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소나기와 수레국화의 꽃말(1)
일리시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마구 손을 내저으며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에겐 마치 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들릴 뿐이었다.
좋아해야 한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정치적으로 그녀가 나와 결혼해야 하니까, 이왕이면 억지로 한 결혼이나마 행복해야 하니 좋아하려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리지,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거야?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어서 아니라고 말해 줘, 모든 선택권은 너에게 있으니 어서 뭐라도 말하란 말이야. 응?
뭐라고 하고 있는 거야? 들리지 않아. 입만 벙긋거리지 말고, 그 작은 입술로 소리 없이 종알거리지 말고, 아니면 차라리 내 뺨을 때려도 좋으니 제발 뭐라도 해 줘. 응? 엘리자베스, 리지. 내 황후. 제발.
“...엘리자베스, 네 선택을 존중해.”
레온하르트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도망친다는 말 외에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말이 없었다.
“저, 전하께서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하신 모양인 것 같은데...."
“아무 말도 안 들리는 표정이던데, 제가 가 볼게요. 공자께선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레이디 엘리자베스!"
레온하르트의 뒤를 따라 쫓아가려던 엘리자베스를 일리시스가 막아 세웠다.
어쩌면 그에게 찾아온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더 이상 흔들어 놓을 정도로 그는 모질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단 하나를 얻는 대신 단 하나를 포기하고 대신 모든 것을 얻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오해가 풀린다면 자신은 그저 그들이 걸어갈 길가에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줄 나무에 불과했다.
“....일리시스?"
“지금 오해를 풀지 않으면 정말 일이 커질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지켜본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건 어리석고 부족한 일인 점 알고 있습니다만, 영애를 향한 전하의 마음은 늘 진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어서 가세요. 붙잡아서 미안합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내달렸다.
레온이 없는 자리에선 누구보다 우아하고 기품 있던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달리는 모습에 시녀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모습이 등 뒤로 스쳐 지나갔다.
태양은 그런 그녀가 너무 덥지 않도록 구름 몇 뭉치를 불러와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여름의 태양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모인 구름은 서로 엉겨 붙으며 조금씩 그림자에 물들기 시작했다.
운명이 바뀌기에 딱 좋은 날씨라고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 전까지 거울을 가져다 대면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이 깨질 정도로 화창하고 맑던 날씨가 갑작스럽게 어두침침, 을씨년스럽게 바뀔 리 없었다.
실연이라면 실연일까?
내 정해진 미래를 믿었던 만큼 내 벗도 믿었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너를 그에게 소개해 줬을 뿐인데.
그의 시곗바늘은 고작 그런 일에도 마구 흔들리며 미래를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정말 알베르트를 찾아가 밤새 술이라도 먹고, 이대로 비가 내리면 비 탓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가 엉엉 울며 실연당한 사내놈이 할 법한 못나고 한심한 추태나 부려 볼까?
걸음마다 피식피식 자조 어린 헛웃음과 비웃음을 뚝뚝 떨어트리며 레온하르트는 무작정 걸었다.
성인이 된 그에게도 황궁은 홀로 사색, 혹은 궁상을 떨며 걷기에 부족함 없을 만큼 넓었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황궁 정원에서, 조금 전 그의 시곗바늘을 마구 뒤틀어 놓은 장본인과 다시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리지?"
"허억, 헉... 하아... 흡... 레, 레... 하악....”
“리지, 리지. 천천히.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지.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숨이 턱에 닿다 못해 가슴이 너무 아파 더 이상 달리지 못할 만큼 되어서야 저 멀리 레온하르트 특유의 달처럼 빛나는 머리칼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를 향해 달려갔다.
레온하르트는 언덕길을 달려 내려온 가는 몸을 받아 주고, 숨이 차서 눈앞이 어질어질한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제 쪽으로 기대게 했다.
"네가 뭘 생각하든 그런 거 아니야!"
"뭐, 뭐?"
우웁, 헛구역질을 할 만큼 속이 울렁거렸다. 눈을 뜨면 하늘과 땅이 빙글거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고 레온하르트의 옷자락을 꽉 붙잡으며 겨우 한 문장, 외마디 비명처럼 내뱉었다.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레온하르트는 나무 그늘에 엘리자베스를 기대어 앉히며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몰라.”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울렁이는 숨을 진정시키려 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레온하르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모르겠어. 레온이, 무슨 생각 하는지.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안 가. 하지만 어쨌든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리지....”
“그냥 들어!”
들으라면 들어야지요.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얌전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야, 약속했잖아."
약속?
“바닷가에서 약속했잖아. 내년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예 목록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많이 약속했잖아. 그러려면 같이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눈 위로 회색 구름이 지나갔다. 동시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 레온하르트랑 같이 있고 싶어. 이건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내가 결정하고 내가 내린 결론이야. 그러니까....”
레온하르트는 지금 내리는 비가 소나기일지 장마의 시작일지 가늠해 보며 서둘러 옷을 벗어 그녀의 머리 위로 덮어 주었다.
