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시계탑의 티타임(3)
"그러고 보니 아직 백성들에게 회임 소식을 알리지 않았군요.”
황제의 넓고 든든한 품에 안기듯 기대 누워 그가 입 안으로 넣어 주는 청포도를 받아먹던 황후가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 깊게 생각하듯 잠시 천장을 노려봤다.
"황후, 아들과 딸 중 누가 더 좋을 것 같습니까?"
“어느 쪽이든 그저 얌전히 나왔으면 합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힘겹군요.”
황제는 황후의 배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쥐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황후의 말이 맞습니다. 듣고 있는 것 다 안다. 어마마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얌전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황후는 어느새 오른쪽 왼쪽으로 그네를 타듯 천천히 움직이는 황제의 품에서 가볍게 눈을 감으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소식을 알리자니 또 귀족들이 모여들 텐데... 환영회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만 않았으면 합니다.”
"크흠... 흠... 그때 그 일은... 아니, 아닙니다, 황후.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하세요.”
황제는 다급히 황후의 얼굴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바로 여기 황후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제 생각, 아니지. 어떻게 파티를 꾸밀지 생각해봅시다. 그게 가장 좋은 태교일 겁니다."
동글동글한 눈으로 황제를 빤히 응시하던 황후는 맑은 소리로 웃으며 머리로 슬쩍 황제의 가슴을 떠밀었다.
“부족함 없는 자리가 될 겁니다. 약조하지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황후는 황제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황자일까요, 황녀일까요?"
황후의 손가락질 한 번에 커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게 엄살을 떨던 황제가 아예 몸 위로 황후를 기대 눕히며 물었다.
“누구든 좋으니 제발 어린 시절의 레온처럼 유모들을 시달리게만 하지 않는 성격이면 좋겠습니다.”
황후는 지금도 그 시절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첫 자식이라고 오냐오냐했던 결과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뼈저리게 후회했던 황제 또한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즘 레온 녀석, 제법 철도 들고 의젓해지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말에는 짐도 녀석을 다시 볼 정도였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황후?"
황후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온 사방에 걱정만 끼치던 아이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새로 태어난 것처럼 행동하게 되다니... 조심스럽고 또 불경한 말이지만 가끔 어색합니다. 정말 이 아이가 내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갈 황제가 될 아이니 어른스럽다거나 철이 일찍 들었다거나 하는 건 얼마든지 좋은 일이지만... 뭐랄까, 꼭 이미 한 번 세상을 살아 본 어른이 어려진 것만 같다고 하면 제가 더위를 먹은 걸까요?"
황후는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황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황제는 황후의 등을 조심스럽게 다독여 주며 눈을 감았다.
“...황후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별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그냥 조금, 아주 가끔 놀랄 뿐입니다.”
황제는 눈을 뜨고 사랑하는 황후와 다시 눈을 맞췄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짐과 황후의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설령 요정이 못된 장난을 쳤다고 한들 믿고 기다리는 건 오직 부모만의 몫이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요?"
그제야 황후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기사, 무엇보다 약혼녀인 엘리자베스에게 그렇게 지극정성인 것을 보면 분명 폐하의 내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까? 흐음, 짐의 성격 중 그나마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을 녀석이 물려받았다 하니 뿌듯하군. 그러는 황후께선 녀석에게 무엇을 물려주었다 생각하십니까?"
황후는 그 말에 다시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투로 되받아쳤다.
“열 달 동안 어디 하나 다치지 않도록 곱게 품어 준 것으로 저는 이미 할 일을 다 했습니다. 거기서 또 무엇을 물려줄까요? 욕심도 많으셔라.”
말과 달리 황후의 목소리에서 다시 웃음기가 흠뻑 묻어 나왔다.
황제는 황후의 배 위를 조심스럽게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거기서 다 듣고 있는 것 안다. 황후를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다 너도 태자처럼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거라.”
황제의 목소리에도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그 모든 대화를 문 너머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시종과 함께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저런 대화를 늘 들어야 하는 시종을 안쓰러운 눈으로 올려다봤다.
시종은 조금씩 황제를 닮아 굵고 또렷한 선이며 솜털 같은 수염이 돋기 시작하는 황태자 앞에서 울고 싶은 얼굴로 벽의 기둥만 필사적으로 노려봤다.
'그렇지 않아도 리지의 데뷔탕트 일로 찾아뵈려 했는데 타이밍 하고는... 그나저나 역시 부모는 부모라는 건가, 조금 더 어린애인 척을... 해야 하는데... 내가 17살 때 어떤 성격이었지? 아니지, 성격이고 뭐고 간에 이미 황제였지. 이제 와서 갑자기 다시 어린 척하기에도 영 애매한데....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 하지 않은 내 실수야.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아예 대놓고 천재인 척할까? 아냐, 아냐... 천천히... 천천히 신중하게 행동하자....’
그래도 엘리자베스를 위해 이것저것 애쓴 모습이 좋게 보였다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는 생각만으로도 헤벌쭉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단히 붙잡으며 드디어 열린 황제의 침소 안으로 들어갔다.
"크흠, 들었느냐?"
“앞으로도 보고 배운 대로 리지에게 잘 대해 주겠습니다.”
“하여간 아이들 앞에선 행동 하나까지 조심해야 한다더니....”
