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시계탑의 티타임(1)
소금과 파도 냄새 섞인 바람 대신 한창 무르익은 과실과 화려하게 피어난 여름 꽃잎 빛 바람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황궁으로 돌아온 황실 가족들을 다시 제 일상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그간 밀린 정무를 처리하는 동시에 매일같이 황후의 상태를 직접 살피느라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랄 판이 었다.
“몸 하나는 정무를 위해 쓰고, 하나는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하려는 치들의 머리에 제국 법전을 던져 버리고, 남은 몸 하나는 온전히 내 사랑을 위해 쓰고 싶구려.”
황후는 심한 입덧 탓에 한동안 물조차 마시기 힘겨워했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과 달리 바싹 말라 가는 몸을 보며 황제는 애꿎은 의사들의 멱살만 쥐고 흔들다 새벽 네 시에도 황후의 잠꼬대에 섞인 무엇이 먹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황실 주방까지 친히 내려와 한바탕 뒤집어 놓기 일쑤였다.
그동안 우울하고 영 기분이 무거웠던 이유의 원인을 알게 된 황후는 이제 조금씩 티가 나려는 아랫배를 어린 레온 하르트의 엉덩이를 직접 때렸을 때처럼 손끝으로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잠시 못 본 사이 몸은 물론 마음까지 훌쩍 커서 돌아온 엘리자베스를 보며 시녀들은 남몰래 눈물을 훌쩍였다.
처음 궁에 들어올 때만 해도 벌벌 떨며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굳어 있던 아가씨가 이젠 하얀 새처럼 쪼로롱 웃으며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니고, 또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베일리를 보는 순간 체면이며 위엄이며 전부 뒤로한 채 와락 달려들어 그 풍성하고 보드라운 털을 껴안으며 웃는 얼굴은 이제 빈말로라도 인형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한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갓 따낸 레몬이나 설익은 풋사과 따위가 보이는 것 같았다.
역시 그런 걸까? 그런 거겠지, 시녀들은 기둥 뒤에서 계절은 이미 한여름을 향해 달려가는데 홀로 꽃샘추위도 오지 않은 봄인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그렇게 다들 제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와중에, 레온하르트는 홀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하곤 모두 잠이 들었을 시간대를 노려 암호문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X월 X일, 어마마마 사망.
분명 암호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어마마마는 사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정에 없던 동생이 생겼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레온하르트는 우선 어마마마가 사망했다는 문장 옆에 화살표를 그리고 동생이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그러고 보면 바뀐 미래가 하나 더 있었다.
결국 소드 마스터가 됐다.
오직 엘리자베스의 웃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각성에 성공했다는 점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대견스러운 한편 이 힘을 과연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몰려왔다.
암호문을 다시 정리해 넣은 레온하르트는 침대로 가 풀썩 드러누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창밖에서 들려오던 파도 소리가 없으니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허전함을 어마마마께선 대체 어떻게 버티신 거지...?'
이쪽으로 데굴, 저쪽으로 데구르르.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넓은 침대만 굴러다니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바닷가에서 가져온 기념품을 갈무리한 곳으로 향했다.
대부분 조개껍데기나 소라고둥, 작은 산호 조각과 같이 어린애가 보물로 간직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중 유난히 커다란 소라고둥이 눈에 들어왔다.
파도 소리를 고둥 속에 넣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들어 가져온 것인데, 진짜일까?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소라고둥을 들어 눈을 꼭 감고 귀를 대 보았다.
파도 소리를 완전히 잡아넣지는 못했는지 어딘가 불완전한 소리였지만 귓가를 간질이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쁘진 않았다.
침대에 고둥을 가지고 온 레온하르트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정리하며 잠이 들 때까지 고둥을 귓가에 가져다 놓았다.
다음 날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가 각각 향한 곳은 시계탑과 황실 기사단의 건물이었다.
“조금 있다 나도 시계탑으로 갈게.”
레온하르트는 이젠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키스하며 건물로 향했다.
그의 팔에는 잘 말린 길쭉한 해초가 안겨 있었다.
