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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53화 (53/130)

53화 시계태엽은 다시 감기고(3)

황실에서 온 작은 손님들이란 말에 미우치아는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이 꽃은 가보로 남겨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미우치아는 레온하르트가 건네준 커다란 꽃다발을 보며 화사하게 눈을 휘어 가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전까지 마치 한 사람의 몸 안에 여러 사람의 영혼이 들어 있던 것처럼 연기하던 미우치아에게 푹 빠져 있었다.

“저, 미우치아 님....”

“그냥 편하게 미우라고 불러 주셔요, 미래의 황후마마.”

엘리자베스의 볼이 훅 붉어졌다.

“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연기할 수 있나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나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위아래로 붕붕 끄덕였다.

미우치아는 여름 장미처럼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여 엘리자베스와 시선을 맞췄다.

"비워 내세요. 그리고 채우는 거예요. 내 속에 있는 감정의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내가 곧 이야기 속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고 나를 속이는 거예요.”

"나를... 속여요...?"

미우치아는 꽃다발 속에 함께 섞여 있던 작은 장미꽃 봉오리 하나를 꺼내 엘리자베스에게 건넸다.

“나를 속이려면 나에게 솔직해져야 해요. 진짜 내 감정이 무엇인지만 알면 나머지는 쉬운 일이랍니다.”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동경하는 배우가 준 꽃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나에게... 솔직해지기....”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뭘까? 동경? 기쁨? 즐거움?

“그렇지! 바로 옆에 계시는 황태자 전하를 마주하면 어떤 감정이 떠오르나요?"

미우치아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를 슬쩍 떠보았다.

그녀의 말에 레온하르트 또한 움찔하며 놀라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레온을 마주하면...?"

엘리자베스의 파랗고 말간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봤다.

레온하르트는 어색함에 괜히 눈만 데구루룩 굴리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화가 나나요? 아니면 기쁜가요? 슬픔? 희열? 두근거리나요? 어떤 느낌의 두근거림인가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요? 옆에 있고 싶다고 욕심이 나나요?"

“미우치아.”

“전하께서도 그러하신가요?"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레온하르트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엘리자베스 또한 작은 꽃 한 송이 너머로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세상에! 사랑이군요.”

“사, 사랑이라니. 우린 아직....”

“서로를 은애하고, 아끼고,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고, 어떤 일이든 함께 하고 싶고, 곁을 탐내고, 그 사람을 욕심내면서, 한편으론 그 욕심에 상대방이 다칠까 봐 두려워서 전전긍긍. 못난 모습만 실컷 보여 주며 후회해 놓고, 다시 밤이 되면 그리움에 괴로워하고, 마주치면 가슴 설레 하는 감정이 사랑 아니면 대체 무얼까요?"

미우치아는 무대 위의 별이라는 별명답게 노래하듯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손짓까지 해 가며 즉흥 연기를 펼친 미우치아는 싱긋 웃으며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두 분은,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그...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어머나, 그럼 그렇지 않은 걸 원하시나요?"

“그건 아니지만...!”

미우치아는 동그랗게 치켜뜬 눈을 다시 파스스 파도 포말이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웃으며 가벼이 내리깔았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시고, 또 만나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레이디 엘리자베스.”

"아, 음. 그렇지. 정말 훌륭한 공연이었네. 조만간 황궁에서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군.”

“...무대가 저를 기다리나요?"

미우치아의 까만 눈이 밤바다에 비친 별처럼 또랑또랑하게 반짝였다.

“그대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관객일지는 자신 없지만, 무대가 기다린다면 와 줄 텐가?"

미우치아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까르륵 웃었다.

“무대 기다린다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날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날이 어두우니 조심해서 돌아가셔요.”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미우치아의 배웅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이미 황실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미우치아에게 황제는 조금 전 레온하르트가 했던 말을 확인하듯 다시 반복했다.

“조만간 황궁에서 보지. 자네에게 어울리는 무대를 만들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겠군.”

"영광이옵니다, 폐하. 부족한 실력이나마 황후마마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미우치아의 노래 덕분에 훨씬 나아졌습니다. 만일 태교를 해야 할 일이 또 생긴다면 그땐 그대를 궁으로 불러야겠어요.”

"어머나, 제 목이 쉬는 것과 황실 가족이 늘어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빠를지 기대되는군요!"

미우치아의 말에 황후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저어, 아바마마, 어마마마.”

“왜 그러느냐, 태자."

“저희는 걸어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황제와 황후 앞에서도 별처럼 넘치는 자신감으로 반짝이는 미우치아를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머리 위로 얼음물 한 바가지가 끼얹어진 듯한 느낌에 옆을 휙 돌아봤다.

황제와 황후 또한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내일 있을 선상 파티가 공식적인 마지막 일정 아닙니까. 평범한 도시의 밤 거리를 리지에게 보여 주고 싶습니다.”

이것 봐라? 미우치아는 슬쩍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엘리자베스가 흥미를 보일 만한 정보를 흘렸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모를 밤, 도시를 미로처럼 감싼 운하를 작은 나룻배 하나로 지나가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지요.”

그 말에 바로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간절한 눈빛으로 황제와 황후를 올려다봤다.

미우치아는 새침하게 눈만 깜빡였다. 황제와 황후는 결국 너털웃음을 지으며 너무 늦게 오지 말라며 허락했다.

* * *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도시는 바다 못지않게 미로처럼 골목골목 감싸고 흐르는 운하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가볍게 한 시간 정도 도시 곳곳의 운하를 돌고 온다는 사공의 안내에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나룻배에 탑승했다.

