로지나 폰 비스콘티에, 비스콘티에 공작의 딸로, 올해 스물로 미미르와 동갑인 아가씨는 신분만큼이나 눈이 높기로 유명한 사교계의 주요 인사였다.
그런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넨 로젤린 루피아 폰 밀란 공작 영애는... 올해 성인이던가?
두 가문은 상대방이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 덮어놓고 반대부터 하는 원수지간이었지만 그들의 딸은 사교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사이가 좋기로 유명했다.
그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긴 소파에 함께 앉아 우아한 자태로 담소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주위의 굳어 있던 분위기 또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미미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들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방법을 아는 레이디, 그것이 두 사람에 대한 미미르의 첫인상이었다.
사교계와는 진작 담을 쌓고 지낸 그녀라도 피부에 확 와닿을 만큼 두 사람은 오늘의 주인공이 그들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리지가 걱정인데.’
물론 리지는 예쁘겠지만, 여차하면 마법을 써서라도 예쁘게 보이게 만들 생각이지만.
예쁜 드레스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과 그들을 직접 대하며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평생을 황궁에서 보내며 사교계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엘리자베스가 과연 저 아가씨들을 무사히 상대할 수 있을까?
원래 주인공은 가장 늦게 등장하는 법이었다.
공작가의 영애까지 자리에 위치한 지금, 이제 남은 사람은 단 한 명뿐.
저마다 하얀 꽃처럼 얌전히 앉아 있던 레이디들은 담소를 나누는 한편 연신 문고리를 흘끔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더니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엘리시움 공작가의 영애이자 황태자의 약혼녀, 장차 황태자비에 이어 황후 되실 분,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위치에 계신 레이디께서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레온하르트, 저 모습을 보고도 멀쩡하게 서 있었다고?'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본 미미르는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꽃이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하얀 꽃이었다.
말총으로 만든 단단한 심지를 넣어 주름을 고정시킨 하얀 실크 드레스 위로 누군가 꽃씨를 뿌리고 봄을 가져다 흩뿌린 것이 틀림없었다.
진주로 만든 술대, 잎맥 하나까지 정교하게 산호를 조각해 만든 작은 꽃잎, 실크 리본을 섬세하게 접어 만든 장미, 얇은 천에 하얀 비단 실로 수를 놓아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잘라 낸 코르사주.
자수 꽃잎 위에 다시 모래알처럼 작은 유리알로 함북 이슬을 머금은 듯한 반짝임을 더한 작약을 비롯해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엘리자베스의 몸 위로 만개해 있었다.
빳빳하게 고정된 주름에 걸맞도록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배열된 스커트의 꽃과 달리 아무렇게나 방치한 덩굴식물처럼 등 뒤로 길게 늘어지는 드레스 자락을 장식한 것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여름 덩굴장미였다.
빛을 받아 다이아몬드로 만든 꽃잎이 반짝반짝 빛나며 그녀가 걸을 곳을 별이 지나갈 고귀한 길로 바꿔 주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그녀가 걷는 곳이 곧 별이 멈추는 곳이었다.
드레스 자락 사이로 스치듯 보인 구두는 분명 수정으로 만든 구두였다.
커다란 수정을 통째로 조각하고 세공하는 것도 일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신을 수 있게 마법을 걸다니, 설마 발등에 있는 저건 다이아몬드인가?
영애들은 저마다 슬며시 내밀고 있던 발을 스커트 아래로 숨겼다. 수정 구두 앞에선 어떤 비단과 리본 장식 구두도 실내용 슬리퍼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에 달려 있던 다이아몬드와 크리스털 구슬이 소리 없이 까르륵 웃으며 조그마한 꽃처럼 연신 빛을 피워 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연스럽게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온화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건 황실 대대로 황후들이 착용했다는 일곱 개의 다이아몬드 별 목걸이였다.
황후께서 직접 골라 주신 게 분명한 티아라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흰 깃털까지 꽂은 그녀의 모습에 미미르는 엘리시움의 이명을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스스로 악마가 되길 자처하는 짓이라는 데 미미르는 그동안 자신이 배워 온 마법 지식을 전부 걸 수도 있었다.
