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소나기와 수레국화의 꽃말(4)
먼저 물러선 건 레온하르트였다.
둘 사이를 잔잔하게 흐르고 있던 바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댐에 막혀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굳어 있었다.
비가 그쳤는지 보고 오겠다며 굳이 유리로 된 정자 밖을 나서는 레온하르트의 옷깃을 떨리는 손길로 잡아당겼다.
왜, 하필 지금이야?
두 사람은 동시에 생각했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의아한 척,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한 척, 뒤집어쓸 수 있는 가면이란 가면은 모두 얼굴 위로 덮어쓰며 몸을 돌렸다.
가지 마.
그녀는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 리지?”
왜 그래?
왜 그러냐고? 엘리자베스는 절망했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처음 발을 내디딘 길이 꼭 가시밭길처럼 괴로워서.
네가 뒤로 물러난 거리가 마치 영원히 닿을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져서.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레온하르트, 나를 사랑해?"
그의 얼굴 위를 두껍게 가리고 있던 가면이 순식간에 찢어져 흩날렸다.
그 아래에 억지로 숨겨 두고 감춰 둔 것은 잔인하리만치 상처 입은 죄인의 표정이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달이 몇 번만 더 둥글어졌다 가늘어지길 반복하면 성인이 되어 정식으로 황태자비가 될, 비공식적으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를 가진 여자는 그 참혹한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장대비가 퍼붓는 정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자베스!"
레온하르트가 다급히 우산을 챙겨 그녀를 뒤쫓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뿌리쳤다.
그녀 앞에선 소드 마스터의 힘도, 그동안 수련한 완력도, 근력도, 인내심도 모두 허무할 정도로 사라져 버린다.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거센 바람을 타고 검은 우산은 돛단배마냥 허공으로 날아가 와지끈 소리를 내며 침몰했다.
비에 푹 젖은 엘리자베스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왜 그랬어?"
"리지?"
“왜 날 억지로 붙잡지 않았어...?"
레온하르트는 왜 그녀가 울고 있는지, 슬퍼하는지, 절망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준다고 했잖아! 허락한다고 했잖아!”
그저 이것도 벌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이라고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내가 원한 건 레온하르트를 뿌리치는 게 아니라, 레온하르트가 억지로 나를 붙잡아 다시 정자로 데려가는 거였어!"
비참했다. 이런 것까지 구구절절 말하고, 들어야 하는 서로의 처지가 서글펐다.
대체 어디서부터 엇갈린 거지? 누가 먼저 욕심을 부렸지? 헛된 꿈은 누가 꾸고 있었지?
“나... 나는 네가... 그냥... 내가 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해?"
저녁노을마저 가려 버린 먹구름 속으로 레온하르트는 결국 자신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자베스는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런 식으로 소리를 높이는 레온하르트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의 모습 위로 잊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소리를 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한걸음에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다 그대로 멈춰 섰다.
"붙잡길 원해?"
"물어보지 마.”
엘리자베스는 눈을 꾹 감고 도리질을 쳤다.
"네가 싫다는 일은 죽어도 안 할 거야. 이대로 붙잡길 원해?"
"네가 스스로 생각해. 나한테 가르쳐줬던 것처럼, 홀로 판단하고 결론 내리고 행동해.”
제발.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리지. 제발. 붙잡길 원해?"
레온하르트는 절박했다.
나는 네 허락 없인 너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죄인이란 말이야. 그러니 제발, 응? 차라리 영원히 눈앞에서 꺼지라는 말이어도 좋으니 결정을 내려 줘.
“그러니까 그런 태도가 싫다고! 하나 하나 물어보지 마!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 레온은 그래도 된다고, 이 내가 허락했다고!”
"엘리자베스!”
"붙잡기 싫다고 하면 평생 다시는 손 안 잡을 거야? 아니면 파혼이라도 할까?"
“대체 네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십 년도 넘게 말했잖아. 모든 선택권은 너에게 있다고. 네가 싫다고 하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 선택권 너한테 빌려줄게!"
빗물이 이렇게 뜨거웠었나? 아, 여름이라서. 너무 더워서 빗물마저 뜨겁게 끓어올랐구나. 그래서 지금 머리 위로 촛농을 끼얹은 것처럼 뜨거운 거구나.
“빌려줄게. 네가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도 행동할 수 있게, 그 선택권 너한테 죽을 때까지 빌려줄게. 그러니까 지금 당장 선택해. 나를 붙잡을 거야, 아니면 나를 이대로 놓아 버릴 거야?"
비에 쫄딱 젖은 엘리자베스는 처음 공작저에서 만났던 그때처럼 한없이 가냘프고 여려 보여서, 거센 바람 한 줄기면 그대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다.
그녀가 날아가면 안 되니까, 그래서 그는 그녀를 붙잡았다.
단지 그뿐이야? 정말로?
그는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자신을 되돌아볼 자신이 서질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끌어당겼다.
억센 손길에 발이 미끄러진 엘리자베스가 넘어진 곳은 푸른 수레국화가 빈틈없이 빼곡하게 피어난 화단이었다.
