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꽃을 부르는 먹구름(1)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는 검술 수련을 마칠 때면 늘 먼저 찾아오던 엘리자베스가 보이지 않자 표정을 찌푸렸다.
벌써 며칠째였다.
처음엔 그저 다른 일이 있겠거니, 데뷔탕트를 앞두고 준비할 일이 많아서 오지 못하는 거라 막연히 짐작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일주일이 가깝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레온하르트는 물론 기사단원들 또한 슬슬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두 분, 혹시 싸우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기사단원들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싸움은 무슨, 바로 엊그제만 해도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혼쭐이 났는데.
보는 사람이 있고 없는 차이가 이렇게 크던가?
레온하르트는 괜히 툴툴거리며 허공에 검을 휘두르다 미처 검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애먼 땅바닥만 다시 갈라놓았다.
“...미안하네.”
갈라진 바닥을 다시 원상복구하는 것은 결국 기사들의 몫이었다.
알베르트는 더 이상 기사들이 삽질하지 않도록 점잖지만 단호한 태도로 그를 대련장에서 내보냈다.
레온하르트는 머쓱한 표정으로 황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직접 엘리자베스를 찾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혼자 있어 본 적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그의 곁에는 늘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어느새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전까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모처럼 홀로 황궁 정원을 거닐던 레온하르트는 막 오후 세 시를 향해 달려가는 여름 햇살이 산책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늘진 건물로 향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말인데요....”
자신감 넘치는 낭랑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린 레온하르트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눈에 보이는 아무 건물로 들어왔는데 마침 도서관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냥 도서관이 아닌 일리시스가 있는 도서관.
“일스, 안에 있어?"
“레온?"
"황태자 전하!”
서재의 문을 양손으로 가볍게 밀어젖히자 칠판 앞에서 분필과 긴 막대기를 든 일리시스가 가장 먼저 토끼처럼 놀란 표정으로 맞아 주었다.
"엘리자베스?"
네가 왜 여기 있어?
일리시스의 강의를 듣고 있던 사람은 시계탑의 마법사가 아닌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기 시작한 일리시스를 진정시키며 레온하르트는 냉큼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칠판에 적힌 내용을 보아하니 어제 엘리자베스가 어려워하던 부분을 다시 설명해 주고 있었나보다.
일리시스는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소금 기둥처럼 멍하니 굳어 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한 얼굴로 펜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꼭 내가 좋았던 분위기를 망친 것 같잖아?'
레온하르트는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만 번갈아 쳐다봤다.
"가... 강의하는 일스 네 목소리가 듣기 좋던데, 계속하지 않고.”
레온하르트의 말에 일리시스는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이 같은... 경우네는... 아니, 경우에는....”
맙소사,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필요하다면 황제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비틀리고 날카롭게 배배 꼬인 독설을 숨도 쉬지 않고 쏘아붙이던 책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리시스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쩔쩔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하면 결과가... 어?"
“일리시스, 저기 숫자 하나 틀린 것 같은데....”
“마, 맙소사! 죄송, 죄송합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황태자 전하! 이런 부족한 솜씨로 감히 레이디의 스승을 자청 한죄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그러나 일리시스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레온하르트가 헛기침으로 그의 강의를 멈추게 했다.
"일스, 나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계속하면 돼.”
“하지만 전하....”
“레온 말이 맞아. 레온은 어차피 봐도 이해 못 하잖아?"
"엘리자베스....”
레온하르트는 곤혹스러운 척 일리시스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칠판 가득 쓰여 있는 공식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분필을 레온하르트에게 넘기고 도망치고 싶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일리시스를 보며 그는 갈등했다.
여기서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준다면 조금 더 호감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레온하르트는 문득 '왜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호감을 사야 하지?'라며 자문했다.
정확하게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호감을 살 자격이 있나?'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그럼... 다시... 진행하겠... 습니다.”
누가 건드리면 아주 뻥 터져 버릴 것 같은데, 저걸 어쩌면 좋나.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 위로 비딱하게 턱을 기댔다.
어딜 봐도 모범적인 학생인 엘리자베스와 달리 불량 학생의 표본 같은 태도의 황태자 앞에서 일리시스는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마침 황태자 전하의 검술 수련 시간이라며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복습을 도와 달라는 말에 황궁 도서관으로 온 것까진 좋았다.
그녀는 훌륭한 학생이었고, 가르치는 대로 잘 따라오는 학생 앞에서 일리시스는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고 공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처럼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가 등장했다.
늘 수업 시간에 엘리자베스의 얼굴만 쳐다본다며 혼이 나는 것과 달리 진짜 레온하르트는 그와 정치를 논할 만큼 지혜롭고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막 검술 수련을 마치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차림새로 나타났다.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황태자 전하의 팔은 자신과 달리 제법 모양이 뚜렷하게 잡힌 근육으로 꽉 짜여 있었다.
