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레몬맛 왈츠(5)
탕, 타앙-
은빛 탄환이 과녁에서 한참 비껴간 곳을 통과하고 지나갔다.
은빛 폭포수처럼 긴 머리칼을 하나로 높이 묶고 바지까지 입은 엘리자베스는 평소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던 레온하르트는 처음 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어마마마께 사격도 배운댔지?"
“응. 아직 서툴지만... 언젠가 나 자신은 물론 누군가를 지켜 주고 싶어.”
“소드 마스터인 나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는 거야?"
작은 농담 하나에도 엘리자베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그런 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무기보다는 책을, 책보다는 차라리 깃털을 쥐는 쪽이 어울리는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었다.
“처음 다뤄 본 총이 무섭진 않았어?"
엘리자베스는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마주한 총은 시커멓고, 무겁고, 쇠 냄새가 진동하는 녀석이었다.
황후께서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신 것은 그런 새카만 쇳덩어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이었다.
총을 두려워하는 사용자는 절대 누군가를 살리는 총은 사용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무조건 총을 다룰 때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말만은 철저히 기억했다.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과녁 앞으로 총을 겨눈 엘리자베스는 벌벌 떨고 있었다.
황후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총을 두려워하지 말렴. 네가 쏘는 건 누군가를 죽이는 총이 아니라 살리는 총이어야 해”
“하, 하지만... 생각보다 무겁고, 또...."
"까딱 잘못하면 여기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
"황후마마!"
엘리자베스는 너무 놀라 순간 손에서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러나 황후는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총을 쥘 것을 명령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아가는 여기 서 있는 거잖니?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렴. 총을 쏠 때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총을 쥐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황후께서 먼저 시범을 보여 주신 덕분에 총소리에 놀라 뒤로 주저앉는 흉한 꼴만은 면했다.
그러나 실제로 제 손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를 마주하자 엘리자베스는 무릎에서 힘이 빠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견뎌야 했다.
총과 익숙해진다는 일은 각오했던 것보다 어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오늘은 그간의 성과를 레온하르트가 직접 보러 온 날이었다.
과녁 정중앙을 맞춰 의기양양하게 자랑하고 싶은데, 조금 전부터 그녀의 총알은 과녁에서 한참 벗어나 엉뚱한 곳만 꿰뚫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레온하르트가 사격장으로 내려왔다.
"리지.”
"레, 레온! 위험하니까 여긴 오면 안... 되는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평소대로 하면 돼. 너무 긴장한 거 아냐?"
“내가 긴장은 무슨! 그냥 바람을 못 읽어서 그런 거야.”
“총 끝이 떨리는 게 보였는데?"
“....시력 좋아서 좋겠네!"
“그러지 말고 잠깐, 잠깐만 실례할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와 황후의 양해를 구하더니 대뜸 그녀 뒤에 서서 팔을 앞으로 뻗었다.
"총 쥐어 봐.”
지금? 이런 모습으로?
레온하르트의 든든하고 넓은 가슴이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추기에도 급급한 엘리자베스에게 총을 쥐고 들어 올릴 여유는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세부터 잡아 봐, 응?"
잔뜩 긴장한 그녀와 달리 레온하르트는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하고 다정한 말투였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대로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숨소리에 맞춰 함께 호흡했다.
근력이 부족한 탓인가? 그녀의 총구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 위로 레온하르트의 손이 겹쳐졌다.
이어서 방아쇠 위로 두 개의 손가락이 걸쳐졌다.
달달 떨리던 총구는 마치 허공에서 고정된 듯 과녁 정중앙을 겨냥하고 있었다.
“셋 세면 쏘는 거야, 하나. 둘....”
셋.
레온하르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반동으로 뒤로 살짝 밀려난 엘리자베스를 받쳐 준 레온하르트는 과녁 정중앙을 뚫고 지나간 흔적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네가 쏜 거야, 리지.”
“가... 같이 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릴. 나는 그냥 네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까지만 도와줬을 뿐인걸?"
겨눈 것도 너, 방아쇠를 당긴 것도 너, 나는 그저 네가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조금 도와줬을 뿐이야.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살짝 감격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내가 등대라고 네가 그랬지?"
“그랬... 었지.”
“나는 네가 갈 길을 비춰 줄 뿐이야. 배를 어디로 몰지 결정하는 건 온전히 리지 네 몫이고.”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뒤로 물러났다.
"다시 한번 쏴 보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총을 쥐었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과녁에 집중하고, 다시 탕!
비록 정중앙은 아니지만 동그란 과녁 안에 적중했다.
엘리자베스는 가장 먼저 총부터 내려 놓고 뒤로 돌아 폴짝폴짝 제자리에서 뛰며 기뻐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럴 줄 알았다며 엘리자베스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 * *
사격 연습 뒤엔 데뷔탕트 드레스 가봉이 예정되어 있었다.
재단사는 요정과 천사 중에서 어떤 테마를 잡아야 할지 갈등하고 있었다.
두 벌 모두 한 가지 테마로 디자인할까, 그렇지만 두 테마 모두 어느 하나를 포기하기엔 너무 매력적인 주제였다.
"황실 보석을 새로 가공하고 싶다고 했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셨네. 질 좋은 보석이 쿠션 위에서 잠들어 있는 것보단 드레스 자락에 달거나 새로 목걸이를 만드는 쪽이 보석에게도 더 좋은 일이겠지.”
