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꽃을 부르는 먹구름(2)
세상의 사내들을 크게 육식계, 초식계, 그리고 쓰레기로 나눈다고 한다면 일리시스는 갓 돋아난 토끼풀이나 야금야금 뜯어 먹는 것이 어울리는 토끼였다.
검 한 자루 쥘 줄 모르는 그를 보며 어디 가서 사내 노릇은 하겠냐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일리시스는 검보다 날카로운 펜촉으로 10살이란 어린 나이에 문자 그대로 학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등극했다.
그에겐 선택지가 아주 많았다. 제국의 모든 고급 교육 기관이 그의 방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료를 면제해 줄 터이니 학생으로 와 달라는 러브 콜은 그가 나이를 먹으며 점점 더 천재로서 두각을 나타내자 어느새 정식 교수 초빙 제안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그는 황궁으로 향했다.
페리안 후작가의 영식인 그가 읽지 못했던 책은 황궁 금서 보관소에 봉인된 책이 유일했다.
마침 황태자와 그의 약혼녀의 말동무를 구한다는 소식이 페리안 후작의 귀에도 들어온 참이었다.
'하지만 너는 몸도 약하고 황태자 전하의 친구 되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 생각도 하지 말거라.'
그 말에 일리시스는 당장 방으로 달려가 제 이름 앞으로 온 편지 무더기 속에서 유일하게 따로 보관해 두었던 낡은 편지를 하나를 가져왔다.
발신인은 시계탑의 현자 미미스 브룬느. 수신인은 일리시스.
이런 건 대체 언제 받은 거냐며 페리안 후작은 탄식했다.
그러나 아들의 넘치는 학구열을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었던지라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리시스 엘디르얀 폰 페리안은 황궁으로 향했다.
그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시계탑이었다.
그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지혜롭고, 책 밖의 지식에 해박한 스승님을 드디어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찾아간 시계탑은 호수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 위에 해시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어떤 마법적 장치가 있는 걸까? 아니면 이 또한 도전자의 지식을 시험하는 문제인 건가?
호수 주변을 빙빙 돌아보며 한참을 고심했지만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건 그냥 평범하고 아무런 마법적 장치도 없으며 지식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는 더더욱 아닌, 한마디로 배가 있어야 시계탑으로 갈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호수다.'였다.
그럼 이제 배를 구해야 하는데, 배는 어디서 구하지?
시계탑으로 평범한 사람이 출입하려면 미리 다시 수속을 밟아야 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일리시스는 스승에게 질문할 거리로 가득한 두꺼운 책을 안고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던 차에 등 뒤에서 은빛 종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을 기점으로 지독한 무신론자였던 일리시스는 신의 존재를 약간이나마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날 그를 시계탑으로, 그것도 곧바로 미미스 브룬느의 하나뿐인 손녀인 미미르의 방으로 보내준 소녀의 등 뒤에서 빛나던 날개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눈의 착각이거나, 마침 태양을 등지고 있던 그녀의 등 뒤로 이리저리 하얀 후광이 팔을 뻗었기 때문이거나, 시계탑으로 보내 주겠다는 상냥한 말이 마침 처해 있던 곤란한 상황과 맞물려 그런 식으로 보였던 가능성이 가장 크고,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검 대신 펜과 종이만 쥐여 준다면 특유의 날카로운 화법으로 마왕도 물리칠 거란 농담이 별명처럼 따라다닌다 한들 그 역시 소년이었다.
일리시스는 그녀의 정체가 황태자의 약혼녀란 것을 알게 된 뒤로도 한동안 남몰래 그녀를 천사라고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묻기를 주저하지 않는 용기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제 것으로 만들 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어 결국 제 것으로 만들고야 마는 근성은 어린 시절 열에 들뜬 상태로도 책에 파묻혀 간단한 방정식을 풀며 휴식을 취하던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리시스는 그녀의 상냥한 첫인상과 학구열에 불타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은근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탐내선 안 되는 귀한 사람이었다. 이미 약혼식까지 올린 레이디에게 함부로 행동했다간 그의 명예는 물론 엘리자베스의 명예가 더럽혀진다.
일리시스는 그녀를 정식으로 마주한 순간 이미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그에 맞는 결론까지 내린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의 예상에 전혀 없는 사건이었다.
“저어, 일리시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일리시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황태자와 레이디 엘리자베스 사이를 의심하는 이가 전무한 황실이라 해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무... 무슨 일이십니까...?"
'미쳤어, 일리시스? 네가 지금 해야하는 일은 지금은 곤란하니 서로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증인과 알리바이를 성립할 수 있는 장소에서 만나자고 돌려 말하는 거야!'
그러나 그놈의 호감이 뭐라고, 그날의 친절함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그걸 빌미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라며 마음속에서 누군가 꼬드기고 있었다.
“이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레온이 그랬어요. 일리시스라면 가르쳐 줄 거라고, 안 될... 까요...?"
황태자 전하께서?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왜 굳이 나를? 일리시스는 빨간 눈만 깜빡였다.
엘리자베스가 내민 부분은 확실히 그녀가 수업 시간 내내 몇 번이고 질문하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던 내용이었다.
“...일리시스가 천재인 이유는 단순히 어려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해 줄 수 있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일리시스, 부탁해도 될까요?"
“무... 물론이죠!”
