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꽃을 부르는 먹구름(3)
계집애가 이런 건 배워서 어디에 쓴다고.
너무 똑똑한 여자는 오히려 미움받는 법이야.
하지만 너무 무식한 계집은 천박한 법이지.
엘리자베스는 난로 속으로 던져져 타들어 가는 책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대꾸하되 그에 반론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 로 얄팍한 깊이의 지식.
그녀에게 허락된 지식은 딱 거기까지였다.
공작부인이 가져다 놓은 책은 몇 페이지 어느 줄에 어떤 오타가 있는지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로 그녀의 학구열을 충족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늘 지식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만큼 엘리자베스는 황궁에서 매일 수업을 듣는 일이 즐거웠다.
모르는 것을 새로 알게 된다는 것은 뿌듯하고 또 보람찬 일이었다.
황궁 도서관에는 평생 읽으려 해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많은 책이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가정교사는 물론 시계탑의 미미르는 그녀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의 말과 달리 그녀가 시험에서 레온하르트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그였다.
소식을 들은 황제와 황후 또한 그녀에게 어째서 황태자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그의 기를 죽이느냐 책망하는 대신 오히려 새로운 책을 선물하며 칭찬했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신 사람처럼 엘리자베스는 더욱 깊은 지식을 갈구했다.
공작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황궁과 시계탑이라면 가능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흐르고 엘리자베스는 일리시스를 만났다.
실제로 마주한 일리시스가 가진 지식의 깊이는 천재라는 말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외국어와 정치, 철학 같은 과목도 그는 마치 어린애가 장난감을 다루듯 대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옆에서 매일 그녀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어느 황태자 전하에게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옆 얼굴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엘리자베스는 책상 앞에 앉아 두꺼운 참고서와 노트를 펼쳤다.
요 최근 밤낮 가리지 않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던 문제를 오늘만큼은 기필코 해결하고야 말리라.
그런 각오로 펜을 들어 올린 엘리자베스는 펜 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물어뜯었지만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하고 두꺼운 책 위로 한숨만 폭 내쉬었다.
장소를 바꾸면 조금 더 집중이 잘 될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괜히 따사로운 볕이 넉넉하게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창과 등 뒤에서 그런 어려운 문제는 집어던지고 어서 나에게 오라며 팔을 벌리고 있는 침대를 탓하며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연히 일리시스를 마주쳤을 때, 엘리자베스는 시계탑으로 가지 못해 쩔쩔매다 자신을 만났던 순간 일리시스가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어, 일리시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받은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일리시스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엘리자베스는 푸념을 하듯 책을 펼쳐보이며 사정을 설명했다.
“이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레온이 그랬어요. 일리시스라면 가르쳐 줄 거라고, 안 될... 까요....?"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일리시스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는 걸 보며 엘리자베스는 괜히 말했다고 속으로 후회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했다.
“...일리시스가 천재인 이유는 단순히 어려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해 줄 수 있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일리시스, 부탁해도 될까요?”
그리고 기대를 거의 내려놓았던 대답이 일리시스에게서 튀어나왔다.
“무... 물론이죠!”
그날부터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검술 수련이 끝나는 시간을 기다릴 겸 일리시스와 함께 둘만의 보충 수업을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말대로 일리시스는 무척 훌륭한 강사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심지어 스승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다음 수업 시간까지 알아 오겠노라 약속한 부분을 일리시스는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책을 읽어 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부분은 함정이에요. 사실 이렇게... 계산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복잡하게 한 번 꼬아 놓은 거죠.”
엘리자베스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일리시스의 옆모습을 보며 남몰래 미소지었다.
동갑이라고 했던가? 수줍음 많고 소심한 그의 성격 탓일까, 아직 솜털이 남아 있는 볼이 아직 어리게만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수업에 집중할 때의 일리시스는 바위를 깎아 놓은 듯 레온하르트보다 더 진중하고 의젓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일리시스의 모습을 혼자 알고 있다는 건 의외로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이 시간이 좋았다.
일리시스와 함께 공부하는 것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종종 레온하르트를 마중 가는 것조차 잊을 만큼 그 시간이 소중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시간도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인 모양이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레온하르트가 등장하더니 일리시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외국어 문장을 몇 번이나 더듬고, 수식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를 틀리는 바람에 공식 하나를 완전히 엉망으로 증명하질 않나.
결국엔 너무 긴장한 나머지 탈진해버린 몸을 둘러업고 달려가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일리시스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있어서 불편했냐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차마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 * *
“그날 일리시스에게 왜 그랬던 거야?"
“응?”
레온하르트와 함께 여름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고개만 옆으로 돌리며 슬쩍 떠보듯 질문했다.
