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시계탑의 티타임(2)
미미스 브룬느의 방에서 나온 레온하르트는 눈앞에 펼쳐진 오순도순, 도란도란, 아기자기한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레온!"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가장 먼저 레온하르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손짓했다.
“정신 나간 고양이 같은 마녀에 파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 거기에 토끼처럼 하얗고 빨간 소년까지? 나는 어디서 모자라도 하나 주워 쓰면 되나?"
레온하르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미미르가 천장 구석에서 내려 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미미르는 찻잔 속으로 각설탕 하나를 퐁당 집어넣으며 소년을 소개했다.
“이쪽은 일리시스 엘디르얀 폰 페리안. 내 제자야.”
“일스가? 네 제자라고?"
미미르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말 그대로 마시던 차를 내뿜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제...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일리시스는 대뜸 제 이름을 줄여 부르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온하르트는 황태자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뜨거운 차를 뱉는 대신 삼키는 쪽을 택했다.
입천장이 홀라당 익어 버릴 정도로 뜨거운 찻물이었기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자베스가 걱정할 정도였지만 레온하르트는 애써 후끈후끈한 고통을 꾹 참고 일리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얼마나 글러 먹은 머저리였는지 깨우쳐 준 오래된 벗은 예나 지금이나 포식자 앞의 초식 동물처럼 오들오들 떨면서도 눈빛만큼은 천칭의 눈금처럼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마음 같아선 반가움에 확 끌어안고 바닥이라도 뒹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와 자신이 그 정도로 친해지는 건 아직도 한참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아련하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윽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일리시스는 괜히 빈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테이블과 레온하르트를 번갈아 흘끔거렸다.
'호... 혹시 전하께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그렇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약해 늘 레온하르트와 다른 관료들을 걱정시키던 일리시스의 심장이 힘겹게 뛰는 것도 모른 채 레온하르트는 한참이나 벅찬 표정으로 일리시스를 응시했다.
'가만있자, 예전에도 일스가 미미르의 제자였던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래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이상, 그리고 그의 방대한 지식과 지식욕을 고려했을 때 미미르가 그를 가르치고 있어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는 제가 어리석어 완전히 뒤바뀐 미래에 휘말린 일리시스를 보며 착잡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그 하나 때문에 아예 인생이 바뀐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장 엘리자베스를 비롯해 어마마마와 태어날 예정에 없던 동생까지....
어쩐지 건드려선 안 될 영역을 건드린 기분이 들었다.
“미미스 브룬느 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어?"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엘리자베스가 화제를 돌렸다.
“어? 어... 그냥, 여름인데 연세도 있는 분이 건강 조심하라고 안부 인사차...."
"전하께서요?"
미미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되물었다. 어딜 봐도 '전하께서 그런 어른스럽고 예의 바른 행동을 할 리 없다'라는 투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괜히 욱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왜 그런 표정인데!"
“깜짝이야, 제가 뭘 했다고...? 그냥 전하께서 전하답지 않은 일을 하시니 의외다,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불쾌하게 들리셨다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진심은커녕 영혼이 아예 없는 사과인데?"
"어머, 들켰다.”
미미르는 새침하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고 찻잔만 비웠다.
레온하르트는 황당한 얼굴로 미미르만 노려보다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만 내쉬었다.
어디선가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미르와 레온하르트가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이제는 익숙해져 빙그레 웃고만 있는 엘리자베스와 달리 일리시스는 꼭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잔뜩 허리를 굽힌 채로 쿡쿡 웃고 있었다.
"일스?”
“헉! 저, 전하! 죄송합니다. 그게... 그러니까....”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어차피 아바마마께서도 나와 리지에게 친구가 필요해서 너를 부른 걸 텐데, 친구에게 딱딱하게 황태자 전하니 뭐니 하는 것도 우습지.”
“하지만 전하....”
"당장 네 스승이라는 작자가 자국의 황태자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이 나라에서 내 위신이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 눈에 훤히 보이잖아?"
레온하르트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귓가에서 미미르가 가증스럽다, 속지 마라 어쩌고 하며 불경한 소리를 종알거렸지만 그는 무시했다.
레온하르트는 냉큼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반론을 펼치지 않는 일리시스를 보며 속으로 내심 섭섭한 마음을 느끼며 피눈물을 삼켰다.
자신을 대하는 황궁 사람들의 태도와 미미르의 조금, 아주 약간, 살짝만 부풀려진 소문과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들려준 이야기로 미리 알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황태자 전하는 생각보다 훨씬 소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저보다 네 살 더 많은 스승님 앞에선 저절로 주눅이 드는 일리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미르를 대하는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가 내심 부러웠다.
태어나길 악연의 별을 서로 나눠 가지고 태어났다며 보기만 하면 싸우기 바쁘다는 것도 다른 시선으로 보자면 그만큼 허물없는 사이임을 뜻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를 향한 레온하르트의 모든 태도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애정이 서려 있다는 건 감기로 앓아누워 참여하지 못했던 환영식을 대신 다녀온 아버지께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미래가 약속된 사이니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봄을 닮은 기운이 그득 담겨 있었다.
“리지 너는 뭐 하고 있었어? 마녀한테서 함부로 이것저것 받아먹는 거 아니야. 너 그러다 토끼로 변할지도 몰라.”
