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시계태엽은 다시 감기고(4)
점쟁이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자리에서 반쯤 일어서기까지 하며 오오오, 얼빠진 소리만 중얼거렸다.
덩달아 엘리자베스는 호기심을, 레온하르트는 의심과 함께 다시 점술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카드가 뭐라고 하지?"
여차하면 카드고 뭐고 베어 버릴 듯 낮고 그르렁거리는 톤으로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또한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점술가는 헛기침을 하고 갑자기 기지개를 펴는 둥 한참 딴짓을 부린 뒤에야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 그리고 그 둘이 동시에 고른 카드를 뒤집어 놓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탁자 위로 코를 박을 기세였다.
그도 그럴 게, 뒷면부터 색이 바랜 티가 풀풀 나는 세 장의 카드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무슨 사기를 치려는 거지?"
“사기라니!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사기를 칠까. 보아하니 둘 다 마법에는 재능이 없나 보군. 이건 마력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카드야.”
“어딜 봐도 사기꾼이나 할 법한 말이군.”
“영애, 거 도련님 입 좀 다물게 만들 수 없수?"
낯설고 묘한 분위기에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는 한편 레온하르트의 옷자락을 꼬옥 쥐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점술가의 말에 당황하며 괜히 손에 쥔 옷자락만 더욱 단단히 잡아당겼다.
그 모습에 점술가는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것도 없는 세 장의 카드를 요모조모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 아가씨는... 아직까지 제 감정이 뭔지도 모르고 있군. 산이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넘어가야 하는 높고 험준한 산인데, 그 산만 넘어가면 비단으로 깐 바닥 위로 황금으로 만든 꽃이며 은이 흐르는 개울이며 아주 지상 낙원이 따로 없어!”
“산... 이요? 제 감정?"
엘리자베스는 멍하게 눈만 깜빡였다.
그러나 점술가는 그 한마디로 설명은 끝났다는 듯 곧바로 레온하르트의 카드로 넘어갔다.
“우리 도련님은... 허허, 그러게 후회하기 전에 잘하지 그랬어.”
레온하르트는 이 대목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래도 뭐 나름 열심히 하고는 있는 모양이네. 하지만 잊으면 곤란해. 도련님이 마구 헤집어놓은 대가는 언제고 무슨 형태를 취해서라도 돌아오게 될테니.”
“불길한 소리 할 거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겠군.”
마음 같아선 이미 골목에서 끌어내어 자경단에게 넘긴 지 오래였다.
점술가는 히죽 웃으며 마지막 카드를 설명했다.
“그렇게 왕자님은 공주님에게 꽃으로 된 길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공주님 몫이지요. 아가씨, 도련님. 선택에 신중하세요. 그러면 다 잘될 겁니다.”
“무슨 해석이 그래?"
레온하르트는 맥빠진 투로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뜻 모를 해석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됐어, 더 있어 봤자 시간 낭비지. 더 늦기 전에 돌아가자. 마차를 부르는 게 낫겠어.”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운 좋게 근처 여관에서 손쉽게 마차를 부른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먼저 태우고 골목 속 점술가를 노려봤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 할 거 없어. 다만 잊으면 안 돼. 기껏 시곗바늘까지 거꾸로 돌렸는데, 진정 그녀가 행복해지려면 앞으로 뭘 해야 할까?"
“그게 무슨....”
점술가는 손가락을 들어 쉿, 하듯 손동작을 취했다.
메마른 고목 같던 손가락은 어디로 가고 옷자락 아래로 불꽃 같은 머리칼과 함께 석고상처럼 하얗고 늘씬한 팔이 드러났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마차는 이미 출발했고,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골목길 사이엔 처음 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바람만 휘날렸다.
“...리지.”
"응?"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속에서 레온하르트는 한참 동안 창밖만 바라보다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툭 내뱉었다.
“너, 천천히 자라서 늘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물음표가 한가득 떠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다시 서늘한 창문 유리에 얼굴을 기댔다.
“나는 늘 레온 곁에 있는걸? 천천히 자라든, 빨리 자라든. 혹시 내가 레온보다 커질까 봐 걱정하는 거야?"
