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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58화 (58/130)

58화 레몬맛 왈츠(1)

엘리시움 공작저로 황실 문양이 붙은 마차 한 대가 향했다.

황실의 마차가 게이트를 통과했다는 말에 엘리시움 공작은 문자 그대로 맨발로 뛰쳐나갔다.

뒤늦게 신발을 챙겨 나온 집사는 모시는 주인의 경망스러운 행동에 헛기침만 반복했다.

“왜 아직도 오질 않는 게냐. 게이트를 지났는지가 언젠데 아직도 마차가 보이질 않아!”

“진정하십시오, 주인님. 주인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게이트에서 저택까진 제법 거리가 있는지라....”

"에이잇! 드넓은 정원이며 숲에 둘러싸인 대저택이 다 무슨 소용인지.”

엘리시움 공작은 목을 길게 늘이며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문 앞에서 빙글빙글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드디어 저 멀리 마차의 장식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집사는 엘리시움 공작이 격식도 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려는 것을 저지하고 그를 대신해 미리 준비한 은쟁반 위로 얇은 봉투 하나를 건네받았다.

용건은 그것뿐이었던지 마차 속에 탄 사람은 장갑 낀 손 외엔 공작을 향한 인사조차 하지 않고 다시 마차를 돌려 황급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어쩌다 자신이 모시는 가문이 이렇게까지 몰락하였는지 탄식하는 건 오롯이 집사의 몫이었다.

정작 공작에 대한 예의조차 차리지 않은 무례한 손님에게 화를 내야 할 엘리시움 공작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 되어 껄껄껄 웃고만 있었다.

집사의 은쟁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 황실의 인장이 붙은 초대장이었다.

“이게 대체 몇 년만에 오는 소식인지! 그러고 보니 이졸데 그 아이가 올해 몇 살이었지?"

"아가씨께선 올해로 열다섯 살이 되셨습니다.”

집사는 한숨을 속으로 숨기며 묵묵히 공작의 말에 대답했다.

황실 식구가 총출동하여 아가씨를 황궁으로 데려가고, 또 환영식에서 입에 다시 담기조차 민망한 사건을 일으켜 놓고도 엘리시움 공작과 공작 부인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변화가 있긴 있었다.

공작은 매일 술에 취해 잠들었고, 술 냄새를 가리기 위해 더욱 독한 향수를 사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자신의 머리에서 쥐가 나왔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악몽으로 남았던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손을 씻고 목욕을 했다.

덕분에 공작 부인의 손은 한겨울 맨손으로 걸레질을 하는 하녀들처럼 습진이 생기고 거칠거칠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독한 향수와 진득진득한 기름을 써서 가리면 가릴수록 오히려 그들의 추악한 모습만 더더욱 강조되고 또 사용인들에게 그날의 일을 상기시키는 것을 대체 왜 본인들만 모르는 걸까.

도저히 이런 저택은 견딜 수 없다며 저택에서 떠난 사용인만 해도 이번 달에만 벌써 다섯 명이었다.

공작가답게 수백 단위에 가까웠던 사용인들도 이젠 겨우 저택을 유지하고 두 분의 시중을 들 정도로만 남았다.

집사는 차라리 엘리자베스 아가씨가 그날 저택을 떠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공작이 다시 히스테리를 부리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직까지 그가 집사인 이상 조금 전까지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던 그의 서재를 깔끔하게 치우는 건 그의 몫이었다.

집사가 어떤 심정으로 술병을 정리하고 또 술 냄새가 진동하는 카펫 위에 홍차 찌꺼기를 뿌려 냄새를 없앴는지 전혀 모르는 엘리시움 공작은 초대장을 집안의 가보처럼 소중히 품에 안고 서재로 돌아왔다.

“부인은 어디 있지?"

"목욕 중이십니다.”

“또?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야! 황실에서 초대장이 왔으니 빨리 서재로 오라고 전하도록.”