해초의 가치를 알아본 시녀들이 어마마마를 위해 준비한 것이냐 물었을 때 적당히 둘러대느라 속으로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알베르트를 보면 그걸 빌미로 한바탕 하려고 했는데 막상 그의 선물에 감격하다 못해 충성의 대상을 벌써부터 아바마마가 아닌 그 아들로 변경해 반역 혐의로 끌려갈 뻔한 알베르트의 모습을 보자니 그럴 마음도 픽 식어 버렸다.
"크흠... 흠... 전하, 저에게 뭐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글쎄. 이미 할 말도 다 하고 전할 물건도 다 전한 것 같다만.”
알베르트는 당장이라도 그와 검을 겨루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으로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겨루고 싶나?"
알베르트는 씩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각성이라... 백성들에게 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들릴지 무척 기대되는군요.”
“입담 좋은 음유 시인이 있거든 나에게 들려줘. 그러나 리지의 명예를 더럽히는 이가 있다면 내 이름을 대고 그 자리에서 베어도 좋다.”
알베르트는 잠시 못 본 사이 훨씬 어른스러워진 레온하르트를 기특하단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대련장으로 향했다.
바닷가로 놀러 가신다더니 소드 마스터가 되어 돌아오신 황태자 전하와 기사단장이 대련을 한다는 말에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멋대로 날뛰며 마구 요동치는 검기를 어떻게든 제어하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전하, 억누르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십시오.”
검기 앞에서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알베르트는 조언했다.
그의 검기는 엘리자베스를 지키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과 분노로부터 비롯한 것인 만큼 사납게 날뛰었다. 공격적인 검기를 다루기 위해선 조금은 진정시켜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게... 경의 말처럼 쉽게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나...?"
검기를 흘려보내라니. 말은 잘하지. 레온하르트는 투덜거리면서도 알베르트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검 끝을 바닥으로 대고 그대로 검기를 흘려 넣자 조금 팔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고! 전하! 그렇다고 대련장 바닥을 뒤집어 놓으시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땅으로 흡수될 거란 예상과 달리 그의 검기는 마치 천 갈래 만 갈래로 뻗은 나뭇가지처럼 대련장 바닥을 온통 헤집고 뒤집어 엎어 버렸다.
“이래서야 대련을 하다 정말 제가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목숨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아는 사람이니, 대련은 조금 뒤로 연기해야겠습니다.”
엉망이 된 대련장 바닥을 삽으로 정리하던 기사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알베르트와 레온하르트를 노려봤다.
“검기를 흘려보내라니. 말은 그럴듯하다고 나도 생각한다만 이왕이면 방법까지 알려 주지 않겠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는 소드 마스터도 아닌데. 그냥 해 본 말이었습니다.”
"뭐?"
“농담입니다. 실은 전하께서 각성하셨다는 보고가 들어왔던 날부터 나름대로 과거의 소드 마스터들이 어떤 식으로 수련했는지 조사했습니다.”
“성과는 있었나?"
“물을 가르고 산을 베려는 욕심을 버리고 바늘을 세로로 자르고 동전 한가운데에 구멍을 낸다는 느낌으로... 어쩌고 하던 구절이 인상 깊더군요.”
레온하르트는 끙 소리를 내며 탁자 위로 턱을 괴었다.
그에게 찬물 한 잔을 내밀며 알베르트는 새로운 숙제를 내 주었다.
“그 방법이 효과가 있으니 기록으로 남겼겠지요. 전하께선 내일부터 겨울 대비 장작 쪼개기 훈련에 참여해 주셔야겠습니다.”
"장작... 뭐? 경,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은 여름일세."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전하, 검기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장작이 아니라 타고 남은 재만 남을 테니 어쩌면 장작 패기가 검기 제어에 나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장작은 전하의 이름으로 겨울이 오면 백성들에게 나눠 드리겠습니다. 이제 슬슬 전하께서도 황태자 다운 일을 하셔야지요.”
