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꽃을 부르는 먹구름(4)
에스페도르 제국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황태자인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는 눈앞에 놓인 문서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의 나이 열아홉, 정식으로 성인식을 올린 지도 어느덧 일 년이 지났는데 언제까지 낡은 처소에서 지낼 거냐, 새 처소로 옮기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을 괜히 어렵고 복잡하게 빙빙 꼬아 놓은 제안서를 노려보는 레온하르트는 심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황태자궁의 시녀들 역시 서로 심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런 문서는 종이 낭비라며 제목만 읽고 버렸을 황태자 전하께서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검토하고 계신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그의 방으로 찾아와 주인을 내쫓고 침대를 차지하고야 마는 약혼녀를 위해 그는 성장하는 체구에 맞춰 몇 가지 가구만 바꾸었을 뿐 아직도 벽지며 천장 장식 등에서 어린아이의 방 느낌이 물씬 풍기는 처소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진지하게 서류를 검토한다는 건 분명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스무 해 넘게 자식처럼 그를 돌봐 온 유모이자 황태자궁을 총괄하는 시녀장은 노련한 솜씨로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며 레온하르트에게 다가갔다.
레온하르트는 찬찬히 읽고 있는 척하고 있던 문서를 책상 위로 툭 내던지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쿵 하며 발아래로 떨어질 법한 발언을 내뱉었다.
“...처소를 옮길까?"
그 뒤에 '리지의 처소도 함께 말이야.'라는 문장만 이어졌더라면 그들은 지금처럼 경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황태자의 약혼녀를 향한 사랑은 지극했고, 황태자궁 이외의 장소를 담당하는 이들에겐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가 그렇게 소중하게 아끼고 또 은애하는 약혼녀를 두고 홀로 처소를 옮길까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있었어,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두 분께서 싸우시기라도 한 걸까? 설마 삼각관계라거나... 에이, 이 황궁에 두 분 또래라고 해 봤자 시계탑의 미미르 님이나 페리안 공자뿐인데....
설마 레이디 엘리자베스와 페리안 공자가?
시녀들은 시녀장님이 황태자 전하께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정을 캐묻는 사이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종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평생을 남자라곤 황제 폐하, 황궁의 시종들, 기사들, 아니면 황태자 전하만 보고 살았던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서 일리시스 엘디르얀 폰 페리안이라는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 본 희대의 천재에게 관심을 느끼고 그 관심이 흥미로, 호감으로, 연모의 감정으로 발전하던 도중 황태자 전하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라는 근거조차 희박한 결론이 완성되었다.
“처소를... 옮기신다구요?"
“아니, 아냐. 그냥 해 본 말이야. 나는... 여기가 좋아. 내 평생의 시간이 이 방에 담겨 있잖아?"
“하지만 전하,”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리지도 있고."
조금 전까지 열띤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불화설을 주장하던 시녀가 머쓱한 얼굴로 역시 그럴 리 없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 읽어 볼 가치도 없는 종이 뭉치를 베일리에게 던져 주었다.
"아이고 전하! 저 청소는 대체 누가 하라고 또 베일리에게 던져 주시는 겁니까!”
“종이는 물을 뿌려서 밀대로 밀어 버리면 되지만 솜은 펄펄 날아다니니 더 번거롭잖아? 솜 인형을 던져 주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전하!"
'오늘 수업이 끝나면 정식으로 사과해야지.'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엘리자베스의 방문 앞에서 옷차림을 다시 점검했다.
엘리자베스가 '하여튼 칠칠맞지 못하 다니까.' 라며 애정 어린 질책과 함께 타이를 다시 고쳐 줄 수 있도록 적당히 흐트러진 차림을 한 레온하르트는 일정한 박자로 문을 두드렸다.
"리지, 준비 다 됐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레온하르트는 의아해하며 다시 문을 두드렸으나 이번에도 대답은커녕 문 너머에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허락도 없이 약혼녀의 처소 문을 열어젖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고민하는 사이 시녀장이 목을 가다듬으며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선... 먼저 교실로 향하셨습니다만....”
레온하르트는 무안한 얼굴로 볼만 긁적이며 교실로 향했다.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좋은 아침이다?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자? 오늘의 간식은 뭘까? 숙제는 다 했어? 헉 맞다 숙제!'
뒤늦게 두고 온 숙제가 생각났지만 이미 등 뒤에서 스승 특유의 느긋한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결국 스승과 함께 교실로 들어온 레온하르트는 뭐라 말 붙일 새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흘끔 옆을 보자 정직하게 앞만 바라보며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스승의 눈을 피해 그녀의 팔꿈치를 툭 건들고 입 모양으로 뭐라 말을 걸어보려던 레온하르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수업에 집중하는 척 앞을 바라봤다.