슬쩍 베아트리체와 로젤린 쪽을 보자 그들 또한 예상을 뛰어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시종이 이 자리에서 두 번째로 신분이 높은 베아트리체에게 어서 인사를 올리라며 눈짓을 했다.
미미르는 엘리자베스의 드레스를 담당한 재단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그녀에게 작은 마법 하나를 걸어 주었다.
오늘 하루 동안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는 별빛을 가루 내어 흩뿌린 것처럼 빛날 것이다.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은 서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비스콘티에의 베아트리체가 레이디 엘리시움께 인사드립니다. 뵙게 되어 실로 영광이옵니다.”
어느새 베아트리체의 뒤에 서 있던 레이디들이 일제히 우아하게 몸을 숙였다.
미미르는 가장 끝에 서서 몸을 숙이는 대신 엘리자베스에게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녀의 작은 장난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조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엘리자베스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데뷔탕트 대기실이 아니라 드래곤의 제물로 바쳐져 그 레어로 들어가는 줄 알 정도로 바들바들 떨던 엘리자베스는 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리는 순간 숨을 삼켰다.
악의는 없었으나 호의 또한 없다.
미미르를 제외하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이곳에서 그녀는 스스로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숨을 멈추고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스럽게도 가장 높은 자리에 그녀를 위한 의자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젠 황후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절대로 먼저 몸을 낮추지 말 것, 그들이 개인적으로 인사를 올리기 전까지 먼저 말을 걸어서도 안 되며, 구설수에 오를 말을 하느니 차라리 도도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하거라.
엘리자베스는 황후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겼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며 친분을 다진 영애들과 달리 그녀는 혼자였다.
미미르가 있다고 해도 그녀는 귀족의 작위조차 없는, 단지 황실의 호의로 이 자리에 참석한 외부인이었다.
문득 그녀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만큼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자리에 있는 모든 레이디가 깊게 무릎을 숙여가며 예의를 표했으나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신분인 두 공녀가 아직 그녀에게 따로 인사를 올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두 번째로 신분이 높은 그들이 아직 인사를 올리지 않았는데 그 아래 계층의 레이디가 엘리자베스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미미르는 마른 입술만 핥으며 조금씩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엘리자베스와 베아트리체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보란 듯 엘리자베스로부터 등을 돌린 자세로 로젤린과 다른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활짝 웃으며 소곤소곤,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소리 높여 웃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주인공으로 정해졌다고 한들 그건 오늘뿐만이야. 진짜 사교계의 주인은 우리야.'
로젤린과 베아트리체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이 있는 한 그들을 제치고 선뜻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놓고 엘리자베스를 따돌리는 모습에 미미르와 힘없는 가문의 여식들만 속으로 안타까워하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했다. 황후께선 먼저 말을 건네지 말라고 했지만 이대로 있다간 그들이 원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아니, 잠깐만. 잘 활용하면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있겠는데?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베아트리체는 그녀의 숨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그 순간까지도 엘리자베스를 등지고 있었다.
"레이디 비스콘티에, 좋은 밤이지요?"
베아트리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로젤린은 불안한 표정으로 베아트리체를 쳐다봤다.
좋은 밤이지요?
먼 옛날, 황후가 자신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으면 황궁에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 만큼 예법이 까다롭던 시대에 서로 사이 나쁜 선황의 후궁과 현 황제의 황후가 있었다.
황후가 오기 전까지 사교계를 주름잡던 후궁은 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라도 황후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아야 했으나 황후는 도도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그래 봤자 어린애, 애송이라고 비웃었던 후궁은 몇 번의 연회에서 꾸준히 황후가 자신의 인사를 무시하는 모습에 조금씩 사람들이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을 보며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엔 선황이 며느리 되는 황후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서야 그녀는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좋은 밤이죠?
그 말엔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너그러워서 너의 그 오만방자한 존재감을 미연에 인정해 주니 너는 그저 영광으로 여기고 반성하며 감사하도록 하라.
베아트리체에겐 그런 뜻으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