집사에게 말을 전해 들은 시녀는 조심스럽게 공작 부인에게 말을 꺼냈다.

"마님, 황....”

"황실? 황실에서 왜! 드디어 내 머리에서 쥐가 나왔다고 트집을 잡으려고? 아니면 저 못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물으시려고?"

“...초대장이 왔으니 서재로 오시라는 주인님의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황실'이란 말에 경기를 일으키듯 벌떡 일어났던 공작 부인은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시녀들은 익숙한 듯 그녀를 부축하고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천사의 후예라고 불렸던 엘리시움은 이제 더 이상 저택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황제께서 직접 쓰신 게 분명해.”

"폐하의 필체가 분명하군요!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런 경사스러운 소식은 가족 모두가 함께 들어야겠지요?"

“부인 말이 옳소. 가서 루트비히를 데려오거라!”

시녀는 서둘러 옛날 엘리자베스가 사용했던 방으로 가 아직 강보에 싸인 아기를 데려왔다.

"자아 루트비히, 이것 좀 보렴. 네 누님이 우리 가문에 다시 영광을 가져오려는 모양이구나!"

공작은 몇 주 만에 보는 제 아들을 향해 얇은 종이를 팔락여 보였다.

강보 속에 곱게 싸여 있는 건 민들레 홀씨처럼 훅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은빛 머리카락과 이제 겨우 푸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한 사랑스러운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루트비히 모르트 폰 엘리시움은 공작에게서 나는 지독한 향수 냄새와 그 아래에 뒤섞인 술과 담배 냄새에 순식간에 표정을 찌푸리더니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루트비히를 데려온 시녀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 냉큼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공작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루트비히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잘 울지 않는 아이였고, 시녀가 등을 토닥이고 쓸어 주자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제 아비도 못 알아보는 못난 것 같으니라고....”

공작은 제 몸에서 나는 강렬한 체취는 생각도 하지 않고 여리디여린 갓난아이의 후각만 탓했다.

그러나 서재에 있는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지적할 수 없었다.

“여, 여보, 아직 루트비히는 어리니까... 그것보다 어서, 어서 그 초대장에 뭐라 적혀 있는지 읽어 봅시다!"

"크흠... 어디 보자, 친애하는 엘리시움 공작, 아니 사돈어른에게.”

정말 이 문장을 써야 할까 황제가 편지지에 펜을 댄 채로 고민했던 만큼 동그란 반점이 유난히 커다랬다.

“친애하는 사돈어른이라! 시작은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군.”

말과는 달리 공작의 얼굴은 이미 미소가 가득했다.

"연일 무더운 여름, 숲으로 둘러싸인 공작저의 사정은 어떠하신가. 밤마다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황궁까지 들리는 것 같네.”

“폐하께선 자상하시기도 하시지! 저택의 사정을 이리 꼼꼼하게 생각하시고 계실 줄이야.”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밤마다 풀벌레는 물론 모기며 온갖 나방과 날파리 떼로 고생하고 있진 않으냐 돌려 비꼬아 말한 것을 공작 부인은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늘 저택에만 있는 이에게 딸아이의 안부를 전하는 걸 소홀히 한 점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이번 여름에는 엘리자베스 양과 다 함께 황후의 고향을 다녀왔지. 그곳에서 그녀가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대신 전하는 것을 그동안 보내지 못한 안부 인사라 생각하시게.”

따지고 보면 그들을 저택에서 근신하게 한 건 황제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내용은 노골적으로 엘리자베스는 부모 없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공작과 공작 부인은 이미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이졸데의 이름만 기도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우리 이졸데가 그래도 황실에서 어여쁨은 받나 봅니다.”

“쉿, 이제부터가 진짜 내용인 모양이군. 어디 보자... 황후께서 회임을 하셨다고? 이런 소식 따위 내가 알 바인가?"

