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소나기와 수레국화의 꽃말(2)
우르릉 쾅.
독한 술 한 잔에 그대로 쓰러졌던 레온하르트는 부스스 눈을 떴다.
새까만 창문이 순간 하얗게 밝아지더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상체는 바닥에 누워 있고 다리만 침대 위에 올려 둔 상태에선 몸을 일으키는 것보단 다리를 내리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란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아직도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는 창문 밖 상황처럼 막막하고 어둡기만 하다.
날씨는 온몸에 습기가 들러붙는 여름에, 빗소리는 한심한 자신을 질책하듯 투두둑 창문을 두드려 대는데 거기에 이어 천둥 번개라.
우르릉, 번쩍, 후두둑.
그러고 보니 이런 날이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오는 밤의 정령 같은 사람을 그는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정령도 내 머저리 같은 행각에 질렸나 보다.
레온하르트는 혹시 문고리가 돌아가고 하얀 머리칼이 가장 먼저 그녀의 어깨 너머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며 빼꼼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까 문을 노려봤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리지가 이젠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 걸지도 모르잖아? 그럼 그건 축하할 일에 가깝지. 그러니까 차라리 축배를 들자. 그리고 내일 아침은 숙취를 핑계로 아예 처소에 틀어박혀서... 젠장, 왜 나는 하는 생각마다 이런 한심한 것투성이지?'
레온하르트는 괜히 신경질을 내며 들어 올렸던 술병을 바닥으로 거칠게 내려놨다.
단단한 유리병은 고작 대리석에 부딪혔다고 깨지진 않았지만 제법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순간 레온하르트는 인기척을 느꼈다.
'뭐지? 암살 시도?'
레온하르트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베개 아래에서 단검을 꺼내 들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암살자가 당당하게 문을 통해 들어올 리 없었지만 술에 취한 그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숨을 죽이고 문에 바싹 붙자 작고 가녀린 숨소리가 느껴졌다.
아주 작고 여려서 겨우 민들레 홀씨 하나 들어다 허공으로 날려 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가녀린 숨소리는 천둥이 무거운 쇠사슬 소리를 낼 때마다 히끅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수백 가지의 '만약에'로 시작하는 문장을 떠올렸다 술의 기운을 빌어 그중 가장 현실성 없다고 조금 전까지 비웃었던 것을 끄집어 냈다.
'만약 저 너머에 있는 게 리지라면?'
레온하르트는 저 멀리 단검을 던져 버리곤 문에 등을 기대며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 화들짝 놀라 숨을 멈추고, 한참 뒤에야 다시 문에 바싹 붙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 주면 안 될까? 내가 그럴 자격도 없는 놈인 거, 잘 아는데. 리지, 한 걸음만 나에게 다가와주면 안 될까?'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둥글게 몸을 말았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성질을 내며 따져 묻는 것도.
먼저 그녀를 끌어안고 다 괜찮다고 다독일 권리도.
심지어는 한 걸음만 나에게 와 달라 무릎을 꿇고 애원할 자격조차도.
와르릉!
순간 구질구질한 감상과 자책감, 자괴감에 빠져 있던 황태자조차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가 났다.
마치 거친 바위로 만든 시꺼먼 구름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혀 박살이 나는 것만 같은 소리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레온하르트의 위로 그림자가 겹쳐졌다.
“리지, 리지! 정신 차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응?"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꽉 끌어안고 도무지 놓아 주지 않는 엘리자베스의 품 안에서 얌전히 드러누웠다.
올이 성긴 원단으로 만든 여름 잠옷 너머로 잔뜩 열이 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언뜻 본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꼭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리지, 괜찮아?"
“안 괜찮아!”
레온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에 눈만 깜빡였다.
황태자궁의 천장에서 빗물이 새기라도 하는 건지,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더워 빗물이 꼭 끓인 물처럼 뜨겁기라도 한 건지.
볼 위로 후두둑 떨어져 귓불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지는 물줄기가 화끈거렸다.
"안 괜찮아... 전혀 안 괜찮다고... 레온 이 바보야! 왜, 왜 나를 내버려 두는 거야?”
"리지?"
"나는 레온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그냥 내버려 두면 다야?”
"내가 언제 널 내버려 뒀다고 그래?"
“생각할 시간 같은 거, 주지 마! 그딴 거 필요 없어!”
세상에.
우리 리지가 변했어요. 그것도 어디서 거친 말을 배워 와선.
분명 기사단 놈들의 소행이겠지. 감히 어디서 황태자의 약혼녀에게 그런 불경한 말을 가르쳐서는... 이게 아니라,
“그... 그야 나는 너에게 집착할 자격도 없는 놈이니까... 아니,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집착하고 막 그러면 안 된단 말이야. 응?"
"레온은 그래도 돼! 그럴 자격 있어! 이 멍청한 황태자 전하야!"
“전자에는 동의 못 하지만 후자는 전적으로 동의해....”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려? 언제까지 나를 어린애 보듯 할 거야? 나는... 나도 이제 내년이면 성인인데, 레온 눈엔 아직도 공작저에서 엉엉 울던 꼬마로 보여? 응?"
그건 아니지. 네가 그동안 먹은 황실 밥이 몇 끼인데 그동안 한 뼘도 자라지 않았다면 오히려 말이 안 되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붙잡아 줘!"
붙잡아 달라니?
“레온은... 레온은 내 태중 약혼자고... 원한다면 결혼도 하기 전에 첩부터 들이는 망나니도 될 수 있는데....”
