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데뷔탕트(2)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 같이 평범한 드레스였다.
쇄골까지 훤히 파인 가슴선을 따라 한 뼘 길이의 짧은 러플 소매가 달린 드레스는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듯 종처럼 풍성한 스커트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재단사가 슬쩍 마네킹을 흔들자 시녀들은 저마다 탄식했다.
드레스의 그림자 위로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오건디를 한 겹, 두 겹, 마치 패스트리처럼 풍성하게 겹쳐서 주름 잡은 스커트는 옅은 안개가 드리운 하늘처럼 너무 화사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차분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따다 곱게 가루를 내어 스커트 위로 흩뿌리면 이런 반짝거림이 나올까.
치맛단을 장식한 레이스에 달린 수천 개의 진주 비즈와 수정 장식이 밤하늘처럼 반짝이며 흔들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조개껍데기 안쪽의 무지개색 부분을 아주 얇게 저미듯 잘라 내어 별과 달 모양으로 오려다 붙여 놓았다.
“이젠 레이디 엘리자베스도 성인이시지요.”
재단사는 그렇게 말하며 마네킹의 가느다란 허리선을 보란 듯 쓸어내렸다.
그 동작에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붉혔다.
최근 들어 빈번하게 꿈에서 등장하던 비를 흠뻑 맞아 얇은 천 아래로 비치던 하얀 살결이며 얇고 가느다란 선이 절로 떠올랐다.
“가... 가슴이 너무 파인 것 아닌가?"
레온하르트는 애써 머릿속에서 비에 젖어 애처롭고 가련하게 보이던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밀어내며 지적했다.
그러나 재단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숙한 편에 속한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맛자락에 매달린 장식과 그녀의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감탄하며 구경하던 엘리자베스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너무 파인 것 같은데, 아무리 화려한 레이스 장식을 덧대었다고 해도 역시 신경 쓰이는데.
레온하르트는 입장하자마자 겉옷을 벗어 엘리자베스에게 입혀 버리고 말겠노라고 단단히 다짐했다.
“이번 데뷔탕트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지요. 그래서 더더욱 고심해야 했답니다. 어떻게 해야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이곳의 주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연출할 수 있을까. 그러던 차에 문득 기사들의 망토가 생각났습니다. 망토가 주는 이미지는... 권위적이고, 위엄 있고, 화려하지만 동시에 그 움직임은 바람처럼 부드럽고, 우아하지요."
재단사는 마네킹을 반 바퀴 돌렸다. 얇은 오건디 스커트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고 다시 가라앉는 순간 방 안의 사람들은 다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언뜻 보기엔 숨이 막힐 만큼 섬세한 자수도, 보석 장식도, 심지어는 그 흔한 레이스 하나 없이 고작해야 천 하나가 어깨에 매달린 꼴이었지만 그 천이 연출하는 효과는 굉장했다.
“.....여왕의 망토 같아요....”
“바로 그겁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재단사는 뿌듯한 표정으로 다시 마네킹을 돌렸다.
다시 한번 치맛단이 접시꽃처럼 넓고 묵직하게, 그러나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정말... 정말 아름다워요.”
엘리자베스는 황홀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의 옆에 앉아 드레스만 빤히 응시했다.
“입어 보시겠어요?"
"네? 제가요? 아, 음."
엘리자베스는 한 박자 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알아차리고 재단사의 손에 이끌려 옆방으로 향했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푹 내쉬더니 소파 옆으로 쓰러졌다.
“전하?"
"맙소사... 저걸 입은 리지를 내가 멀쩡한 정신으로 볼 수 있을까?"
시녀들은 소리 낮춰 웃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은 머릿속으로 지도를 펼치고 산맥과 수천수만 명의 군사들, 그리고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데 특화된 나머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약혼녀는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허리는 괜찮으신가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셋 없이도 우아한 선을 연출할 수 있도록 솔기 사이로 버드나무 가지처럼 탄성 있는 와이어를 넣은 덕분에 길고 가느다란 목 아래 굽이치는 물결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고혹적인 선이 가슴과 허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어서 팔꿈치를 살짝 넘기는 길이의 레이스 장갑을 낀 엘리자베스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수줍게 웃으며 황후처럼 우아한 자태를 취해 보았다.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앞으로 황후 되실 분, 공주님보단 왕의 모습이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은 나무 상자를 열자 장인의 손길 아래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황실의 보석들이 그녀에게 반짝이는 인사를 올렸다.
“장인들이 놀라더군요. 처음으로 황실에 납품했던 보석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고, 또 자신의 손으로 재가공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엘리자베스는 토끼 눈을 한 채 검푸른 벨벳 위의 보석을 보며 소리 없는 탄성만 내지르고 있었다.
후, 하고 불면 그대로 살랑거릴 만큼 섬세하게 깃털을 조각해 만든 하얀 산호 날개, 꽃잎의 테두리에 둘린 얇은 은사와 나비의 날개처럼 오묘한 색의 공작석을 채워 만든 작약 펜던트, 블루 다이아몬드로 만든 들꽃 세 송이가 덩굴처럼 늘어지는 귀걸이까지.
