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레몬맛 왈츠(2)
데뷔탕트.
그것은 모든 사교계 여자아이들이 꿈꾸는 날이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리 온실 속에서 곱디곱게 자란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영애들이 처음으로 온실 밖으로 나오는 날.
그날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본인이 빛나야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이 있는 한 올해의 데뷔탕트에서 가장 빛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교계 부인들의 모임에선 그녀의 존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장 반짝이는 위치를 포기해야 하는 영애들을 안타까워하며 동시에 혹시 아직 온실 속에 있는 영애 중 그녀보다 빛나는 이가 있는 건 아닐지 내심 기대했다.
“카발리에는 당연히 레온이 해 줄 거지?"
드레스 시안을 가득 펼쳐 놓고 익숙하게 재단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엘리자베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말고 누굴 생각했는데?"
"음... 베일리?"
엘리자베스의 사뭇 진지한 대답에 방 안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숨겼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곁에 털썩 앉아 엘리자베스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정말로 베일리에게 예복을 맞추라고 해 버린다?”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으로 예복을 입고 황실 정원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베일리를 상상했다.
"...10분 정도 입고 있으려나?"
“그 녀석 요즘 엄청 커졌어. 장담하는데 5분도 안 돼서 다 뜯어 놓고 난리가 날걸?"
레온하르트는 여유롭게 대답하며 탁자 위의 디자인 시안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황태자의 약혼녀인 이상 올해의 데뷔탕트에서 엘리자베스는 누구보다 빛나야 했다.
'어마마마도 참...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지 않고.'
공작저를 향한 온갖 계략이란 계략은 다 짜 놓은 주제에 막상 데뷔탕트 당일이 조금씩 가까워지니 아직 어린애 티가 역력한 엘리자베스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앞이 막막했다.
여자들의 꾸미는 이야기에 남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지만 약혼녀를 에스코트하는 카발리에가 될 약혼자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덕분에 레온하르트는 조금씩 바빠져가는 일정을 전부 미루고 오늘도 엘리자베스와 함께 예복을 맞추고 있었다.
“네가 입고 걸치는 모든 것이 곧 제국의 유행이 될 거야. 그러니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면 안 돼.”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도 있는데...?"
“....그건 그렇네.”
레온하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디자인 시안을 노려보았다.
종이 속에는 화사하게 웃고 있는 어린 숙녀와 처음 보는 디자인의 드레스가 가득했다.
레온하르트는 남아 있는 기억을 최대한 짜내어 미래의 엘리자베스가 평소 어떤 옷을 입었는지 떠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하얀색....”
그러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엘리자베스가 독을 마시고 피를 쏟았던 순간 입고 있던 새하얀 드레스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세세한 디테일은 아예 뭉개져서, 차라리 하얀 구름을 입고 있었다고 하는 쪽이 더 상세할 지경이었다.
“원래 첫 번째 드레스는 하얀색 아니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디자인 시안들을 뒤적거렸다.
“리지가 아직 어리니까 차라리 어리고 순수한 느낌을 살리는 쪽은 어떤가?"
꼭 요정처럼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가능한 그녀를 성숙하게 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남아 있는 디자인 시안들을 밀쳐놓으며 중얼거렸다.
재단사는 어린 황태자와 그녀의 뮤즈가 나누는 말 사이에서 혹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생각해 보니 말이야, 리지는 약간 논외라 해야 하나... 데뷔탕트의 의미 자체가 리지에겐 조금... 다르잖나? 그러니 아예 리지 혼자... 아, 뭐라 해야 하지? 혼자 다른 느낌이면 오히려 더 눈에 띄지 않을까?"
어릴 때 어마마마의 옷장이라도 한번 뒤적여 보는 건데!
레온하르트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허공에서 마구 손을 휘저었다.
엘리자베스는 물론 시녀들 또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통 이해하지 못해 고개만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들 따윈 알 바 아니니까, 저들끼리 아바마마께 인사를 올리는 서로 눈이 맞든 내버려 두고... 엘리자베스 혼자 반짝일 만한 무언가... 단순히 드레스가 예쁘다거나 장신구가 예쁜 그런 거 말고... 그거다! 격! 아예 격이 다른 느낌!”
“격이... 다른 느낌... 말씀이십니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엘리자베스, 네 가문은 천사의 후예라는 말도 있잖아? 아예 인간과 다른 그런 '격'을 추구하면 되겠네!”
"되기는 뭐가 돼? 내가 데뷔탕트에서 천사의 깃털이라도 달고 나갈까?"
“그것도 나름대로 어울릴 것 같은데?"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잖아."
“나도 진심으로 한 말이야.”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꽁알꽁알 서로 귀여운 사랑싸움 비슷한 것을 하는 사이 재단사는 버릇처럼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했던 대화를 되짚어보고 있었다.
'격이 다른... 수준이 다른... 요정... 천사... 깃털....'
생각나는 단어들을 우선 몽땅 메모지에 적어 넣은 재단사는 디자인 시안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시험 삼아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덧그리기 시작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이런 건 어떨까요?"
"내 눈에 너는 천사 아니면 요정으로 보인다니까?"