“그 애가 얼마나 심약한지 레온이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그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서 일리시스에게 부담을 주면....”
“....황태자인 내가 어딜 가든 내 집에서 움직이는 거니 내 마음이지.”
이게 아닌데.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마음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일리시스에게 사과해.”
“...기사단 수련장에 오는 일은 아예 그만뒀어?"
"그... 그건... 나, 나도 다리가 있는데 어디서 뭘 하든 내 마음이지?"
“그 녀석이랑 공부하는 게 그렇게 좋아?"
안 돼, 더 이상은 그만.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일그러진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등 너머로 엘리자베스의 긴 머리칼이 사락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하는 대답보다 더 잔인한 긍정에 레온하르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네가 좋다면 뭐... 그러면 됐어. 일스에겐 정식으로 사과할 거고, 원한다면 네 개인 교사로 붙여 줄게. 그러면 될까?"
엘리자베스는 지금이라도 고개를 흔들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이번에도 그녀의 의사를 배반했다.
가까스로 몸을 돌려 레온하르트와 얼굴을 마주한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표정을 보며 한참 입만 달싹였다.
“...레온,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뭘?"
“꼭... 꼭 자기 물건을 억지로 내놓는 사람처럼 보여....”
이젠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고 비유하는 것도 가능해졌네? 리지, 다행이다.
레온하르트는 억지로 즐거운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며 대꾸했다.
“내가 질투라도 한다는 말이야? 리지, 우린 이미 약혼까지 한 사이야. 그런데 누굴 질투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어? 그것도 내가, 이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가 고작 약혼녀가 다른 사람이랑 단둘이 수업 좀 했다고 거기에 질투를 느껴? 나를 얼마나 못난 사람으로 생각했던 거야?”
"그런... 그런 건 아니야! 아닌데....”
"네가 그런 식으로 날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냥... 모르겠다. 사춘기가 다시 오려나? 리지, 그냥 이것만은 알아줘. 아직 데뷔탕트 전이니 시간은 있어.”
“시간...?"
“네가 정말로 원한다면 나는 너를 보내 줄 거야.”
"보내다니, 어딜? 왜?"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철렁였다.
약혼녀의 심장을 땅 아래 가장 깊은 골짜기로 처박아 놓은 주제에 레온하르트는 할 말은 모두 마쳤다는 양 홀가분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잘 생각해 봐. 레이디 엘리자베스."
“레온, 레온? 갑자기 왜 그래, 잠깐 멈춰봐! 레온하르트! 황태자 전하!"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레온하르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서 레온하르트의 처소 문은 닫혀 버렸다. 시녀들의 눈이 있는 한 함부로 그의 문을 두드리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한편 레온하르트는 바닥재가 카펫이 아닌 대리석이라 엘리자베스의 방보다 시원하다는 이유로 며칠 전부터 그의 방에 늘어져 있던 베일리의 곁으로 다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머저리, 얼간이, 이... 이....”
누군가 들었다면 아연실색하며 황태자로서의 위신과 명예와 온갖 이유를 들어 단단히 훈계하고도 남아 결국 황제의 귀에 들어갈 수준의 욕설을 자신에게 퍼부으며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분 좋게 단잠에 빠져 있다 익숙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들었던 베일리는 주인의 친구가 새까만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그의 무릎을 촉촉한 까만 코로 툭 건드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까만 말을 하는 건 좋지 않아.’
그 뜻이 통했는지 주인의 친구는 새까만 말을 쏟아 내던 것을 멈추고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베일리는 가만히 있어도 절로 혀를 길게 빼물게 되는 이런 날씨에 감히 자신을 끌어안은 괘씸한 친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공중에 슬픈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얌전히 있기로 마음먹었다.
“너는 내 거다, 내 사람이다. 차라리 그렇게 대놓고 질투를 하든가... 아니지, 그런 말 할 자격도 없지. 망할... 답답해. 베일리, 네가 보기에도 내가 또 멍청한 짓을 했지? 하지만...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 대가가 이런 거라면 그 또한 달게 받아야 하는데... 그게 나에게 허락 된 유일한 일인데... 답답해. 나는 영영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거고, 그 죄책감에 어느 날 목이 막혀 죽을지도 모르겠군. 베일리... 베일리... 이런 식으로 시곗바늘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아 가는 걸까? 나는 리지를...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두려워. 처음으로 확신이 서질 않아.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은... 오만했어. 만용을 부렸어.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유일하게 원하는 건... 내가 절대로 욕심내서도 안 되고, 욕심낼 자격도 없는 거였는데....”
베일리는 눅눅하고 파란 물기로 젖은 레온하르트의 눈가를 핥아 주었다.
인간의 말을 이해할 줄 모르는 개로서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위로에 레온하르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