황실에서 내어 준 보석들을 꼼꼼히 확인하던 재단사는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손바닥만 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상자 속에서 발견한 재단사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믿고 맡겨 주셨으니 응당 그에 맞는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저 보석들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벌써부터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순수한 요정 같은데....
재단사는 스케치북을 앞에 두고 고민했다.
역시 처음 등장할 때는 요정보다 천사가 조금 더 격식 있지 않을까? 이제 그녀의 뮤즈도 마냥 어린애는 아니니.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오프닝 댄스는 무조건 천사다! 라고 결정한 뒤였다.
요정, 요정들의 군주, 숲의 주인.
걸음마다 꽃이 피고 하얀 수사슴을 안장도 없이 타며, 원한다면 가장 커다란 나무의 새로 돋은 새순이 되기도 하고, 단단한 바위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흐르는 물이 되기도 하는 제멋대로인 자연 그 자체.
물, 물이라....
재단사는 눈을 감고 잠시 상상력을 동원했다.
푸른 오건디 위로 하얀 오건디를 겹겹이 얹고, 살짝 드러날 듯 감춰진 발목과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님을 증명하는 굽 높은 구두와....
그녀가 굽 높은 구두를 신으려 할까?
문득 재단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엘리자베스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데뷔탕트에선... 다들 굽 높은 구두를 신을 겁니다. 댄스 타임에는 특히나 더더욱 그렇겠지요. 레이디께서도... 음....”
엘리자베스는 재단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고, 또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배려해 줬는지 알아차리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재단사보다 놀란 건 레온하르트였다.
지금도 엘리자베스가 신고 있는 건 굽이 낮은 메리 제인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 끔찍한 흉기 같은 물건을 신겠다고?
"리지, 정말로 괜찮겠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데뷔탕트에서 누구보다 빛나야 해. 그건 내가 레온의 약혼녀인 이상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의무야.”
“무리할 필요 없어. 누가 그래? 그런 게 의무라고.”
“내가 정했어.”
"리지?"
“내가 그 자리에서 어린애처럼 편한 차림으로 서 있는 다면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볼까? 나만 철없고 부족하다 여기면 얼마든지 레온과 재단사가 걱정하는 것처럼 편한 신발을 신을 거야. 하지만....”
"어마마마께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들은 내가 용서하지 않아.”
“그것도 있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인생에 단 한 번뿐인 데뷔탕트를 위해 있는 힘껏 꾸미고 나올 영애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거야.”
“그런 여자애들을 네가 왜 신경을 써?"
“나는 레온의 약혼녀고, 황태자비가 될 거고, 황후가 될 건데. 그럼 당연히 지금 황후마마께서 그러하시듯 사교계를 이끌어 가야 할 텐데. 밉보여서 좋을 건 없잖아?"
내가 못 살아.
레온하르트는 언제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생각이 깊어졌나 하는 마음과 그런 것 따위 생각하지 말고 제발 몸부터 챙기라고 말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한참을 갈등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높은 구두를 신고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는 제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재단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 다녀오셨다더니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눈앞의 뮤즈는 파도를 두려워 않고 오히려 그를 타고 넘으려는 배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
가만, 파도?
재단사는 스케치북에 높은 구두와 파도를 적고 동그라미와 함께 별까지 그려 놓았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영애의 눈 속에는 바다와 하늘이 모두 담겨 있는 걸 혹시 기억하시나요?"
"네?"
재단사는 맨발로 바닷물 위를 내달리는 파도의 요정을 떠올렸다.
맑은 물은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차가운 구두가 되어 그녀의 발을 감쌌다.
파란 파도를 몸에 휘감은 요정은 하얀 속치마가 전부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물결과 함께 춤을 추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한 요정은 모든 물을 다스리는 군주의 관을 쓰고 있었다.
환영식 때 입었던 푸른 드레스가 대지에서 자라는 푸른 꽃이었다면 데뷔탕트의 드레스는 깊은 산 속의 작은 옹달샘에서 퐁퐁 솟기 시작해 바다로 흐르는 물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맨발로 물웅덩이를 찰박거릴 때 물이 튀는 모습을 형상화한 구두는 유리나 수정으로 만들어 마법을 걸고.
보석을 다듬고 남은 반짝거리는 가루들은 드레스 자락에 붙어 정오의 햇살을 받은 수평선처럼 반짝일 것이다.
얇은 금과 은사슬로 그물 같은 망을 만들어 눈물 모양으로 다듬은 푸른 보석을 달면 은빛 머리카락 위에 물방울이 맺힌 것 같은 효과를 연출할 수 있을거라며 재단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레온하르트는 잔뜩 들떠서 엘리자베스와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고민하는 두 여자 사이에서 슬쩍 물러나 나른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요 며칠 황제는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그에게 간단한 국정 문제를 자문하곤 했다.
어떻게 해야 아직 미숙하지만 황제로서 부족함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모르는 척 돌려 말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은 아니라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피곤했다. 그러나 환한 표정으로 활짝 웃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로는 싹 사라지고 오히려 하루빨리 훌륭한 황제가 되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어쩌면 리지 네가 내 등대일지도 몰라.’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더욱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