네가 정녕 미쳤구나! 일리시스는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걱정으로 가득한 조막만 한 얼굴이 순식간에 꽃처럼 활짝 피어 웃는 모습을 보자 그런 걱정은 지우개로 지워 낸 듯 하얗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일리시스와 엘리자베스는 수업이 끝난 뒤로도 따로 특별 보충 수업을 시작했다.
일리시스는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었고, 엘리자베스는 배우는 데 재능이 있었다.
황태자의 시간을 뺏을 수 없으니 둘 만의 보충 수업은 황실 기사단 수련장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서, 레온하르트의 검술 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이뤄졌다.
엘리자베스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미안함과 미련,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보내 주었고 칠판을 닦아내며 수업 시간 내내 상기된 얼굴로 자신만 바라보던 엘리자베스의 얼굴도 함께 지워 내야했다.
* * *
"너 요즘 짝사랑하니?"
“예, 예?"
“미쳤구나.”
“미미르 님...!”
미미르는 마법의 솥을 휘휘 젓던 손을 멈추고 질책하는 눈빛으로 일리시스를 노려봤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일리시스는 그 눈빛 앞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아니 전부 털어놓아야 했다.
그에 대한 미미르의 감상은 간단했다.
“축하해. 너도 이제 정서적인 면에서는 충분한 마법사라고 할 수 있겠어.”
“제가 미쳤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차라리 길 가던 황실 시녀를 보고 두근거렸다고 하면 오히려 응원이라도 해 주겠다. 그런데, 그 상대가 누구라고?"
“미미르 님....”
"알아, 다 알아. 너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을 거란 거. 우선 가장 간단한 거리 벌리기부터 해 볼까? 네 그 소심한 성격에 먼저 다가갈 일도 없는데 물러서긴 뭘 물러선다고, 그럼 리지 그 아이가 부탁하는 일을 거절하는 식으로 나가는 건 어떨까? 이미 그 아이에게 홀딱 빠진(일리시스는 그건 아니라고 있는 힘껏 반박했지만 미미르는 코웃음 한 번으로 무시했다.) 페리안 공자께서 레이디의 부탁을 거절할 용기가 있었다면 그 용기로 차라리 황태자와 직접 맞설... 가만있자, 이거 재밌는데?"
“저는 전혀 재밌지 않습니다!"
"알아, 알아. 그러니 진정하고 좀 있어 봐.”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당황한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감정에 대한 조언과 상담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미르에게, 마녀에게, 마법을 다루는 사람에게 부탁하다니!
일리시스는 열다섯 평생 다시 없을 어리석은 결정을 후회했다.
“미미르 님, 제발 부탁이니....”
"레온에게 말하지 마라? 황제 폐하? 황후 마마? 아니면 리지 본인에게? 그것도 아니면 페리안 영지로 편지를 보내서....”
"미미르 님!”
"아, 알았어. 알았으니 그런 표정 짓지 마. 전혀 소용없으니까 말이야."
일리시스는 미미르를 마주한 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너, 매주 여기 와서 나 좀 도와줘. 그럼 얌전히 입 다물고 있을게.”
"네?"
이럴 리 없었다. 겨우 그런 조건으로 저 순화해서 장난기, 심하게 말하면 고약한 짓을 일삼기 일쑤인 마녀님이 얌전히 입을 다물 리 없었다. 아!
“제가... 제 무덤을 팠군요....”
"훌륭해 일리시스! 역시 너는 마법을 배우지 못해서 다행이야. 그럼 나는 너와 경쟁해야 했을 거고, 어느 날 실험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를 개구리로 만들고 그대로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은데?"
“미미르 님, 제발....”
"아이, 알았어. 하여튼 경고하는데 리지에게 너무 다가가지 마. 그 아이는... 맑고 순수하니까. 황태자의 색으로 물들 운명인데 괜히 네가 섞이면 좋을 것 없어.”
“...미래를 보셨습니까?"
"글쎄다. 그게 미래인지 과거인진 모르겠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도 몰라. 아무튼 알아서 잘 조절해. 질투하는 황태자의 모습은 조금 궁금하지만 그 질투의 대상이 너여서 저 어디 국경 변방 지대로 쫓겨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제가 여기에 온 이후 가장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어쭈, 이제 너도 마법사와 대화하는 법을 익혔다 이거야?"
미미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일리시스를 응시했다.
일리시스는 살짝 침울한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묵묵히 견뎌 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세술도 지능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저는... 그래요. 어린 나이에 객기를 부려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황태자 전하께도 면목 없는 짓을 하느니 얌전히 제 일을 하겠습니다.”
“옳지, 옳지, 착하다. 정 속상하면 나한테 와. 아예 감정을 지우는 약을 만들어 줄게.”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미미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문은 조금 전까지 그가 홀로 앉아 엘리자베스가 두고 간 책이며 펜을 정리하고 있던 도서관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도 레이디 엘리자베스와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즐거웠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즐거운 시간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모양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찾아온 건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이 나라의 황제 되실 황태자 전하이시자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하나뿐인 약혼자이며 그녀의 애정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조금 지나치다 싶을만큼 호감을 보이고 있었으나 만일 이 감정을 들킨다면 그 호감은 곧바로 하늘과 땅이 뒤집히듯 바닥으로 처박힐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