엘리자베스 또한 무척 심란해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레온하르트와 함께 교실로 향하는 대신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혼자 교실로 가는 길은 유난히 길고 외로웠다. 여름 아침의 햇살은 충분히 따스했으나 아직 그늘까지 더운 기운을 보낼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한 엘리자베스는 남몰래 레온하르트의 자리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종종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면 신경질적인 얼굴로 책상 위에 펜을 톡톡 두드려 대는 버릇 덕분에 그의 자리에 검은 잉크가 스며든 자국이 멍처럼 드문 드문 남아 있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아, 일리시스,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늘은 혼자 와 봤어요.”
일리시스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얼마 안 가 레온하르트가 스승과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스승은 좀처럼 쉬었다 하자는 말을 하지 않고 열띤 강의를 이어갔다.
덕분에 휴식 시간 동안 세 사람은 간단한 다과로 부족한 당분을 섭취하느라 아무 말 없이 초콜릿만 우적거렸다.
일리시스는 슬쩍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진도와 어색한 분위기에 지쳐 초콜릿에 박힌 견과류만 오도독 씹고 있었다.
그들의 사정을 알 턱이 없는 스승은 모처럼 황태자 전하께서 수업에 집중을 하신다며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일리시스.”
짐을 챙기며 오늘 레이디 엘리자베스에겐 어느 부분을 되짚어 줘야 할지 생각하고 있던 일리시스는 황태자가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랐다.
“네, 네. 황태자 전하.”
“...어제 일은 정식으로 사과하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어야 하는데... 앞으론 주의하지. 그리고 그대를 리지의 개인 교사로 임명할까 하는데, 괜찮을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리시스 또한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참을성 있게 그가 대답하는 것을 기다려 주는 대신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검술 수련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리지, 개인 교습은 오늘부터 시작이야. 일리시스, 레이디 엘리자베스를 잘 부탁한다.”
“자, 잠깐만. 레온! 레온!"
황급히 엘리자베스가 교실을 뛰쳐나갔지만 레온하르트는 이미 복도 끝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는 그녀가 원하는 일을 들어주었다.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인데,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단단히 틀어진 무언가를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무언가'의 정체조차 모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보단 훨씬 간단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기로 결심했다.
“아이고 전하!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덕분에 오늘도 죽어 나가는 건 황실 근위대장 알베르트였다.
매일 저녁 퇴근길에 어린아이 용품을 한 아름 사 가기로 유명한 기사는 쉴 틈을 주지 않고 퍼부어지는 소드 마스터의 검 앞에서 죽는소리를 내며 필사적으로 버텨야 했다.
이미 그를 상대하다 나가떨어진 기사들만 열 명이 넘었다.
이쯤 되면 이건 어린애가 화풀이를 한답시고 죄 없는 베개를 향해 마구 주먹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들은 물론 알베르트 본인은 폭신폭신한 솜이 가득한 베개가 아니었고, 그래서 그들을 향해 화풀이를 하는 몸만 자란 황태자 또한 서서히 지쳐 가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알베르트를 위로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일은 무슨....”
“그렇지 않고서야 죄 없는 기사들을 열한 명이나 이 모양으로 만드실 이유가 없어 보이셔서 말입니다.”
알베르트는 물 한 병을 반은 마시고, 반은 머리에 들이부으며 숨을 헐떡였다.
레온하르트는 그가 새로 건네준 물을 몇 모금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한숨만 다시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작정 담고 있기보단 잠시 밖으로 내려놓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음, 경의 말에는 동감해. 하지만 경에게 내려놓을 문제는 아니야.”
"예?"
“경이 '과연 내 고민을 듣고 함께 해답을 찾을 만한 인재인가?'를 본인에게 물어보는 건 실례잖나.”
알베르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레온하르트를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빤히 노려봤다.
의자를 거꾸로 돌려 걸터앉아 테이블 위로 턱을 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한숨만 내쉬었다.
검술 수련은 끝난 지 오래였지만 예상대로 엘리자베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리지에게 가 봐야겠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미리 술이라도 준비해 놓을까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이며 손만 내저었다.
엘리자베스는 고민했다.
눈앞의 새로운 개인 교사는 무척 똑똑하고, 남을 이해시키는 재주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식이 아닌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박할까?
엘리자베스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일리시스에게 질문했다.
"일리시스.”
“말씀하세요, 레이디 엘리자베스."
“리지라고 불러 주세요. 음... 만약 일리시스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하겠어요?"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은 일리시스는 눈만 깜빡였다.
“그 시간 동안 저는 레온을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막 엘리자베스와 일리시스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발견하고 문을 열려던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멈칫했다.
“좋아하셔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좋아해야 합니다? 정말로 좋든, 싫든.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레온하르트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왜, 왜 하필 이럴 때 내 이름을 줄여 불러 주지 않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것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