얇은 오건디 리본을 체인 삼아 펜던트를 연결한 뒤 엘리자베스의 목에 딱맞게 리본을 매고 귀걸이에 이어 날개장식을 달던 재단사는 멈칫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네?"
재단사는 산호로 만든 날개 장식 대신 다른 상자에서 얇은 은사와 아주 옅은 색의 아쿠아마린으로 만든 화관을 꺼내 들었다.
화관에 연결된 것은 베일 대신 하늘 하늘 늘어진 순은 체인이었다.
체인과 체인이 이어지는 곳마다 콕콕 박힌 사파이어와 진주가 그녀의 은발 사이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이쪽이 더 어울려요.”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화사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재단사는 구두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드레스나 장신구와 달리 구두만큼은 그녀가 직접 만들 수 없었기에 그녀는 수석 재단사의 발에 습진이 생길 때까지 물웅덩이를 밟고, 튀기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게 만들어 가까스로 최종 스케치를 완성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스케치를 들고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가진 조각가에게 달려갔다.
조각가는 스케치와 최고급 수정 원석을 보며 이건 미친 짓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주문대로 커다란 수정 원석을 구두 모양으로 깎으며 물결이 발등을 덮고 발목 위로 튀어 오르는 찰나의 순간을 재현해 냈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단단한 수정과 높은 굽에 발이 다치지 않도록 마법까지 걸린 데다 발등 위엔 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다이아몬드까지 박혀 있었다.
“이런 걸 신발에 달아도 되는 건가요?"
엘리자베스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의 구두에 선뜻 발을 넣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허락하신 일인데 괜찮고 말구요.”
재단사는 어서요, 하며 그녀의 작은 발에 구두를 신겨 주었다.
“저... 어떻게 보여요?"
조심스럽게 치맛단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제자리에서 가볍게 걸어 본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그때마다 드레스에 달린 장식은 물론 발등을 감싸는 선을 따라 하늘로 튀어오르는 물방울 대신 달려 있던 자그마한 진주와 크리스털 장식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재단사는 감격한 나머지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앞에 금성이 내려왔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그럼 황태자 전하를 놀라게 해 드리러 갈까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재단사의 조언대로 턱을 가볍게 치켜들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섰다.
검을 열 자루째 손질하고 더 할 일이 없어지자 베일리와 함께 온몸으로 놀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순간 제 눈을 의심하며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모든 것을 걸치고 나온 엘리자베스는 사람이라기보단 여신에 가까웠다.
“....리지?"
나 지금 죽어서 천국에 온 것 아니지?
“어... 어때?"
어떻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지.
“내가 음유 시인이 아니라 다행이야. 만약 음유 시인이었다면 네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못하는 점을 비관해서 그대로 하프의 현을 다 끊어 놓고 혀를 깨물어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냥 예쁘다고 한마디만 해 주면 될 것을.”
엘리자베스는 괜히 머리카락만 귀 뒤로 넘기며 몸을 반쯤 비틀었다.
“아직 드레스는 한 벌 더 남았답니다.”
그 말에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던 마네킹으로 향했다.
탄성을 내뱉으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칭찬하던 시녀들 또한 남은 드레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 두 번째 드레스였다.
첫 번째 드레스,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분홍 꽃다발을 들고 홀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순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
재단사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마네킹을 덮고 있던 천을 벗겨 냈다.
"맙소사....”
"리지, 내가 정말 네 카발리에가 되어도 되는 걸까?”
“레온 말고 그러면 누가 해? 하지만 이건... 이건 정말....”
시녀들은 혹시 바닥에 그들의 턱이 떨어진 건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단사는 뿌듯함과 함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저어... 레이디 엘리자베스, 그리고 황태자 전하?"
“말씀하세요.”
“잠시만 쉬었다 해도 될까요?"
더 이상 서 있을 체력이 없습니다. 사흘 밤낮을 내리 바느질만 한 손가락은 이제 아무런 감각도 없구요,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눈앞도 핑핑 도는 것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녀들이 먼저 움직였다.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재단사를 옆방으로 옮기느라 방에 홀로 남게 된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다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예뻐?"
보는 눈이 없어지자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엘리자베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레온하르트 특유의 톡 쏘는 듯 맑고 청량한 향수 향기가 그녀의 코를 스치는 것보다 그의 넓고 든든한 품이 그녀를 껴안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정말 예뻐. 이대로 세상에 내보이기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워. 평생 눈에 담고 싶어. 리지, 엘리자베스, 내 이졸데. 네가...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장담하건대 데뷔탕트 이후 가장 아름다운 별을 가리키는 이름은 네 이름으로 바뀔 거야. 어쩌면 네가 입고 걸친 디자인이 레이디 엘리자베스풍이라며 유행할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숨도 쉬지 않고 레온하르트는 말했다. 이대로 시계탑의 마법사들을 몽땅 불러다 지금의 엘리자베스를 영원히 기록에 남기고 싶었다.
미미르, 미미르에게 부탁할까?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먼저 보여 주는 걸 대가로 바치면 선뜻 들어주지 않을까?
레온하르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고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제자리에서 두어 바퀴 돌아 보였다.
남은 드레스 하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와 설렘이 너무 넘쳐 두려울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