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레몬맛 왈츠(3)
재단사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왕실 정원사도 정갈한 솜씨로 꽃을 다듬고, 공작가에선 황실 모독죄에 해당하는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가운데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연습이라기보단 차라리 어린 연인들이 한바탕 아옹다옹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도, 레온하르트도 따로 춤 연습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둘은 굳이 가장 좁은 홀을 빌려 아무도 - 베일리는 제외하고 - 들어오지 말라고 한 뒤 그 안에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좀 있어, 너 또 내 발 밟으려고 그러지?"
“하지만 남자 스텝은 처음 밟아 보는 걸? 뭔가 치사해. 왜 레온은 한 번에 할 수 있는 거야?"
“그야 내가 평소 움직이던 것과 정확히 반대로 움직이면 되니까?"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이건 진짜 실수야! 일이냐고.”
레온하르트는 한쪽 발을 들고 겅중겅중 뛰어 긴 소파 위로 풀썩 주저앉아 조금 전 다섯 번째로 밟힌 발등뼈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괜찮아? 부러진 거 아니지?"
"너 하나 올려놓는다고 부러질 뼈라면 진작 닳아 없어졌을 거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레온하르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댄스 연습용 신발을 벗고 소파 건너편에 앉아 레온하르트를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가벼운 스커트 자락 아래로 하얀 양말에 감싸인 발이 그대로 드러났다. 엘리자베스는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잠시 발등 위로 격자 모양의 햇살이 드리워진 것을 감상했다.
레온하르트 또한 어느새 양말까지 벗어 던진 맨발로 그녀를 향해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요정보단 요정 여왕에 가까워.”
레온하르트는 소파 아래로 양말을 떨어트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엘리자베스는 배시시 웃으며 괜히 레온하르트의 발바닥을 발가락으로 쿡 찔 렀다.
"그건 싫어. 티타니아와 오베론은 별거도 하는걸.”
"별거는 싫은데... 뭐 하는 거야?"
레온하르트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은 엘리자베스는 흘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맨발 할래.”
보란 듯이 하얀 양말을 멀리 던져 놓은 엘리자베스는 이제야 조금 후련하다는 얼굴로 다시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그날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레이디는 어디로 갔지?"
레온하르트는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발보다 발가락 두어 마디쯤은 더 커다란 레온하르트의 발에 자신의 발을 맞댄 엘리자베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발가락을 꼼질거리기에 바빴다.
"리지.”
한참 서로 발등을 뻗고 당기며 줄다리기하듯 장난만 치던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말갛고, 순수하고, 순진하고, 굳은 신뢰감과 거리낌 없이 그를 향해 좋아한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깊은 애정이 함뿍 담긴 얼굴 앞에서 레온하르트는 잠시 주저했다.
"있지... 만약에 말이야, 어떤 사람이 아주 아주 어리석은 잘못을 저질러서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는데, 그래서 무사히 잘못도 바로잡고 또 그의 잘못으로 죽었던 사람도 살리는 데 성공해서 그 사람에게 사랑도 받는다면... 그 사랑을 받는 건 시간을 되돌리기 전 사람일까, 아니면 시간을 되돌려서 두 번째 인생을 살았던 사람일까?"
“...레온, 일사병 걸렸어?”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발바닥을 쭉 밀어붙이며 눈만 깜빡였다.
"그냥... 요 최근 미미스 브룬느와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어쩌고 하는 이야기.”
"벽에 머리 박기보단 훨씬 황태자의 체통과 위엄 있는 모습인 건 좋은데, 머리는 더 아프지?”
“....솔직히 조금 그래.”
엘리자베스는 솔직한 레온하르트의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
"글쎄... 그런데 그 시간 여행자 덕분에 자기 운명이 바뀐 걸 그 사람도 알고있어?"
“음, 아니. 모른다는 전제를 추가할게.”
“그러면 그 시간 여행자는 완전 말 그대로 시간 낭비만 한 거네?"
“시간... 낭비?"
레온하르트는 애써 굳어지려는 얼굴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자베스는 발등을 쭉 펴고 허리와 고개를 앞으로 숙이느라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 시간 여행자가 정말로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면, 사과부터 해야 하지 않았을까?”
고양이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는 반대로 허리를 뒤로 힘껏 젖혔다.
“자기 때문에 죽었다며. 그럼 이번에는 절대 안 그럴 거라며 사과하고, 그 증거로 어떻게 잘못을 바로잡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안 그럼 그렇게 지독한 기만이 어디있겠어?
엘리자베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동의를 구하듯 '안 그래?'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발등에 걸려 있던 창살 모양 햇살이 잘 다듬어진 발톱 위로 걸쳐질 때까지 아무런 대답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차라리 머리를 벽에 박는 쪽이 훨 낫겠어. 아무래도 내 머리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레온하르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미미스 브룬느와 미미르가 종종 나누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마법사가 아닌 사람 중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학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와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던 일리시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릿속이 잔뜩 복잡해지다 못해 아예 딱딱하게 굳어진 레온하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춤추자. 레온.”
