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데뷔탕트(1)
바람은 농부의 볼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황금빛 밀밭이 그의 망토 자락 아래에서 가볍게 흔들리며 바람이 찾아왔음을 노래했다.
농부는 몸을 일으키고 구슬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잠시 식히기로 했다.
“올해 가을바람은 시작부터 나쁘지 않군.”
농부의 말에 바람은 가을바람이 되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북국에서 미끄럼틀을 타듯 남쪽으로 내려오던 바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여름의 열기를 차가운 망토 자락 아래로 하나둘 거두었다.
"그거 들었어? 이번 데뷔탕트에는 황태자비 되실 분도 나오신대!"
“그래 봤자 우리랑은 상관없는 높으신 분들 이야기인걸.”
“하기야 그것도 그렇다. 하아, 데뷔탕트라... 나도 그런 곳에 갈 수만 있다면...."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처녀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더니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바람은 그녀의 인사에 화답하듯 물동이 속으로 마른 지푸라기 하나를 날려 보냈다.
“그나저나 이번 가을 수확제에 너는 누구랑 갈 거야?"
“오늘까지 나한테 춤 신청하러 안 오면 확 혼자 갈 거야.”
“요한나!"
“...저놈은 절대 죽었다 깨어나도 귀족은 못 될 거야.”
“어서 가 봐! 한스 경의 레이디 요한나.”
아가씨들의 맑고 낭랑한 웃음소리를 타고 바람은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수확제를 앞둔 작은 시골 마을은 천천히 낙엽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람은 연인에게 춤 신청을 하기 위해 헐레벌떡 언덕길을 내달리는 청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다시 나아갔다.
시골 마을, 광장, 번화가, 끝없이 펼쳐진 평원, 다시 마을, 광장, 번화가,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길.
한시도 쉬지 않고 먼 길을 내달린 바람은 저 멀리 무지개가 시작되는 곳처럼 알록달록한 것을 보며 그곳에서 잠시 쉬어야겠노라 마음먹었다.
그곳은 천에 염료를 물들이는 염색 공장이였다.
바람은 처음 맡아 보는 고약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숨을 흡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자 염료에서 갓 건져 내 흠뻑 젖어 있던 얇은 비단이 바람을 유혹하듯 하느적하느적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고약했지만 바람은 순식간에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하늘 한 줌을 뜯어다 물에 풀어 놓은 듯 옅은 파랑.
세상 모든 초록빛 이파리를 모아다 한데 뭉친 듯 진한 녹색.
봄과 여름 내내 고이 모아 두었던 꽃의 꿈은 사랑스러운 분홍색이었다.
한참 그들 사이를 헤집으며 술래잡기를 하던 바람은 문득 여기서 이대로 멈춰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최고급 실크부터 올이 거친 무명까지, 모두가 흔쾌히 그를 안아 주고 하늘 높이 팔을 펄럭였다.
거친 길을 달리던 마차와 달리기 시합을 하던 바람은 저 멀리 보이는 이파리에 매달려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하늘은 그가 내려왔을 때에 비해 그새 한 뼘 더 높아져 있었다.
바람은 문득 나무 아래가 유난히 소란스러운 것을 알아차리고 다람쥐처럼 빙그르르 굵은 나무줄기를 타며 땅으로 내려갔다.
이제 겨우 성인이 되었을까, 그러나 웃음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와 그에 어울리는 청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는 건지 호기심이 돋아 바람은 몸을 낮추고 수확을 마친 밀밭에 남은 낱알을 주워 가는 작은 들짐승처럼 들판에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슬며시 다가갔다.
청년은 아가씨의 은발에 코스모스 한 송이를 꽂아 주며 연신 예쁘다, 어여쁘다, 아름답다 칭찬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숨도 쉬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슬며시 궁금증이 생겨 바람은 살짝 몸을 띄웠다.
그리고 아가씨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훅 물러서며 청년의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게 했다.
“데뷔탕트까지 앞으로 일주일 남았나?"
“오늘 마지막 의상 피팅이 있어. 레온 너도 와야 한다?”
"으으음..”
바람은 슬쩍 아가씨의 머리카락 옆에 얇고 기다란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물론 바람은 아무런 형태도 없었으므로 누가 본다면 가을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리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바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꼭 자신을 닮은 빛이라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두근거려.”
"좋은 뜻으로? 아니면 나쁜 뜻으로?"
“양쪽 다.”
아가씨는 스스럼없이 청년의 허벅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청년은 혹시나 누가 볼까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이 언덕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그들뿐이란 것을 알고 느긋한 표정으로 아가씨가 조금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바람은 더더욱 호기심이 돋았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그러다 문득 바람은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냈다.
염료 냄새가 고약했던 염색 공장을 빠져나와, 올해의 낙엽 빛깔을 미리 알리듯 고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북적대는 대로를 지나, 크고 웅장한 건물 몇 개를 지나자 높은 성벽이 나타났다.
사람이라면 절대 맨몸으로 오를 수 없을 만큼 높은 성벽이지만 바람에겐 어린아이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는 일보다 쉬운 일이었다.