“꺅!”

레온하르트는 어둡고 흐붓한 불빛 아래 혹여나 엘리자베스가 발을 헛디딜까 그녀를 아예 번쩍 안아다 배 위로 올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화들짝 놀라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눈만 깜빡였다.

사공이 긴 노를 저으며 익숙하게 배를 몰기 시작하자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곁에 앉아 몰래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이런 게 있었다면 낮에도 올 걸 그랬어.”

"내년에 다시 오자.”

“내년에 할 일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서로를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사공은 어린 연인들을 위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시의 수호성인에 관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기 잠깐만 들리지.”

레온하르트는 막 장사를 끝내고 접으려던 선상 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꽃으로 가득 차 있던 꽃 파는 배에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닮은 은방울꽃과 푸른 물망초, 그리고 밤이 되자 그윽한 향을 풍기기 시작한 다른 꽃송이를 사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화관을 엮었다.

"어때?"

엘리자베스는 말없이 눈을 가볍게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여름 향기를 둥글게 엮은 화관이 얹히고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한 시간은 두 사람이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기에도 아쉬울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소원을 적은 등불을 운하에 띄운 모습을 바라보며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같은 소원을 빌었다.

내년에도 이곳에 와서, 예쁘고 즐거운 일만 즐길 수 있게 해 주세요.

엘리자베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 사공에게 넉넉하게 팁까지 준 레온하르트는 먼저 배에서 내리더니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레온하르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한 손인 양 겹쳐 쥐고 있던 손이었는데 어쩐지 맞닿은 손가락 끝이 뜨겁고 화끈거렸다.

용기를 내어 배에서 폴짝 뛰어오른 엘리자베스를 레온하르트가 무리 없이 받아 냈다.

덕분에 그의 품에 뛰어 안긴 모습이 된 엘리자베스도, 레온하르트도 동시에 귓불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시장도 문을 닫아 밤바람만 서늘하게 불어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길을 걸었다.

“거기 어린 꼬맹이 둘, 점 보고 가지 않으려우?"

레온하르트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목소리의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의 등 뒤에서 여차하면 돌팔매질이라도 하겠노라 다짐하던 엘리자베스는 골목 사이에서 그들을 향해 손짓하는 고목처럼 메마른 손가락을 발견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수다. 늙은 점쟁이가 젊은 친구에게 저주를 걸어 봤자 뭐 얼마나 대단한 저주를 걸겠어.”

“...정체가 뭐지?"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 골목으로 향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은 골목 사이로 딱 봐도 수상한 느낌이 풀풀 풍기는 노파가 낡고 해어진 옷을 입고 테이블 너머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손때가 묻고 모서리마다 둥글게 닳은 색 바랜 카드 뭉치 하나와 커다란 유리구슬이 있었다.

“귀하신 분들을 뵈었으니 특별히 공짜로 해 줄게. 연애운, 궁금하지 않아?"

“여... 연애운이라니!"

“거 참,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사자가 어디서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도 늙었나 보아.”

“... 리지, 무시하자. 상대할 필요 없어."

레온하르트는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엘리자베스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한참 전부터 황궁에선 느낄 수 없던 분위기와 호젓한 운치에 흠뻑 빠져 있던 엘리자베스의 귀엔 그의 말이 닿지 않은 듯,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레온하르트를 제치고 점쟁이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궁금한 게 아주 많은 표정인데? 전부 알려 줄 수도 있고, 하나만 알려 줄 수도 있지.”

“정말로... 알 수 있어요?"

“뭘 알고 싶은데?"

코끝까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점쟁이가 히죽 웃었다. 누렇게 변한 이빨이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리지, 그냥 가자니까?"

“하지만 레온은 궁금하지 않아?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 말이야.”

그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냥 가자!

레온하르트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 괜히 발치의 돌부리만 걷어찼다.

“...알았어.”

엘리자베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의 뒤를 따라왔다.

흘낏 뒤를 돌아본 레온하르트는 하늘을 노려보며 잠시 갈등했다.

“...차라리 시계탑의 미미르가 훨씬 믿을 수 있을 거야.”

그 말뜻을 알아차린 엘리자베스는 반색을 하며 다시 점쟁이에게 달려갔다.

'저런 얼굴로 좋아하면... 정말 세상에 귀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구해다 주고 싶잖아....'

레온하르트는 한숨과 함께 이왕 이렇게 된 것, 거짓말을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점쟁이를 째려봤다.

"그런 무서운 표정 하지 말아. 그래, 어디 보자... 귀하신 도련님과 그 약혼녀라고? 우선 영애부터 봐 볼까....”

점쟁이는 능숙하고 날렵한 손놀림으로 카드 패를 섞고 무지개처럼 반원 모양으로 펼쳐 놓았다.

"아가씨 먼저 한 장, 도련님도 한 장,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한 장 뽑아 봐.”

엘리자베스는 어쩐지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카드를 뽑았다.

레온하르트 또한 그렇게 싫은 티를 내더니 막상 제 차례가 오자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듯 신중하게 카드를 뽑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먼저 선택권을 양보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레온하르트에게 다시 카드를 고르라며 아예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려놓았다.

점쟁이는 턱을 괴고 흐뭇한 표정으로 그 둘을 지켜봤다.

네가 골라라, 나는 싫다 잠시간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던 둘은 정중앙의 카드를 뽑는 것으로 결국 합의를 보았다.

레온하르트의 손 위로 엘리자베스의 하얗고 투명한 손이 겹쳐졌다.

“그래, 어디 보자... 두 사람의 인연은 얼마나 깊으려나... 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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