스륵하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의 어깨 위로 따스하고 세상에서 가장 보드라운 향기가 훅 퍼져 왔다.
“어휴 그래, 네가 베른 경처럼 커지면 어쩌나 걱정이라 천천히 자라라고 했다.”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슬쩍 엘리자베스의 은빛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아 보았다.
저택에 도착했을 즈음 엘리자베스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끓아떨어져 있었다.
직접 모시겠다는 시종들을 모두 물린 채 레온하르트는 기어이 그녀를 업고 계단을 올랐다.
등에 업힌 몸무게는 그가 애용하는 검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혹시 이대로 하늘로 날아간 건 아닐까, 레온하르트는 연신 등 뒤를 흘끔거리며 엘리자베스가 얌전히 잠들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온전히 시녀들의 몫이었다.
시녀들이 물러간 뒤, 파티션 뒤에서 빼꼼 얼굴을 드러낸 레온하르트는 가벼운 여름 이불을 덮고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엘리자베스의 볼에 슬쩍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그녀의 볼에 난 솜털이 그의 숨결에 흔들리려는 찰나 엘리자베스는 잠투정을 부리며 몸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졸지에 허공에 몸을 숙인 채 굳어 버린 레온하르트는 지금 자신이 무슨 파렴치한 짓을 하려던 건지 깨닫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미쳤어! 몸이 어려졌다고 정신까지 어려져도 유분수지, 지금 대체 몇 살짜리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의 고삐를 제어하던 어른의 이성이 당장 테라스 너머 바다로 뛰어들기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베개 곁에 놓인 화환에서 물망초 한 송이만 빼내어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 * *
낮의 시내 모습이 궁금하다는 엘리자베스의 말과 황궁으로 돌아갈 짐을 챙기느라 어수선한 분위기가 맞물려 두 사람은 선상 파티가 시작되기 세 시간 전까지 해변이든 시내든, 적당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생겼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호위 무사까지 대동하고 나선 외출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손에 시원한 음료를 하나씩 들고 고급 상점가를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유리 진열대 너머로 흥미로운 물건을 찾으면 레온하르트는 '사 줄까?' 하며 권유하고, 그러면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구름 위를 걷는 듯 즐거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식으로 오후 내도록 상점가를 돌아다닌 두 사람은 분수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기념품으로 뭘 사 가면 좋을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뜨개질로 만든 가벼운 숄은 어때? 여기 뜨개질은 어부들의 그물을 수선하는 방식이랑 섞여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준대.”
“산호로 만든 조각상은? 리지 너처럼 하얀 산호로 만들고 받침대는 진주로...."
"황제 폐하께는 그런 게 어울릴 것 같아"
“나는 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레온하르트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우리, 뭔가 기념할 만한 걸 찾아서 황후마마의 보물창고를 빌려 그곳에 넣어 두면 어떨까?"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엘리자베스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조개껍데기 목걸이?"
“그런 게 좋겠지?"
레온하르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온하르트의 손수건을 깔고 앉았던 엘리자베스는 허공에 손수건을 가볍게 털고 곱게 접어 돌려주었다.
두 사람은 호위 무사들을 대동하고 다시 기념품을 찾아 상점가를 한 바퀴 헤집기 시작했다.
산호와 진주,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자개 장식 등, 눈에 보이는 것마다 여름을 추억하기에 알맞아 보여 고르는 것도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슬슬 가셔야 합니다.”
“벌써?"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이제 막 마음에 든 물건을 찾은 참인데 파티 준비를 위해 가야 한다고?
“...우리, 내년에 꼭 오자.”
“그땐 아예 리스트를 만들어서 오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앞서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선상 파티를 위해 준비된 커다란 배 위로 주위 영지의 귀족들과 지역 유지들, 그리고 연극제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이들이 승선했다.
엘리자베스에게 술 탄 물을 마시게 한 해군들이 참회와 후회의 눈물을 기름 삼아 구석구석 닦아 낸 나무 바닥에선 번쩍번쩍 광이 나고 있었다.