황제는 쯧쯧 혀를 차며 능글맞게 대답하는 레온하르트를 째려봤다.
"어마마마,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태자를 임신했을 때만큼 힘들지는 않답니다. 파티에는 충분히 참여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렴.”
“윽...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기, 기억에 없는 일입니다!"
레온하르트의 당황하는 얼굴을 잠시 감상하던 황후는 농담이었다며 호호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초대장은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재차 확인하거라.”
황제는 진지한 목소리로 레온하르트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지 한참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서 젊은 시절의 황제를 발견한 황후는 황제와 레온하르트 몰래 다시 속으로 웃었다.
"아바마마, 잠시 귀 좀 빌려주십시오.”
"이놈이...?”
황제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레온하르트는 그 나이대 악동들만 지을 수 있는 장난기와 약간의 비열함이 담긴 표정으로 황제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황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호오? 하며 제법 놀라더니 이내 껄껄껄 웃으며 레온하르트의 등을 두드렸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몸이 휘청거리려는 걸 가까스로 버티며 히죽 웃었다.
“태자가 철이 들고 의젓해졌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구나. 이 제국에서 가장 음흉한 녀석이 다름 아닌 내 아들일 줄이야! 이제 보니 네가 황위에 오르면 꼴보기 싫은 머저리 귀족들은 아주 발로 차낼 기세구나?"
"그게 아바마마께서 이루시지 못한 숙원이라면 아들 된 도리로서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그래서 황위는 언제쯤 물려... 아악! 아바마마!”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발로 차는 아버지가 어디 있냐며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진 레온하르트가 씩씩거리며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네가 어린 시절 폐하와 함께 낮잠을 자며 폐하의 얼굴이며 다리며 여기저기 발로 마구 차 대던 벌을 이제야 받는구나.”
“어마마마까지...!”
레온하르트는 황당한 얼굴로 결국 고개만 내저었다.
“이래서야 어디 백성들의 귀감이 되는 가정의 모습인지 저는 생각을 포기하렵니다. 그나저나, 그림이 바뀌었네요?"
레온하르트는 침대 바로 건너편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다를 배경으로 황제와 황후,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가 사이좋게 서 있는 그림이었다.
“...파티에는 미우치아도 부르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부를까요?"
“겸사겸사 황후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연극을 보여 주거라.”
“그것도 좋겠군요. 어마마마 생각은 어떠십니까?"
황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야기는 차차 상의하기로 하고, 그러고 보니 페리안 영식과는 조금 친해졌느냐?"
“일스 말입니까?”
레온하르트는 최근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에는 미미르에게 마법을 배우려고 시도하다가 최근엔 연금술이나 과학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와 자주 도서관이나 시계탑을 들리던데, 보아하니 일스 녀석이 엘리자베스의 호기심을 톡톡히 채워 주는 모양입니다.”
엘리자베스와 주로 함께한다라?
황후와 황제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되는 것이냐?"
“네?”
아무래도 이 어리석은 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황제는 정녕 모르겠냐는 듯 혀를 차며 한마디 툭 던졌다.
"황태자, 아직 엘리자베스 영애가 태자의 약혼녀 신분이라는 걸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
그제야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위로 삐죽 올라갔다.
황후는 황제의 어깨에 기대어 그 모습 또한 황제의 판박이라며 속으로 키득댔다.
레온하르트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말에 한 방 맞은 듯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약혼식까지 올렸다곤 하나 아직 정식으로 황태자비가 된 건 아니다. 심지어 이제 곧 데뷔탕트가 있을 영애에게 혹시라도....”
“리, 리지가 그럴 리 없습니다! 일스 또한 그런 녀석이 아닙니다!"
“구경꾼들은 늘 아닌 척 부채 너머로 가장 저열하고 노골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법이지.”
황제의 말에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입만 벙긋거렸다.
엘리자베스와 일리시스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태중 약혼자였고, 실제로 약혼식까지 무사히 올렸고, 성인이 되면 무사히 황태자비가 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날 황후가 되어 행복하게 살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하게 함께 살아갈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일리시스라면?
일리시스는 페리안 후작가의 후계자였다.
그 말은 황태자만큼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황실의 보물과 황후보단 자유로울 후작 부인의 자리 중 엘리자베스를 진정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누가 봐도 후자였다.
황후와 황제는 점점 심각하게 굳어지다 못해 하얗게 질려 가는 아들의 얼굴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럴...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리지가 내가 아닌 일리시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 나는 그녀를 놓아줘야 하는가?'
어차피 바뀌어 버린 미래, 그렇게 하는 쪽이 정말 엘리자베스를 위한 일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생각할 것도 없이 손수 나서서 '황태자로부터 약혼식까지 올렸으나 끝내 파혼한' 엘리자베스의 명예와 일리시스의 우정을 위해서라도 그 둘을 이어 줘야 했다.
하지만 제 손으로 그 둘의 손을 맞잡게 해 준다니, 상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진정, 진정하자. 이럴 때는 조금 어른답게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을... 집어치우라지! 적어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앞에서만은 어린애답게 행동하자.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저,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엘리자베스를 얼마나 은애하는지는 두 분께서도 이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며 배에 힘을 주고 막무가내로 우기며 두 분이 놀리면 놀리시는 대로 당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