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69화 (69/130)

69화 소나기와 수레국화의 꽃말(3)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네...."

엘리자베스는 바늘처럼 가느다란 빗줄기가 끝없이 내리는 흐린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책에서 고개를 들고 창 밖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베일리 덕분에 정말로 딱 손만 잡고 잤던 날부터 벌써 사흘째였다.

그사이 빗줄기는 금방이라도 그칠 것처럼 가늘어졌다 다시 후두둑 우박처럼 굵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잠깐 아바마마를 뵈어야겠어.”

레온하르트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비가 멈추지 않는다면 분명 강이 범람해 홍수가 일어날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을 지경이었는데 홍수까지 겹쳐서 사람들이 이건 황실의 저주라며 음해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이번엔 그런 일 없게 미리 대비해야겠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이미 홍수에 대해서라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는 황제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러나야했다.

'아 맞다, 지금 아바마마는 제정신이시지.'

황제는 제정신이다 못해 새로 태어날 레온하르트의 동생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연일 내리는 비에 기사단도 잠시 검을 내려놓고 그동안 밀려 있던 서류 작업이며 무기 관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까만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레온하르트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는 예상대로 일리시스가 있었다.

최근 10년간의 강우량 기록과 강이 범람한 횟수, 홍수가 일어났던 해와 그 당시 피해 상황 자료가 넓은 책상 가득 펼쳐져 있었다.

“벌써부터 대비하는 거야?"

"화, 황태자 전하.”

“긴장할 필요 없어. 어디 보자, 아바마마와 대신들이 사흘 밤낮으로 머리 싸매는 대신 네가 세 시간 정도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 더 그럴듯한데?"

“전하!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어쩌긴 뭘 어째? 일스 너를 대신들 대신 그 자리에 앉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야지.”

“그런 일은....”

“나는 황제가 되면 가장 먼저 리지에게 황후의 관을 주고, 그다음 너를 재상으로 임명할 생각이야.”

"히끅.”

너무 놀란 나머지 일리시스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비도 오는데 체스나 한판 둘까?"

어디 이번에도 일리시스는 그때와 같은 수를 쓰려나? 레온하르트는 체스판과 말을 가져오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예상대로 일리시스는 달달 떨리는 손길로 정확히 같은 자리에 같은 말을 놓았다.

레온하르트는 의도적으로 그가 다른 수를 놓을 수 있게 일부러 말을 하나 내어 주었다.

어느새 집중한 나머지 딸꾹질이 그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일리시스는 마치 체스의 룰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말을 놓은 것 같은 레온하르트의 한 수에 고개를 기울였다.

성인이 된 일리시스는 집중할 때 모노클을 슬쩍 들어 올리는 버릇이 생긴다.

하지만 만일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모노클을 선물하고 그런 버릇을 들이라고 명령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는 마법사가 이런 느낌이려나.

레온하르트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으며 생각했다.

일리시스와 두는 체스는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일리시스가 체크메이트를 선언하기까지의 과정은 매번 달랐다.

어쩐지 자신의 처지가 체스판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닮아 있다고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행복해진다. 그러나 그 정해진 결과에 닿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리 예측하고 또 앞을 내다보아도 알 수 없다.

지금처럼, 일리시스가 예상한 모든 움직임에서 벗어나 변덕과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체크메이트를 선언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로 킹을 옮긴 순간같이.

한 번은 그가 물었었다. 감히 황제를 상대로 매번 이기는 그가 괘씸하지 않냐고.

그때 내가 뭐라 대답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일리시스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전하께선 왜 스스로 패배하시려 하십니까?"

“재상이 하는 일 중 하나는 군주의 변덕을 받아 주는 것도 포함되거든."

레온하르트는 이어서 손을 넓게 벌리더니 판을 완전히 엎어 버렸다.

일리시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 이제 어떤 수를 펼칠 거지?"

일리시스는 잠시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오물거리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달달 떨리는 손끝은 레온하르트의 머리칼을 향하고 있었다.

"아얏.”

사실은 하나도 아프지 않으면서 레온하르트는 부러 아픈 표정을 지었다.

손끝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칼 하나를 쥐고 있던 일리시스는 도서관의 푹신한 카펫 바닥 위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태자의 몸에 위해를 가한 죄, 여기서 내가 사형을 내려도 할 말 없는 거 알지?"

일리시스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베일리 녀석도 심심하면 물어뜯는 게 내 머리카락인데, 고작 그런 걸로 친구를 잃고 싶진 않기도 하거니와....”

말꼬리를 늘이며 레온하르트는 다리를 꼬아 앉았다.

"이유는 듣고 죽이는 살리는 해야 하지 않겠어?"

일리시스는 잔뜩 긴장해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말아 쥐고 흔들림 없이 맑고 정갈한 눈을 들어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버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진정한 충신은 잘못된 판단을 내린 황제에게 제발 정신 차리라 손가락질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까지 일갈한다고요."

“그래서 손가락질을 하는 대신 머리카락을 뽑은 거야?"

레온하르트는 반쯤 웃고 있었다. 이 소심하고 겁 많은 친구는 아주 가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일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태자의 처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레온하르트는 고작 체스판을 뒤엎었더니 정신 차리라는 뜻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나 혹은 그에 준하는 벌을 내리는 대신 한 손으로 일리시스를 일으켜 세웠다.

