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레몬맛 왈츠(4)
"따라서 이러할 경우....”
옆자리의 엘리자베스는 여느 때와 같이 학구열에 반짝이는 눈으로 스승의 말이라면 농담 하나 놓치지 않을 기세로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보면 이미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배우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일리시스가 있었다.
“전하, 황태자 전하?"
스승의 말이 멈추고 두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문제의 답은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아니라 문제 속에 있답니다.”
뒤늦게 아차 하며 책에 집중하는 척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스승은 인자한 미소로 질책을 대신하고 있었다.
“날이 덥군요. 오늘은 이쯤 할까요?"
그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온, 요즘 왜 그렇게 수업에 집중을 못 해?"
"내가? 나는 그냥... 음....”
집중할 때면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리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가서 복습이나 하세요.”
레온하르트가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려던 찰나 그녀가 그의 가슴을 슬쩍 떠밀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교과서를 대신 들어 주며 슬쩍 운을 떼어 보았다.
"도와줄 거야?"
엘리자베스는 반 바퀴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오늘부터 레온하르트의 복습은 엘리자베스가 아닌 일리시스가 담당할 모양이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황후마마께서 찾으십니다.”
"황후마마께서요?"
엘리자베스는 옆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황후와 한 약속을 떠올리고 미안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안해, 레온. 오늘부터 황후마마께 그림을 배우기로 했어.”
레온하르트는 그럼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신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나도 그려 줘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는 얼굴로 황후궁에서 나온 시녀를 따라갔다.
레온하르트는 흘끗 옆을 돌아봤다.
사실 복습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고 싶었던 건데.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어깨를 움찔거리며 바닥만 노려보는 소심한 학우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안내했다.
'이 기회에 이 친구와 조금 친해져 볼까?'
레온하르트는 위기를 기회로 바꿔 놓던 미래의 일리시스를 떠올리며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일리시스에게 현 제국의 국내외 정세와 그에 따른 해결책에 대해 질문했다.
막 교과서를 펼치려던 일리시스가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그에게 '황제와 책사 놀이'를 제안했다.
한편 황후궁에 도착한 엘리자베스를 맞이한 건 물감으로 얼룩덜룩한 앞치마를 입은 황후였다.
연필 깎는 법과 쥐는 방법부터 시작해 엘리자베스는 이제 막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의 엘리자베스는 선 하나를 그을 때도 호흡을 몇 번이나 가다듬어 가며 열중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려 완성된 결과물을 보며 황후는 흐뭇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선이 반듯하게 그어지지 않을까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희미하다 못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예 새하얀 종이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평가하며 황후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차분하고, 침착하고. 조금만 더 대범하게 행동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조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목탄 탓에 수염을 깎지 않은 사내처럼 턱 아래가 거뭇하게 변한 황후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황후는 엘리자베스가 웃는 이유를 금방 알아차리고 그녀의 볼을 손으로 콕 찔렀다.
그러자 그녀의 하얀 볼 위로 까만 꽃잎 자국이 생겼다.
황후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마주 웃었다.
처음엔 선 하나를 긋는 데도 한참 걸리던 그녀가 조금씩 자신감 있게 손을 놀리기 시작하자 황후는 풋사과를 가져왔다.
황후는 코끝을 슬쩍 스치는 상큼한 향기에 씩 웃으며 빛이 잘 드는 창가에 사과를 내려놓았다.
“저 사과를 그려 볼 수 있겠니?"
엘리자베스는 당황했다.
조금 전 완성한 동그란 석고 공과 달리 사과는 울퉁불퉁한 데다 꼭지 부분은 쑥 들어가 있기까지 했다.
“자세히 보면 저것도 하나의 공이란다. 동글동글하고, 가장 빛나는 부분이 있고, 그림자의 가장 어두운 면 옆에는 반사광이 있지. 보이니?"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후의 설명과 함께 침착하게 사과를 관찰했다.
여름 해는 유난히 움직임이 빠른 법이었다.
풋사과를 비추던 빛의 방향이 바뀐 뒤에야 황후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멈추게 했다.
* * *
첫 그림치곤 나쁘지 않았다는 칭찬과 함께 엘리자베스는 품에 풋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베일리는 엘리자베스에게서 풍기는 풋풋하고 상큼한 냄새에 잠시 관심을 보이다 더위에 지쳐 서늘한 대리석 바닥 위로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엘리자베스는 잠시 시계탑으로 가서 베일리만 한 크기의 얼음이라도 부탁해 볼까 고민했다.
문득 황태자의 처소가 유난히 소란스럽다 싶어 엘리자베스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사과 바구니를 챙겨 방을 나섰다.
“레온?"
"이런 시국에 그런 결단은 무모하다니까? 백성들의 뜻을 무시할 생각이야?"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명 제국의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평가는 현시대의 백성들이 아닌 미래 역사가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잔뜩 분노해서 횃불을 들고 황궁을 향하는 건 현시점의 백성들이겠지. 어, 리지? 언제 왔어?"