여기는 황궁이었다.
바람은 곰곰이 생각했다. 저 청년과 아가씨는 누굴까? 답은 우물가에서 들었던 소문 속에 있었다.
올해 데뷔탕트의 주인공이 될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과 그녀의 파트너인 황태자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엘리시움.
자신의 기억력에 감탄하며 바람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젊은 연인들 사이를 빙글빙글 돌며 그들의 행복을 축복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작은 회오리바람과 그에 휩쓸린 낙엽 소리만 자박거렸다.
“음... 장담하는데, 레온은 분명 멋질 거야."
“근거는?"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그 앞에서만은 여전히 아이처럼 해맑은 푸른 눈이 곱게 휘어졌다.
"여자의 감?"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려 버렸다.
엘리자베스는 까르륵 웃으며 커다랗고 곳곳에 굳은살이 박인 손을 들어 올리더니 꼭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관찰하는 것처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그냥, 남자들 손은 다 이렇게 크고 투박한가 싶어서.”
“검을 쥐어서 그런 걸 거야. 일스 녀석 손은 아마 장갑 만드는 장인들이 알면 제발 한 번만 자기네 모델이 되어 달라고 엎드려 빌걸?"
“그래도 나는 레온 손이 더 좋아.”
레온하르트는 덜컹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왜 나쁜 의미로 두근거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위로 끌어다 눈을 덮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내가 과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 때문에.”
레온하르트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사랑스러운 약혼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환영식에서 차마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이후 황실은 그녀를 사교계에 일절 내보내지 않으며 보호했다.
덕분에 올해 데뷔탕트에 참여하는 이들 중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너무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비밀리에 자랐던 황태자의 약혼녀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당연히 데뷔탕트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귀족 영애들은 울상을 짓거나, 혹은 그녀를 이기고 진짜 사교계의 여왕이 되겠노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당사자들을 제외한 이들은 흥미진진한 태도로 그 모습을 관망하고 있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모든 의복을 직접 담당한다고 암암리에 소문이 난 가게는 아예 더 이상의 방문객과 상담 요청은 받지 않겠다며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영애들은 아쉬움에 입술을 꾹 깨물며 제도의 이름난 재단사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라 성화였다.
황실의 보석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내놓으라 무작정 고집을 피우는 영애들을 상대하던 보석상의 늙은 장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드레스, 보석, 구두, 부채, 향수, 심지어는 레이스 달린 손수건 하나까지.
무엇이든 좋았다. 절대 올해의 주인공 자리를 정해진 자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영애들은 눈에 불을 켜고 고급 상점가를 직접 이 잡듯 샅샅이 들리고 있었다.
영애들만 그럴까, 올해 데뷔탕트에 참석하는 딸을 가진 부모들 또한 그녀들 보다 더하면 더 했지 잔뜩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황태자는 이것도 해 주고 저것도 해주고, 아주 레이디 엘리자베스를 위해서라면 죽었다 깨어날 지경으로 지극정성이라는데, 우리 딸에게도 그런 남편감이 필요해요!
하지만 부인, 그런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소? 적당히 우리 수준에 맞는 가문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녀석과 이어 줍시다.
우리 딸이 얼마나 귀한 딸인데 고작 '그나마 괜찮은 녀석'과 이어 준다고요? 당신이 그러고도 아버지야?
바람은 인간들의 문화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잔뜩 시뻘게진 귀부인의 이마를 톡 건드리고 지나갔다.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서로 얼굴만 보며 웃고 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난리인 걸까.
남쪽으로 길고 지루한 여행을 하며 바람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만년설로 뒤덮여 있던 고향을 떠나 온몸이 녹진녹진하게 녹아내리는 따스한 남쪽 바닷가에 도착해 끝내 수면 위로 쓰러져 짜디짠 소금물에 녹아 내리는 순간까지도 결국 바람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완성된 건가요?"
"레이디의 웃음 한 조각만 있으면 완성이지요.”
엘리자베스는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고작 보름 정도 보지 못한 사이 재단사는 잔뜩 초췌해져 있었다.
어찌나 귀족 영애들의 성화가 무섭던지 꿈에서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렇게 잠을 설치는 날이면 차라리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했다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두 손을 입가로 가져다 대며 측은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 두 벌의 드레스에 제 재단사 인생을 모두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런, 아직 두 번 더 인생을 걸어야 할 텐데.”
긴 소파에 기대 누워 있던 레온하르트가 세 자루째 손질하고 있던 검을 불빛에 비춰 보며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와 재단사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리지의 결혼식 예복과 대관식 예복도 자네가 만들 예정 아니었나?"
재단사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녀가 가져다준 차만 연신 들이켰다.
엘리자베스는 기대로 가득 찬 눈으로 재단사를 빤히 쳐다봤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저에겐 다시 없을 영광입니다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작업에 들어가야 할지도 몰라.”
그 말에 재단사는 결국 테이블 위로 쓰러지더니 앓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그래서, 완성된 드레스는 어디 있지?"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천으로 덮어 놓은 마네킹 두 개가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물론 레온하르트와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