거센 빗방울을 온몸으로 견디고 품어 시퍼렇게 멍이 든 꽃잎 바다 위로 그녀의 몸이 하얀 물거품처럼 떨어졌다.
"엘리자베스!"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 발은? 삔 건 아니지? 레온하르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서 파도처럼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레온하르트....”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분명 눈을 감았는데도 뜨거운 장대비가 눈꺼풀 아래로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불에 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저주하는 악인처럼, 혹은 신의 복음과 그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라 기도하는 성자와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너에게 평생 거짓말을 하며 살 거야. 너를 죽을 때까지 기만할 거라고. 너는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도 모르고, 내 곁에서 평생을 속으면서 살 수 있겠어?"
"괜찮아. 내가 용서할게.”
용서하지 마. 너에게 용서받아야 할 레온하르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내가 내 손으로 지워 버렸어.
“미안해... 미안해 엘리자베스... 정말로 미안해....”
"괜찮아. 용서해 줄게.”
사과를 받아 주지 마. 너에게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내가 없앴어.
그러지 마. 하지 마. 너는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의 사과를 받아 주고, 또 용서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나를 괴롭게 하지 마. 나는 이 사실조차 말하지 못해. 그게 나에게 내려진 하늘의 벌이야. 네 다정한 말 한마디, 손짓 하나, 웃음 하나마다 땅에서 꽃이 피듯 내 몸엔 아홉 갈래의 채찍 자국이 새겨져.
"괜찮아.”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조금 전부터 그녀의 얼굴로 떨어지고 있는 건 레온하르트가 흘리고 있던 눈물이었다.
“절대로 너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 슬프게 하지도 않아. 속상하게 할 일도 없을 거야. 내가 선택했어. 내가 선택한 네 인생은 오직 꽃밭을 걷듯 행복하기만 할 거야.”
그래도 돼? 버릇처럼 뒤따라 나오려던 말을 다시 삼키는 일이 꼭 가시투성이 밤송이를 통째로 삼키는 일처럼 고통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 존중할게.”
레온하르트는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으며 엘리자베스의 숨결마저 기어이 삼켜 냈다.
한참 뒤에야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놓아 주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그동안 선보이지 못해 아쉬웠던 만큼 새빨간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다시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는 도장을 찍듯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비에 푹 젖어 너덜너덜해진 종잇조각도 그들보단 멀쩡할 터였다.
그럼에도 석양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새빨간 노을은 그녀의 두 볼과 입술에도 번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레온하르트 또한 그와 비슷한 꼴을 하고 있었다.
온종일 보이지 않던 황태자와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물에 푹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심지어 발목이 접질린 바람에 레온하르트에게 공주님처럼 곱게 안겨 오자 시녀장은 결국 뒷목을 붙잡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희들, 어서 수건과 따스한 차와 목욕 준비에 황태자 전하께는....”
“술은 필요 없어. 더 좋은 걸 마셨거든.”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황태자 전하!”
겨우 주섬주섬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시녀장이 소리를 지르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때까지도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겨 있던 엘리자베스는 차라리 감기라도 걸려서 더 이상 붉어질 곳도 없는 얼굴을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원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여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엘리자베스.”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수건에 돌돌 말리는 내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레온, 방금 뭐라고....”
“사랑해.”
마치 낙인을 찍듯 엘리자베스의 귓바퀴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깨물며 레온하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황홀한 독을 엘리자베스의 귀에 직접 흘려 넣었다.
그는 여전히 사과를 할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가혹한 처지에 놓인 죄인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각자 방에서 잠들기 직전 두 사람은 이불 속에서 몰래 손끝으로 입술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장마가 끝났음을 고하는 첫 번째 햇살을 입술 사이로 서로 주고받았던 순간을 떠올리자니 괜히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고 마구 입꼬리가 끝없이 올라가려 해서 난처했다.
다음 날 사이좋게 나란히 감기에 걸린 두 사람은 괜히 서로를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다가, 다시 흠흠 점잖고 우아한 척 새침을 떨다가, 동시에 재채기를 하고 기침을 콜록이더니 쓰디쓴 약 앞에서 표정을 찌푸렸다.
“리지는 사탕까지 있는데 왜 나는 아무것도 없어?"
“그야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아직 어리시지만 전하께선 술도 드시는 어엿한 어른이시니까요.”
시녀장은 엄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꾹 감고 한입에 약을 삼켰다. 술을 마실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목구멍이 타들어 가고 입 안이 부글거리는 느낌이었다.
“레온, 아 해 봐.”
쓰디쓴 약의 맛을 온 얼굴 근육을 사용해 표현하던 레온하르트는 힘겹게 한 쪽 눈을 떴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몫으로 나온 사탕 중 하나를 집어 그의 입가에 대어 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흘끗 시녀장의 눈치를 보다 그녀가 준 사탕을 냉큼 받아먹었다.
모르는 척 작은 손가락 끝에 잇자국을 내놓자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에 시녀장은 마음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아직 한참 멀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의 정원 화단 어디가 완전 쑥대밭이 되었다더라, 두 분의 옷에 푸른 꽃잎이 잔뜩 달라붙어 있더라, 온갖 소문들이 자자했지만 그녀의 눈엔 아직도 마냥 어리고 서툴기만 한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