엘리자베스는 입을 살짝 벌리고 눈만 깜빡였다.
늘 그녀 앞에선 다정하고, 부드럽고, 그녀가 원한다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폭군을 자처할 것만 같던 레온에게 저런 모습도 있었구나.
조금 전까지 진짜 황제 폐하처럼 눈을 번뜩이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사람이 정말 레온하르트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그, 그럼 황태자 전하,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일리시스, 이거 하나 받아요. 황후마마께서 주신 풋사과인데 향이 제법 좋지요?"
조금 전까지 무리해서라도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다시 예산을 짜야 한다며 목에 핏대까지 올리며 주장하던 일리시스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손에 있는 푸른 사과만 번갈아 쳐다봤다.
다시 여느 때와 같이 수줍음 많고 조심스러운 토끼로 돌아온 그는 그녀가 준 사과가 마치 여신이 내린 황금으로 된 사과라도 되는 듯 소중히 품에 안고 방을 나섰다.
“무슨 주제로 그렇게 열띤 토론을 벌인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녀 몰래 바구니 속 사과를 집던 두꺼운 손등을 찰싹 때리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
"어... 그냥 별 이야기 안 했어.”
"내 방까지 토론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거 말고 이거 먹어. 이게 더 잘 익었네.”
엘리자베스는 바구니 속에 숨겨둔 가장 예쁘고 반질반질 광이 나는 사과를 꺼내 주었다.
레온하르트는 과장된 얼굴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곤 엘리자베스에게 손수건을 빌렸다.
"흡!"
기합 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는 사과를 둘로 쪼개더니 자랑스러운 얼굴로 한쪽을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과도는 어쩌고 왜 굳이 손을...?'
엘리자베스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눈만 깜빡이며 마주 앉아 사과를 베어 물었다.
'우와, 레온, 대단해! 힘세다! 이런 칭찬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저런 표정은 너무하잖아. 레온하르트는 멋대로 생각하며 사과만 우적거렸다.
초여름 햇살을 그대로 뭉쳐다 푸른 이파리로 곱게 포장해 만든 풋사과에선 여름 하늘처럼 아삭하고 청량한 맛이 났다.
“옛날이야기에... 사과를 잘못 먹고 죽었던 공주님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응?"
"아무것도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유리관 속에 잠든 엘리자베스와 그녀를 깨우는 제 모습을 상상해 보며 히죽 웃었다.
“저녁에 데뷔탕트 드레스 건으로 재단사가 온대.”
“그래?"
“만일 허락해 주신다면 황실 보석을 재가공하고 싶다던데.......”
“오래된 보석이라면 가능할 거야. 내가 말해 놓을게.”
"정말?"
"정말이지. 리지 너한텐 푸른 보석이 잘 어울리려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입가를 타고 흐른 사과즙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엘리자베스는 순간 숨을 멈췄다.
레온하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혹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운 땅을 지배하는 신처럼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끝을 핥았다.
살짝 내리깐 눈매와 달리 오만함과 도도함이 그대로 빛나는 눈동자는 엘리자베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 앞에서 엘리자베스는 모든 할 말을 잃고 고작 숨만 쉬는 게 전부였다.
겨우 이런 노골적인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숨도 못 쉬고 넘어가는 순진무구하고 순수하기만 한 엘리자베스를 보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손가락 끝에 묻어난 엷은 사과즙은 아무도 없는 홀에서 함께 춤추던 날 맛 본 그녀의 입술과 닮아 있었다.
가을이 오려면 아직 보름달이 두 번은 넘게 떠야 한다.
바구니 속의 사과는 아직 푸르기만 한데 엘리자베스의 볼에는 이미 이른 가을이 찾아와 있었다.
"음, 레온?"
침묵을 깨며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디 말해 보라는 듯 물끄러미 그녀와 눈을 맞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날이 생각나.”
그날? 함께 춤췄던 날을 말하는 거라면 그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구 웃음이 나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이건 조금 다른데.
“그래도... 좋아하는 거니 당연한 일이겠지?"
엘리자베스는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당연하다 못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을 굳이 물어보는 이유는 뻔했다.
레온하르트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빠진 척,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좋아한다 말해 달라고 하면 될 것을.
본격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 푹 빠져 버린 엘리자베스는 처음 수영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허우적거리기에 바빠 그런 말은 욕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응? 그런 거지?"
"글쎄....?"
엘리자베스의 얼굴 위로 불안한 기색이 비쳤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더 그녀를 놀려 볼까, 하며 그대로 엘리자베스와 이마를 콩 맞댔다.
"어때, 지금도 그래?"
엘리자베스는 입만 뻐끔거렸다.
지금도 그렇냐고? 아니, 전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두근거리고 화끈 거리고 부끄럽고, 또,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웃음부터 나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내가 왜 너를 볼 때마다 웃고 있겠어?"
울기 직전의 표정이 된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가슴만 뒤로 떠밀었다. 레온하르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