“지금도 봐! 이런 식으로 나한테 잘해 주면서, 뭐든 해 주면서, 좋아하지 않는 것도 내 선택이라고? 그런 거 존중해 주지 마!”
"리지, 리지?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들으라니까? 레온하르트, 이... 이....”
나쁜 놈! 엘리자베스는 혀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말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달래는 것과 그녀를 실내로 이동시키는 것, 그리고 오해를 푸는 것 중 뭐가 가장 급할 지 갈등하다 셋을 동시에 하기로 결정했다.
“꺅!”
“젠장,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잘 들어. 나는 너를 웃게 만들고 싶지 울게 만들고 싶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라고!"
냉큼 그녀를 등에 업은 레온하르트는 눈에 보이는 아무 지붕 달린 건물로 뛰기 시작했다.
어쩐지 한참 전부터 꽃 냄새가 난다더니, 황후의 장미 정원 근처였나 보다.
레온하르트는 흙탕물을 훌쩍 뛰어넘으며 대리석과 유리로 만들어진 정자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자로 들어온 레온하르트는 가장 먼저 비에 젖은 머리를 마구 털고 셔츠를 벗어 비틀어 짜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틈으로 그를 훔쳐보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정숙하고 우아한 레이디로서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품위 있는 행동."
"그냥 차라리 대놓고 보지 그래? 수련장에서 하루 이틀 마주한 것도 아니고...."
"그, 그때는 셔츠 속에 레온 팔이 들어 있었거든?"
지금처럼 완전히 벗은 상태가 아니었다고!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완전히 돌아앉았다.
레온하르트는 젖은 셔츠를 대충 어깨 위로 걸치기만 한 상태로 엘리자베스의 건너편에 보란 듯 등을 돌리고 앉았다.
“...조금 진정했어?"
엘리자베스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부린 추태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리로 된 천장 너머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속에 잠긴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게 아니라고 치자. 그러면 된 거야?"
젠장, 내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우선 엘리자베스를 달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처소를 옮긴다고 들었어.”
"누가 그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신경질적인 얼굴로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시녀들이 오해한 거야. 네가 성인이 되고, 우리가 정식으로 식을 올려서 다른 궁으로 가기 전까지 나는 잠자리를 옮길 생각 없어.”
“.....정말로?"
네가 바로 문 너머에 있는데, 이렇게 비가 오다가 천둥 번개라도 치면 곧바로 달려올 수 있게 문을 열어 둬야 하는데, 그리고 밤새 네 손을 잡아 줘야 하는데 내가 어딜 갈 수 있겠어?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늘 찾아가도 돼?"
순간 레온하르트는 혀를 깨물었다.
"리, 리지? 혹시 열 나는 거 아니지? 비 맞아서 감기라도 걸린 거야? 아니면 그, 조금 증세가 늦긴 하지만 일사병?"
“...레온은 늘 그런 식이야.”
내가 또 뭘?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레온하르트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정작 구멍이 난 건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의 심장인데 물을 끼얹듯 퍼붓는 건 여름 장마였다.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타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를 업고 처소를 향해 내달렸다.
빗물에 젖어 안 입느니만 못한 상태가 된 레온하르트의 셔츠 너머로 따끈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의 등에 볼을 기댄 엘리자베스는 차라리 지금 이 시간이 멈춰 버리거나, 아니면 황성의 구조가 갑자기 바뀌거나, 혹은 레온하르트가 길을 잃어 영영 이렇게 있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누구보다 엘리자베스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레온하르트는 가능한 지붕이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빠르게 지나갈 수 있는 최단 루트를 통해 순식간에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비에 잔뜩 젖어 돌아온 두 사람을 보며 시녀들은 서둘러 목욕물을 준비하고 뽀송뽀송한 수건과 뜨거운 차를 가져왔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뜨거운 차가 아니라 독한 술 한 병인데....”
"전하?"
레온하르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자베스는 커다란 수건에 돌돌 말리다시피 해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방문을 한참 노려보던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만 탈탈 털어 냈다.
장마 특유의 습기 차고 눅눅한 공기와 도무지 알 수 없는 엘리자베스의 태도에 숨쉬기가 답답했다.
시녀장과의 제법 긴 설전 끝에 기어이 그가 아는 가장 독한 술을 얻어 내고야 만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삐죽이며 병의 라벨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과거의 그가 과로한 업무에 지쳐 현실에서 도망치듯 잠을 청하고 싶을 때 마시던 술이었다.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고 그 옆에서 함께 버텨 주던 사람을 봤어야지, 이 멍청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똑같은 머저리구나. 레온하르트는 서글픈 마음으로 병을 기울였다.
'이런 미친, 이게 이렇게 독했... 젊은, 어린 몸은 하여튼 이럴 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순식간에 어질어질해진 시야 너머로 달도 별도 삼켜버린 새까만 하늘이 보였다.
‘천둥... 번개는 치면 안 되는데....'
결국 침대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상체는 침대로, 하체는 바닥으로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만을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