“결혼하기 전이든 후든 후처를 들이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내 생에 통틀어 나의 주인은 오직 너뿐이야, 엘리자베스.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진심으로 화낸다.”
“...차라리 화를 내!"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지?
"내가 다른 사람이랑 웃으면 같이 웃으면서도 마구 배 아파하고, 다른 사람과 즐거워하면 괜히 훼방 놓고 싶어지고, 그러란 말이야!”
“...다른 사람이랑은 아예 말도 못 섞을 만큼 질투하고 집착해 달라는 소리야?"
가여운 엘리자베스, 분명 너무 놀라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펫이 깔린 엘리자베스의 방과 달리 그의 방은 대리석이 깔려 있어 오래 누워 있기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복도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는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몸을 내어 주었다.
'아직 법적으로 성인이 되지 않은 약혼녀에게 술을 먹여 그대로 재우고, 겸사겸사 기억도 지워 버리는 일이 과연 최선의 해결책일까?'
“...레온은 나를 가지고 싶지 않아?"
술은 리지가 아니라 내가 먹어야겠군.
도저히 맨정신으로 듣고 있기 힘들 지경이었다.
“가질 자격 없다는 말 같은 거, 하지마. 이미 십 년도 넘게 들었어. 대체 나에게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진 몰라도 자책감 가지지 마. 머리도 그만 박아. 내가 다 용서해 줄게. 응? 그리고 그 자격도 내가 줄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사자인 내가 허락하면 되는 일이잖아.”
"리지...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
“그러면? 대체 뭔데? 나한테 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건데? 나를 죽이기라도 했어?"
응.
"아니. 그럼 내 앞에 있는 건 리지가 아니라 리지의 유령이었겠지.”
"나를 홀대하기라도 했어?"
홀로 너무 많은 것을 견디게 했지.
"내가 언제나 너를 우선시하는 거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그러니까 나를 줄게. 나를 가져도 된다고, 집착하고, 질투하고, 마구 못되게 굴어도 된다고 허락해 줄게. 응? 레온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야.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야.”
“혹시 리지 너도 술 마셨니?"
“장난하는 거 아니랬지!"
하지만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네 말 하나하나가 너무 아픈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른단 말이야. 조금만 봐주라. 응?
이제 나는 평생 너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너를 기만하고 그 사실에 괴로워 하며 속으로 홀로 썩어 문드러지겠지.
그래도 그 대가로 네가 행복해진다면 나는 이것을 내 사랑의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너를 사랑하겠어.
너무 많은 감정을 한 번에 털어 내자 엘리자베스의 가슴에 커다란 빈 공간이 생겨 버렸다.
그 자리를 그가 채워 주면 좋을 텐데, 포옹 한 번. 키스 한 번이면 충분히 새로 채워 넣고 튼튼하게 보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로 한 걸음만 내디디면 바로 그토록 원하던 곳에 닿을 수 있었으나 둘은 주저하고 있었다.
“...자고 갈래?”
레온하르트는 슬쩍 엘리자베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지듯 그의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녀의 건너편에 앉아 이불을 살짝 끌어 올려 준 레온하르트는 괜히 헛기침만 하다 그때까지 바닥에 놓여 있던 술병을 발견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술병과 한 침대에서 잠든 약혼관계의 열아홉과 열일곱 소년소녀들이라.
"그... 그런데 리지. 너, 나는 이미 성인이고 너도 내년이면 성인인 거 알지?"
"...응."
“그리고 우리가 약혼한 사이란 것도 잘 알 거고.”
“...잘 알지.”
“그러면 그 나이대 청년과 레이디가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마구 입을 놀릴지는... 걱정 안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느새 또랑또랑하게 맑아진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저질.”
내가 뭘? 내가 네 손을 잡았어, 옷자락에 코를 묻었어,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기라도 했어?
억울한 마음에 내가 뭘 잘못했냐 항변하려던 레온하르트는 막 입을 열다 말고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몸만 열아홉, 그러나 그 속에 들어앉은 건 엘리자베스와 앞자리부터 다른 나이를 가진 사내였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차라리 숨을 멈추고 죽는 편이 나았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그대의 말에 심히 공감하는 바요. 따라서 본인은 상대방의 명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 가지 절충안을 제안하고자 하오.”
“레온, 아까부터 술 냄새 나는데 대체 뭘 마신 거야?"
“먹으면 인간이 정말 원숭이에서 진화했는지 알게 되는 술. 아쉽게도 조금만 먹어서 어떻게든 인간 흉내는 내고 있어.”
“베일리, 이리 와!"
한참 전부터 까만 눈을 빛내며 주인과 주인이 새빨갛게 문드러진 말을 주고받다가, 다시 평온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또 장난기 가득한 푸른 말을 하다가, 훅 하며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베일리는 기다렸다는 듯 레온하르트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베일리가 경계선이야?"
레온하르트는 황당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일리의 하얗고 풍성한 털 위로 엘리자베스의 작은 손이 올라왔다.
“손만 잡고 자자고?"
손가락이 위아래로 까딱였다.
레온하르트는 결국 침대 아래에 감춰두었던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더 마셨다. 효과는 여전히 기가 막혔다.
그렇게라도 얌전히 기절한 듯이 잠들지 않으면 정말 반려견을 질투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감각과 함께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등 뒤로는 푹신한 침대가, 손바닥 아래론 따스하고 보드라운 엘리자베스의 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