“확실히 경의 말이 일리는 있다만... 어째 귀찮은 일을 훈련을 빙자해 나에게 떠넘기는 느낌이라면 기분 탓인가?"
“백성들을 위해서, 백성들의 따스한 겨울을 위해서 자원봉사 하시는 셈 치시지요.”
알베르트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직접 표정으로 실천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알베르트를 보며 괜히 해초를 가져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련장을 나선 그가 이어서 향할 곳은 시계탑이었다.
태어날 예정에 없던 동생이 태어났다. 이 말은 이제 미래가 완전히 바뀐다는 뜻이었다.
만일 태어난 아이가 남동생이라면, 그리고 레온하르트보다 훨씬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재목이라면?
황실에서 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수준을 넘어 아비의 심장을 직접 찌르는 일은 백성들에겐 그저 흉흉한 소문이자 역사책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어쩌면 그 당사자가 될지도 모르는 황태자 레온하르트에겐 전혀 무게감이 다른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로 폐태자가 되는 일까지 고려해야 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엘리자베스는? 아니지, 오히려 황후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만일 엘리시움 공작이 다시 수를 쓴다면....
시계탑으로 향하는 레온하르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미리 연락을 받은 사공이 마법으로 움직이는 배를 마련해 놓은 덕분에 레온하르트는 쉽게 시계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숨에 시계탑의 꼭대기로 향한 레온하르트는 대뜸 미미스 브룬느를 찾았다.
“뭐야, 리지는 기념품이라도 가져왔는데 전하는 빈손이세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막 티타임을 시작하려던 미미르가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뜨며 종알거렸다.
미미르와 엘리자베스 사이에 놓인 테이블엔 조개와 해마 모양의 초콜릿이 잔뜩 들어 있는 상자가 있었다.
“자리 내어 드릴까요?"
미미르는 예의상 레온하르트에게 권유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으며 미미스 브룬느의 연구실로 향했다.
"레온 몫 남겨 놓을까?"
“그래 주면 고맙지. 미미르가 이상한 것 먹이려고 들면 상을 엎어 버려, 리지.”
“내가 미쳤어요? 전하도 아니고 리지에게 그런 짓을 하게?”
“미미르 언니! 그거 황족 암살 미수...."
레온하르트는 쿡쿡 웃으며 미미스 브룬느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시계탑의 주인이 거주하는 방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천장과 바닥이 뒤바뀌어 좀처럼 움직이기 어려운 와중에 레온하르트는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어지럼증에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천장, 아니 천장에 붙은 바닥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으며 지붕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쬐고 있던 미미스 브룬느가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민하더니 어느새 그의 허벅지 뒤를 특툭 건드리던 의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미미스 브룬느, 만일 자네가 먼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왔다고 가정하고, 미래에는 분명 없어야 할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 있고 또 있어야 할 사람은 사라졌다면... 그건 더 이상 같은 미래라고 할 수 있겠나?"
미미스 브룬느는 하얀 눈썹에 푹 파묻히다시피 한 눈을 슬쩍 들어 심란한 표정의 레온하르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같은 미래가 아니라고 한다면, 제가 과거로 돌아가기로 한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조금 더 쉬운 말로 설명해 주겠나?"
레온하르트는 필사적으로 미미스 브룬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미미스 브룬느는 허허 웃으며 그에게 차 한 잔을 대접하며 긴 수염만 쓸어내렸다.
"말하자면 갈림길과 같은 겁니다. 무조건 앞으로 향하는 마차를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움직이게 하느냐에 따라 남은 한쪽 길은 영영 사라지고, 또 그 한쪽 길을 과거에 달렸던 사람들에겐 잊히겠지요. 조금 과장된 말이긴 하지만 새로운 풍경이 그 자리를 대신할 테니까요.”
"이제 좀 이해가 가는군. 그런 거였단 말이지....”
“전하, 신중하게. 매사 신중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 기회는 첫 번째 기회보다 찾아오기 어려운 법입니다.”
“명심하지. 늘 고맙네.”
미미스 브룬느는 인자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시 레온하르트의 시야를 거꾸로 돌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