집사는 물론 시녀도 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의 회임이었다. 모두가 나서서 축하해야 하는 사안이건만, 저택에 근신하며 공작으로서 최소한의 의무조차 잊어버린 듯 그는 콧수염만 매만지며 다음 문단을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리하여 황후의 회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할까 하네. 황태자의 약혼녀의 부모 되는 이가 그런 경사스러운 자리에 빠져선 안 될 일이지.”

“암, 당연한 말이고말고요! 부모로서 당연히 가야 하는 자리니 사양 말고 오라는 내용이지요?"

공작 부인은 두 손을 맞잡고 황홀한 표정으로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여보?"

공작 부인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고 느끼며 공작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공작은 하늘 높이 뻗었던 팔을 아래로 툭 늘어뜨렸다.

그의 손에서 종이 한 장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작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 책상에 엉덩이가 닿자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집사가 기겁하며 그를 부축하는 사이 공작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그러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게 최고의 태교 아니겠나? 조만간 짐이 직접 그 아이의 초상화를 전해주라 명하겠네. 아쉽고 섭섭할 테지만 짐의 심정 또한 이해해주리라 믿네.”

어떤 비꼼과 돌려 말하기도 저들 좋을 대로 생각하던 공작 부인도 황제의 친필로 적힌 노골적인 불참 명령서 앞에선 머리가 새하얘졌다.

공작과 마찬가지로 공작 부인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다.

“...이졸데... 이... 가문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 못나고 부족한 것이... 기어이 가문을 버리려는 구나!"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난 황소처럼 마구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바닥으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시녀가 다급히 몸을 돌리고 루트비히의 귀를 막으며 제발 공작 부인의 입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공작은 부인의 손에서 황제의 편지를 빼앗아 들더니 성큼성큼 루트비히에게 다가와 아직 모든 자극에 약한 아이에게 대고 호통을 쳤다.

“루트비히! 보거라! 네 누님이라는 년이 이토록 배은망덕할 줄이야! 너만은... 너만은 그래선 안 된다! 너는 이 엘리시움의 후계자야! 가문을 다시 부흥시킬 의무가 있다고! 당장 울음을 그치거라! 젠장, 어서 달래지 않고 뭘 하는 게야? 다들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버려!"

답답하게 목을 조이던 셔츠 단추를 찢어 내듯 풀며 공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이때다 싶어 다들 서재 밖으로 나섰다.

공작 부인은 아비의 모습에 경기를 일으킨 아들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짓으로 어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하며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머리... 머리를 감아야 해... 집 안에 쥐가 있는 건 아니겠지? 가장 가늘고 고운 참빗으로 머리를 빗고 또 빗으면 확인할 수 있을 거야....”

황실, 데뷔탕트, 연회. 그 세 가지 단어만 떠올렸을 뿐인데 몇 년 전 환영식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집사는 단단히 닫힌 서재의 문 앞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며 공작이 부수고 있을 저택의 살림을 걱정했다.

술에 진탕 취하거나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공작은 하루에도 몇 번씩 멀쩡한 의자를 던져 부수고 책장을 뒤엎고 책상 위에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바닥으로 내던지며 화풀이를 했다.

대대로 엘리시움 가문을 모셔온 집사는 어쩌면 자신이 엘리시움의 마지막 집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직감했다.

‘루트비히의 탄생을 숨긴 이유가 대체 뭔데! 뭐였는데! 이졸데 그 아이가 가문을 일으켰을 때 기세를 몰아 사교계에 얼굴을 보이려 했거늘!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루트비히가 태어났을 때 아예 이졸데에게 알려서 황궁으로 들어가야 했어.... 무능한 딸자식 같으니라고! 황제에게 부모가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하는 매정한 자식! 엘리시움은 이제 끝이야... 정말 끝장이라고...!'

난장판이 된 서재에 주저앉아 숨겨놓았던 술병을 기울이며 공작은 죄 없는 엘리자베스만 원망하고 또 황실을 향해 욕설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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