"다른 사람을 함부로 변신시키면 안 된다는 건 한참 옛날에 전하의 협조를 받아 똑똑히 배웠으니 그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온, 혹시 토끼로 변했어....?"
"크흠, 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냐니깐?"
하여튼 저 마녀, 리지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이를 갈며 주전자를 기울였다.
그러나 주전자에선 잘 우러난 차 대신 주전자를 기울인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달그락거리는 도자기 소리만 들렸다.
“제, 제가 새로 우려 오겠습니다!"
무안한 마음에 몇 번 더 주전자를 기울여 보던 레온하르트는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일리시스는 머리를 푹 숙이고 팔만 앞으로 쭉 뻗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누가 보면 국보라도 건네주는 줄 알겠네....’
실제로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찻잔과 주전자는 국보급의 물건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리시스가 앞으로 내민 손바닥 위로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일리시스가 차를 새로 내오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미미르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팔로 머리를 받치며 건들건들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저놈, 이젠 가르칠 것도 없는데 맨날 나한테 와서 마법을 가르쳐 달라느니 어쩌니 하며 매달린다니까요?"
“일스라면... 마법적 소양은 없지 않아?"
의자를 앞뒤로 까딱이던 미미르가 동작을 멈추고 레온하르트를 반히 바라봤다.
“...전하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죠?"
아차.
어디서 들었다, 혹은 본인에게 직접 들었다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둘러댄다?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미르는 진지한 뜻으로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다시 의자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적 소양이 이렇게까지 없는 건 리지 이후로 처음인데, 지식욕은 어지간한 분침 못지않으니 종종 두려울 정도예요.”
“안타깝다고 생각하나?"
미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시계탑의 기록이 깨질 수도 있었을 텐데....”
레온하르트는 생각보다 일리시스를 높이 평가하는 미미르를 보며 눈썹을 씰룩였다.
미미르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일리시스가 주전자를 들고 나간 문만 노려봤다.
“아! 일리시스 말인데, 굉장히 똑똑했어.”
가라앉은 분위기 사이에서 눈만 깜빡이던 엘리자베스가 부러 은방울꽃처럼 맑고 높은 목소리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데?"
레온하르트는 다정하게 물으며 엘리자베스의 접시 위로 케이크 한 조각을 덜어 주었다.
"파도 이야기.”
"파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정령들이 높이 뛰어올라 서로 몸을 부딪혀 그 파편들이 동글동글하고 하얗게 부서지는 거라고 미미르 언니가 그랬는데....”
“그랬는데?"
"달이 어쩌고, 인력이 어쩌고. 아직 리지가 알기엔 조금 어려운 이야기만 더듬거리면서 실컷 늘어놓았지.”
"그거 동심 파괴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황당하단 투로 되물었다.
그러나 정작 동심을 파괴당한 엘리자베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뭐... 그 녀석은 말 그대로 천재니까. 뭐든 물어보면 사전처럼 척척 대답해 줄 거야.”
“그리고 인어 설화가 탄생한 배경과 지역별로 와전된 이유, 와전된 설화에서 알 수 있는 그 지역의 옛 문화에 대해 막 토론하려던 참이었어.”
“인어 설화가... 뭐?"
엘리자베스는 숨도 안 쉬고 한 번에 도도도 쏘아붙이듯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했다.
어쩐지 이 자리에서 가장 지능이 떨어지는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슬쩍, 아주 약간 엄습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처음 봤어. 미미르 언니가 그랬는데,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과 그 지식을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서 쉽게 설명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랬어. 그런데 일리시스는 두 가지를 전부 다 잘하니까 천재래!"
레온하르트는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여 엘리자베스의 말에 긍정했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면 늘 그랬지만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이번에도 갓 익은 체리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피서를 떠날 때만 해도 마냥 어린애로 보였는데 바닷가에서 정령의 축복이라도 받았는지 어엿한 숙녀가 되어 돌아오는 바람에 처음엔 누군지 못 알아볼 지경이었다며 미미르는 엘리자베스를 다시 놀렸다.
엘리자베스는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계셨나요?"
어느새 다시 따듯하게 데워진 찻주전자를 품에 안고 일리시스가 가까이 왔다.
조심스럽고 단정한 동작으로 비어 있던 찻잔을 하나씩 채우는 모습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소심한 성격이긴 해도 이대로만 자라 준다면 지를 땐 화끈하게 지를 줄 알게 될 거고... 가문도 좋고, 못 본 사이 어디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몸은 여전히 허약한가? 좀 더 잘 먹여 봐야겠다.'
레온하르트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일리시스는 한참 전부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어 공주 설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면 나도 들을 수 있을까?”
"아, 네!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좋아하는 것 앞에서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니 너도 어린애구나 싶어 레온하르트는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느긋하게 일리시스가 하는 말을 음악소리처럼 듣고 있는 미미르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푹 빠져 있었다.
지금까지 배운 지식이 고작해야 물웅덩이였다면 눈앞의 수줍음 많은 새 친구는 호수처럼 넓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일리시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레온하르트를 좋아하는 것과 미미르 언니를 좋아하는 감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그가 좋아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리자베스는 그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일리시스의 말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엘리자베스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감정에 대해 솔직해진 엘리자베스는 순간 그의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리지의 귓불이 붉어져 있지?'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이야기에 집중했거나, 혹은 방이 너무 뜨거운 탓인지도 몰랐다.
라며 가볍게 넘길 수 있었지만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