“레온, 혹시 맨날 벽에 머리 박다가 드디어 눈도 나빠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왜 얼굴은 붉어지는 건데? 응? 리지, 데뷔탕트에서 너는 가장 빛나야 해. 너도 매년 봤으니 알지만 오죽하면 딸이 태어나면 데뷔탕트를 위한 재산을 따로 모아 둔다는 말도 있겠어.”
“...그런 말을 레온이 하니 되게 안 어울린다.”
"으흠, 흠. 저기... 전하? 레이디 엘리자베스?”
헛기침을 몇 번이고 한 뒤에야 재단사는 두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모든 영애들이 데뷔탕트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기를 꿈꾸지요. 하지만 올해 그 자리는 이미 레이디의 것으로 확정된 상태, 그러니 다른 영애들은 어떻게 해서는 레이디보다 눈에 띄어서 두 번째로 빛나는 자리라도 차지하려 할 겁니다.”
“...대체 그 사람들에게 데뷔탕트가 가지는 의미가 뭐길래 다들 그렇게 야단인 걸까요?"
디자인 시안을 받아 본 엘리자베스는 어딘지 못마땅한 투로 종알거렸다.
종이 속에는 등에 자그마한 날개를 달고 머리에 금빛 사슬로 만든 후광을 두른 사랑스러운 천사가 있었다.
보석 가루를 물에 띄운 듯 스스로 반짝이는 이슬로 짠 비단을 느슨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주름을 잡고 구름 위를 걷듯 치맛단에는 보석을 달아 빛을 반사시키고....
재단사의 메모를 읽어 보던 레온하르트는 흡족한 마음으로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소파에 기대 누웠다.
“잘 키운 딸을 훌륭한 가문에 시집보내는 것. 그것을 위해서지요.”
재단사는 데뷔탕트라는 찬란한 이름 아래에 얼마나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시집보내는... 것?”
“어린 아가씨들이야 혹시라도 꿈에서 본 왕자님, 기사님, 또는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들뜨지만....”
"그만.”
레온하르트는 재단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직 리지는 어려.”
재단사는 깊게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의아해하며 고개만 이리저리 돌렸다.
“그럼 다른 디자인 시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재단사는 가져온 디자인 시안들을 챙겨 황궁을 나섰다.
조금 전 황태자가 막지 않았다면 소중한 뮤즈에게 큰 말실수를 할 뻔했다.
말이 좋아 사교계 데뷔지, 실제로는 어떻게든 좋은 가문으로 딸을 시집보내고 서로 결혼이란 이름의 동맹을 맺으려는 어른들의 결혼 시장이라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그런 결혼 시장의 가장 큰 피해자가 엘리자베스였으니까.
'그래도 이젠 흉터도 없어지고, 몰라 볼 만큼 밝고 건강하게 자라 주셔서 참 다행이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다리에는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지경인 흉터가 가득하고 좋아하는 색 하나 선뜻 고르지 못했던 그녀가 지금은 황태자와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며 호불호를 확실하게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 뒤엔 황태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며 재단사는 자신의 공방으로 향했다.
* * *
“...왜 말을 막은 거야?"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슬쩍 질문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긴 머리 칼을 손가락에 가볍게 감았다 풀기만 반복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응?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조금만 더 크면 말해 줄게.”
영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골이 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커야 하는데?"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일으켜 세웠다.
몇 년 사이 엘리자베스보다 꾸준히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작았던 레온하르트는 이제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살짝 들어야 할 만큼 자라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정수리 위로 손바닥을 대고 그대로 최대한 평행을 유지하며 제 몸 쪽으로 손바닥을 옮겼다.
손바닥은 레온하르트의 턱 바로 아래에 닿았다.
“네가 나만큼 커지면?"
눈으로 그 '나만큼'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양 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릴 때 실컷 놀아 둬. 어른이 된다는 건 그림자에도 익숙해진다는 말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레온도 나랑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으면서."
"하지만 황태자지. 너 내가 요즘 무슨 일 하는지 모르지?"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선 이미 충분히 어른이라는 말인가요?"
“레이디 엘리자베스에 비하면 훨씬 어른이지요.”
“그럼 이제 피망이랑 당근이랑 브로콜리도 잘 먹겠네?”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오늘 저녁 식사 때 확인해 볼 거야. 주방장에게 일러둘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고!”
"리지?"
미쳐 버리겠네.
레온하르트는 고무공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이리저리 통통 튀어 버리는 엘리자베스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능한 어린 모습 그대로 있길 바라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무 걱정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저렇게 웃을 수만 있다면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레온하르트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엘리자베스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시녀들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베일리와 단둘이 남게 된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주저앉아 베일리를 불렀다.
품 안에 안겨 오는 묵직하고 풍성한 온기를 쓰다듬으며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사랑받고, 또 그녀를 사랑할 자격은 몇 번을 허락받아도 부족했기에 스스로 포기했다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향해 '좋아해!'라고 말하는 저 어린 약혼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애초에 그녀가 반한 건 열아홉, 마냥 그녀에게 다정하고 상냥한 황태자였지 그 속에 들어앉은 희대의 머저리가 아니었다.
만일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향해 스스럼없이 '좋아해!'라고 말해 줄까?
그럴 리 있나.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게만은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일이었다.
어쩐지 자신의 인격이 둘로 분리된 기분이 들어 괜히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레온하르트는 베일리의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털 위로 얼굴을 파묻고 다시 한숨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