“너, 내가 미쳐 날뛰면 뺨을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 해. 알겠지? 이건 명령이야. 내가 황제가 되면 너에게 내릴 가장 첫 번째 명령이기도 하니까 잘 기억해 둬.”

"네? 네. 며, 명심하겠습니다.”

일리시스의 어깨를 툭툭 쳐서 격려하자 얇은 몸이 종잇장처럼 마구 흔들렸다.

비 오는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레온하르트는 도서관을 나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보다 훨씬 유쾌한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마주하고 있자니 다시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어마마마의 정원은 괜찮을까?'

마구잡이로 내리는 비에 여린 꽃잎들이 걱정되었다.

가을로 예정된 데뷔탕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엘리자베스에게 바치기 위해서라도 황실 정원사들이 온 힘을 다해 관리하고 있을 테지만 역시 직접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황후의 장미 정원으로 향한 레온하르트는 멀리서 바삐 움직이는 하얀 물체에 눈을 가늘게 떴다.

가까이 다가가자 레온하르트는 그 하얀 물체가 새장 모양의 하얀 우산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정원사라면 우산 대신 덧옷을 한 겹 더 입었을 테니 우산 속의 인물은 적어도 정원사는 아니었다.

레온하르트는 부러 물웅덩이를 밟아 철벅 소리를 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짐작한 대로 우산 속에 있던 것은 엘리자베스였다.

“뭐 하고 있었어?"

“시녀들이 어제 바람이 너무 불어 모처럼 핀 꽃이 구경할 새도 없이 다 져버렸다며 아쉬워하길래 황후마마의 정원이 걱정돼서 와 봤어. 레온은?"

레온하르트는 슬쩍 엘리자베스의 우산을 옆으로 밀어내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새침하게 모로 얼굴을 돌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레온하르트의 방향으로 세 걸음 이동했다.

“비가 거의 멎은 것 같은데....”

"그, 감기 들면 안 되니까!"

"같다고 했지 멎었다고 한 적은 없는 걸.”

엘리자베스는 눈만 깜빡였다.

레온하르트는 괜히 흐드러지게 피어난 여름 장미만 노려보며 연신 헛기침을 반복했다.

"예쁘지?"

엘리자베스는 하얀 손끝으로 분홍빛 장미 한 송이를 톡 건드렸다.

그 바람에 이슬처럼 맺혀 있던 빗방울이 땅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동시에 어린 장미 특유의 싱그럽고 화려한 향이 물씬 풍겨왔다.

아무래도 빗물에 꽃향기가 스며든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탐스러운 꽃송이도 톡톡 건들며 꽃향기에 함뿍 취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혹시 그녀가 비에 맞을까, 어깨 하나가 완전히 젖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소리도 없이 우산 위로 흩뿌려지던 빗줄기가 예고도 없이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화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지금 쓰고 있는 우산의 크기와 두 사람의 어깨너비를 고려했을 때 가능한 비를 적게 맞으려면 옆으로 나란히 서는 대신,

"레온?"

“정자까지만 이렇게 가자. 응?"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듯 앞뒤로 서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조금 전까지 유난히 향이 짙던 화단을 기웃거리던 엘리자베스에게선 꽃향기와 함께 평소 그녀가 사용하는 향수 냄새가 났다.

아니, 엘리자베스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향수를 쓰지 않는다.

지금 그의 코끝을 간질이고, 스치고, 순간 눈앞을 아득하게 만드는 향은 오롯이 그녀의 향이었다.

깨끗하게 광을 낸 은종으로 만든 드루이드 벨에서 울리는 소리, 작달만 한 돌멩이를 미끄럼틀 삼아 내려오며 까르륵 웃는 시냇물 소리, 은방울꽃과 수선화와 맑고 정결한 향을 가진 꽃들이 속삭이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곧 엘리자베스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미쳐 버리겠군.’

하얗고 얇은 아사로 만든 여름 원피스의 절반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세수를 반복하다 하늘만 노려봤다.

고작 소맷자락이 젖어 버드나무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팔의 살결이 조금 비치는 것 가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베일리를 가운데에 두고 잠들었던 날, 그를 놀리던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눈앞에서 둥둥 떠다녔다.

'저질, 저질, 저질, 저질, 최악의 쓰레기, 구제 불능, 그냥 아주 나가 죽어라! 네가 지금 몸만 갓 성인이 된 애송이지 속은... 속은....’

이대로 저 흙탕물에 코를 처박고 그대로 죽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레온하르트는 고심했다.

한편 그의 곁에 등을 돌리고 앉아 손가락 끝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엘리자베스도 사정은 비슷했다.

조금 전 그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등 뒤에 서는 순간 느껴진 알싸한 향이 부싯돌에서 잘못 튀어 나간 불씨처럼 그녀의 심장을 톡 건드리고 지나갔다.

향수를 쓰지 않는 그녀와 달리 레온하르트는 제법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 향수만 고집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 전 그녀의 코끝을 희롱하고 지나간 향은 그가 평소 사용하던 향수와 전혀 다른 향이었다.

조금 더 농밀하고, 묵직하고, 잔뜩 응어리져 압축된 향은 숯이 되어서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켰다.

조금 진정된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연일 내린 비로 사방이 스산한 와중에 따스한 두 숨결만 한데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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