책 세 권을 옮기는 일이 고작인 얇고 가느다란 팔과 금방이라도 무거운 검을 깃펜처럼 가볍게 다룰 것 같은 든든한 팔.
일리시스는 괜히 부러운 마음에 소매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어 내는 척 자신의 팔을 살펴보았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냉큼 자리를 차지해 앉은 레온하르트는 일리시스에게 눈짓으로 하던 일을 마저 하라고 지시했다.
일리시스는 다시 분필을 쥐고 설명하던 공식을 이어 설명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술술 흘러나오던 설명이 그만 뚝 그쳐 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평생 신동, 영재, 천재 소리만 들으며 자란 일리시스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가느다란 시선 앞에서 처음으로 긴장감을 느꼈다.
긴장을 하니 자연히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가듯 작아지고, 멀쩡한 문장은 몇 번을 더듬은 뒤에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간단한 숫자 실수조차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알려 주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일리시스는 그만 울고 싶은 심정으로 칠판만 노려보다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분필을 내려놓았다.
“일스?"
“죄,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잠시만... 잠시만 쉬었다 해도 괜찮을까요?"
“허락은 나 말고 리지에게 받아야지. 리지, 괜찮겠어?"
"나야 상관없는데... 시원한 거라도 먹고 할까?"
“그게 좋겠다. 일스, 너무 긴장하지마. 내가 장담하는데 너는....”
일리시스의 빨간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긴장이 풀린 붉은 눈매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너는 역사서에 길이 남을 희대의 명 재상이 될 테니까.”
이런 식으로 미래를 말해도 좋은가 하는 고민이 아주 잠깐 스쳤다.
그래도 친구의 자신감 회복을 위해서라면야, 그리고 어디까지나 '장담하는데'라고 했다.
확정된 미래를 말하는 게 아닌 '그럴 수도 있다'라고 가정하는 문장이니 딱히 큰일 없겠지.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며 레온하르트는 도서관을 담당하는 시녀에게 차가운 간식거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곱게 갈아 낸 얼음 위로 빛깔이 선명한 과일 시럽을 듬뿍 얹고 갓 딴 민트를 올려 장식한 빙수 그릇을 앞두고 일리시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 역시 실망하셨겠지? 고작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레온하르트는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도 모르고 땅만 쳐다보는 일리시스를 보며 속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차가운 것을 먹어 머리가 아픈 척 이마를 짚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만 다정하고 부드러울 뿐 다른 사람들에겐 황태자로서의 위엄을 어느 정도 내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엘리자베스는 괜히 즐거운 복습 시간을 방해한 레온하르트를 탓했다.
반쯤 녹은 얼음물을 한 수저 뜬 일리시스는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며 이번에야말로 다시 자신 있게 엘리자베스를 가르치자고 다짐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일리시스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가능한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집중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친우의 모습에 섭섭함을 느끼는 한편 대체 어떻게 하면 저 사자 앞의 토끼 같은 친구가 자신을 허물없이 대해 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 뭔가 기회가 있어서 친해졌던 것 같은데... 멱살 잡고 드잡이질이라도 했었나?'
그러나 이미 사라질 대로 사라진 기억이 이제 와서 떠오를 리 없었다.
'기회가 없다면 만들면 되지!'
레온하르트는 시선은 일리시스에게 고정한 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의 지력은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고, 그런 지력을 가진 이와 친하게 지내서 나쁠 이유는 없었으니깐.
'이런 속물적인 이유로 친해진다고 하면 나라도 싫다 하겠지만.....'
레온하르트는 손끝으로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자괴감에 빠졌다.
일리시스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듯 빤히 쳐다보는 황태자의 시선에 울음을 꾹 참고 묵묵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그의 노력이 가상하여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장면이었다.
어떻게 설명을 시작하고 끝냈는지도 모르게 엘리자베스는 복습을 끝냈다.
일리시스는 그대로 탈진하여 주저앉고 싶은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털푸덕, 책상 위로 엎어져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기겁을 하며 그의 이마에 열이 오른 건 아닌지 살피고 - 불덩이였다 - 그를 둘러업더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냅다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잠시 탈진한 것일 뿐 다른 병은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레온하르트는 병실을 나설 수 있었다.
“일스가... 많이 긴장했나 봐.”
나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자책감이 가득한 레온하르트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그 말에 동의했다.
“내가 있으면 일스가 불편해할까?"
"음...."
차마 대놓고 그렇다고 말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말을 아꼈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편안하고 즐거웠던 분위기는 그의 등장과 함께 폭풍우에 엉망이 된 꽃밭처럼 망가져버렸다.
엘리자베스의 침묵 속에서 답을 읽어 낸 레온하르트는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만 뒤척거렸다.
침대 시트 아래에 작은 콩알 하나가 들어간 듯 눕는 자리마다 불편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