온갖 신선한 해산물 요리가 등장하고 드물게 화이트와인이 아닌 해산물과도 궁합이 잘 맞는 레드와인도 간간이 보이는 와중에 파티의 주인공인 황후와 황제가 두 손을 잡고 등장했다.
황제는 눈앞의 키를 툭툭 손끝으로 건드리며 제국과 황실, 귀족과 백성들을 항해하는 배에 비유한 가벼운 연설을 했다.
그러는 사이 황후는 투명하고 말간 미소를 지으며 옆에서 우아한 자태로 서 있었다.
이윽고 황제와 황후는 사람들의 박수세례를 붉은 융단 길 대신 지나며 자리에서 내려왔다.
저택의 요리사는 내일이면 다시 언제 볼지 모르는 황후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신선한 굴과 레몬을 대령했다.
날것 특유의 비린내에 약한 사람들은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황후는 감격한 표정으로 요리사에게 황실로 오지 않겠느냐 그 자리에서 제안했다.
요리사는 그녀가 다시 저택에 돌아올 때 주방을 지휘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그녀의 말을 돌려 거절했지만 표정만큼은 이미 황궁 수석 요리사의 것이었다.
그러나 황후가 껍질을 접시 삼아 올려진 굴을 입에 넣는 순간, 요리사의 표정은 새파랗게 변했다.
“우웁...!”
새파랗게 변한 건 요리사뿐만이 아니었다.
황후는 당황한 얼굴로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배의 난간 너머로 몸을 돌려 입 안의 것을 뱉어 냈다.
황제와 레온하르트의 얼굴 또한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호위 무사들 사이에 갇힌 요리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레온하르트는 설마 하며 황후가 손을 댄 굴 껍데기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독인가?"
해산물의 비린내에 독 특유의 냄새를 감췄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싶어 다른 굴 몇 개를 요리사가 직접 먹어본 결과, 굴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럼 다른 이유로 황후께서 갑자기 구역질을 하셨다는 건데, 요 최근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셨던 일도 있어 항시 대기 중이던 의사가 황급히 황후를 모시고 선실로 들어갔다.
황후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쓸 뻔한 요리사를 포함해 어떻게 해서든 황후가 죽는다는 미래만큼은 바꾸고 싶은 레온하르트,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반려를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은 황제와 진짜 어머니보다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던 황후마마를 잃고 싶지 않던 황실 식구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의사가 선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의사가 선실 밖으로 나섰다.
어쩐지 그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황제는 한달음에 달려가 의사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레온하르트와 호위 무사가 황제를 만류하는 사이 의사는 켁켁거리면서도 힘겹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 켁, 폐하! 황후마마... 콜록, 마마께서, 휴우.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크흠흠... 황후마마께서 회임을 하셨습니다!”
레온하르트 덕분에 다시 갑판 위로 발을 디딘 의사는 목을 가다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의사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황후의 회임을 축하하는 자, 벌써부터 정치의 판도며 황위 후계자가 바뀌는 건 아닐지 점치는 자, 그저 그녀가 무사하단 소식에 안도하는 자, 평생을 외동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동생이 태어난다는 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굳어진 레온하르트까지.
'이런... 이런 건 없었잖아. 동생이라니. 말도 안 돼. 나는... 나는... 젠장, 망할!'
"레온, 왜 그래? 혹시 술 마셨어?"
"어... 어마마마께서 갑작스럽게 회임이시라니 조금 놀라서 그래. 괜찮아. 나 대신 축하드린다고 좀 전해 줄래? 조금 바람을 쐬어야겠어.”
레온하르트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두통에도 엘리자베스가 걱정하지 않게 씩 웃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황제와 함께 선실로 들어갔다.
선상 파티는 황후의 회임 축하 파티로 바뀌었다.
악단들은 흥겹게 음악을 연주하고, 격식을 따지던 사람들도 즐거운 소식 앞에선 술과 음식을 즐기며 춤을 췄다.
오직 레온하르트만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며 억지로 기억이 지워지는 아픔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