레온하르트는 잠시 눈앞에 내밀어진 것이 커다란 깃털이 아니라 하얗고 작은 두 손이란 것을 깨달으며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힘껏 그를 끌어당겼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힘을 고려해 허리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고, 덕분에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마주 섰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분명 가장 작은 홀이었는데 두 사람에겐 황실 연회를 위해 사용하는 그레이트 홀보다 넓고 광활하게 느껴졌다.
그런 홀의 대리석 바닥 위를 맨발로 선 레온하르트는 순간 발바닥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엘리자베스의 허리로 손을 가져다 댔다.
“뭐, 뭐 하는 거야?"
“발 시렵잖아.”
무뚝뚝한 대답과 달리 레온하르트는 꽃 한 송이를 이쪽 꽃병에서 저쪽 꽃병으로 옮겨 담듯 가벼우면서도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엘리자베스를 제 발등 위로 올려놓았다.
엘리자베스의 맨발은 레온하르트의 발등 위로 무사히 안착한 덕분에 대리석의 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 발등을 신발 대신 내어 주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발이 한기를 느낄 일은 없어 보였다.
그 정도로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춤, 추자.”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고 한 손은 그녀의 손 아래로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레온하르트는 낮은 목소리로 왈츠곡을 허밍 하며 엘리자베스를 발등 위에 올려놓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창살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햇살은 길게 목을 빼고 조금 더 그들의 춤을 본격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파도였고 그의 발등 위에 올라온 엘리자베스는 작고 하얀 배였다.
그리고 그녀를 품은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여름 햇살은 벨벳 소파를 낮잠 자기에 딱 좋을 정도의 온도로 따끈따끈하게 데워 놓았다.
그러니 잠시 몸을 누인다는 게 그대로 잠든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결과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고.
엘리자베스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녀를 단단하게 받치고 또 이끄는 움직임은 지독할 만치 생생한 타인의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멍한 얼굴로 제 몸을 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뱃사공의 얼굴만 올려다봤다.
그의 필체를 그대로 얼굴선으로 옮겨 놓은 듯 언뜻 보기엔 얇고 날카롭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뚜렷한 이목구비와 여름 햇살 아래 검술 수련을 하느라 조금 그을린 피부, 베일리의 길고 가벼운 털이라면 몇 가닥이고 충분히 올라갈 것 같은 긴 속눈썹은 살짝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의 눈 또한 아래로 향하며 엘리자베스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으니까.
속눈썹 아래 감춰진 제비꽃 같은 눈동자는 그림자 속에선 자수정 같은 색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 속엔 오직 제 모습만 가득 비치고 있었다. 그 말은 그의 시야에도 엘리자베스 본인만 가득하단 뜻이었다.
어쩐지 그 점이 부끄럽고 수줍어 엘리자베스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
어느새 그녀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자라 버린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나를 봐.”
그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명령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시 돌리고 그를 향해 턱을 쳐들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레온하르트는 턱을 간질이는 한 줄기 따스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왜 잃고 난 뒤에야 알았을까. 심지어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은 그녀였는데, 왜 눈길 한 번 마주하지 않았던 걸까.
이제는 과거가 되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어느 미래의 자신을 향해 레온하르트는 세상 모든 악을 담아 '너는 다시없을 멍청이다'라는 뜻의 저주를 내뱉었다.
"엘리자베스.”
“응. 레온.”
“나를 보고 있어?"
"보고 있어.”
“네가 보는 곳에 내가 있어?"
“레온으로 가득해.”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발뒤꿈치에 슬쩍 체중을 실어 레온하르트를 순간 방심하게 하더니 그대로 그의 발등에서 내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아니, 너무 가까이 있어서 서로의 등 뒤만 바라보고 있어.”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레온하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등 뒤가 아니야, 리지. 나는 지금 너를 보고 있어. 네가 있는 세상을 보고 있어. 네가 곧 내가 보는 세상의 입구이자 유일한 창문이야.”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가슴에 이마를 대며 푸스스 웃었다.
여름 햇살로 가득 찬 방에서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숙녀를 발등에 신고 움직이는 일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해도 땀이 배어 나오는 일이었나 보다.
혹은 그녀가 그의 유일한 태양이라는, 아주 옛날 소설에나 나올 법한 진부하면서도 진실된 이유인 탓이거나.
어쨌든 레온하르트에게선 엘리자베스가 충분히 마음에 들어 하는 체향이 났 고 엘리자베스는 있는 힘껏 그의 향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꼭 그렇게 하면 그의 일부가 그녀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레온하르트.”
세 번쯤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쉰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레온하르트는 마치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소년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내 세상의 문이 레온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은 햇살을 도려내는 부드러운 칼날이 되어 커다란 여름 햇살 한 조각을 날개로 만들었다.
여름 햇살을 등에 인 엘리자베스는 그 언젠가 어린 레온하르트가 제 눈을 의심하게 했던 때와 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꼭 그의 얼굴이 조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것임을 확인하듯.
그리고 발등을 한껏 휘어 발돋움을 했다.
키스라고 하기엔 어딘지 설익었고, 가벼운 입맞춤이라 하기엔 너무 무르익어 버린 과실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