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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52화 (52/130)

52화 시계태엽은 다시 감기고(2)

폭풍우로 인해 공연이 미뤄지자 혹여나 거센 비바람에 무대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는 기술자들과 달리 급하게 새로운 대본과 연기를 외워야 했던 배우들은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늘의 주역이자 이 시대 최고의 소프라노라고 불리는 미우치아 에우테르페는 슬쩍 커튼을 젖히고 얼마나 사람들이 몰려왔는지 가늠했다.

연극제의 위상은 물론 황실 가족이 다 함께 구경하러 왔다니 그들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온 사람들로 객석은 물론 객석 사이 복도까지 그득그득 차 있었다.

“긴장되나?"

에이본은 미우치아의 등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미우치아는 고개를 흔들고 오히려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고의 무대와 최고의 관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모두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밤이 되리라 미우치아는 확신했다.

"나, 이런 공연은 처음이야.”

원칙대로라면 황제의 자리를 중심으로 아무도 접근할 수 없어야 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야외무대의 경우, 황제 주위 반경 5미터 정도는 근위병과 호위 무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황제는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더 들어올 수 있도록 호위 무사들의 자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대신 오히려 백성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여기 있는 모두가 짐의 근위대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황제는 단 한마디로 주위 반발을 일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레온하르트와 함께 오페라나 연주회를 가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늘 황실 전용 특별 박스석에 앉아야 했던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앉는 일조차 새롭고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리지, 조금 더 이쪽으로 와. 불편하지는 않고?"

"두근두근해! 전혀!"

"그럼 다행이지만....”

막이 올라가는 사이 백성들은 저마다 뒷자리를 흘끔거리며 황실 가족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황제로서의 위엄은 물론 호위 무사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까지 백성들을 향한 믿음을 보이는 자애로운 황제 폐하.

그 곁에서 온화하지만 기대감으로 잔뜩 상기된 얼굴로 우아하게 앉아 있는 황후마마.

그리고 그 두 사람의 훌륭한 점만 물려받았노라 칭송이 자자한 어린 소드 마스터이자 미래 황제의 관을 쓰게 될 황태자.

마지막으로 아직 공식적인 황태자비가 되진 않았으나 이미 어릴 때부터 황태자와 함께 자란 데다, 축제 기간에 한바탕 요란하게 시장 골목을 들쑤시고 다녔노라 소문이 자자한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누구나 절로 경외심이 들고 고개가 숙여지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길고 지루한 연설 대신 다만 이 순간을 즐기라는 한 마디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막이 올랐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최신식 무대 장치가 움직이며 아무것도 없던 무대는 바닷속 인어들의 왕국으로 변했다.

막이 한 번 내려갔다 올라가면 장면도 함께 바뀌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푸른빛이던 조명은 노랗게 바뀌고 산호로 만든 성 대신 파도를 가르는 커다란 범선이 나타났다.

범선 위에 탄 왕자와 무대 반대편에서 그런 왕자님을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는 순진무구한 인어 공주에게 조명이 집중되고, 파도 소리를 제외하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가운데 두 사람의 대사가 엇갈릴 듯 겹쳐졌다 다시 멀어지길 반복했다.

엘리자베스는 두 손을 꼬옥 맞잡고 인어 공주 역을 맡은 여주인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화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미인은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푼을 보고 거울이라고 생각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천진난만한 바닷속 공주님의 표정.

왕자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은 놀람에서 놀람보다 조금 더, 충격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리고 객석을 바라보며 왕자님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그녀는 이미 왕자님에게 푹 빠진 철없고 순수한 아가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식으로 표정이 바뀔 수 있지?'

엘리자베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인어 공주가 마녀를 찾아가는 장면을 지켜봤다.

사람들이 흔히 마녀를 악역이라 표현한 것과 달리 이번 연극에서 마녀는 철저히 인어 공주의 조력자였다.

왕자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파도를 일으키고, 그녀가 원하는 인간의 다리를 주었고, 심지어는 인간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까지 주었다.

다만 딱 한 가지, 그 대가로 목소리와 인어 공주의 아름다움을 지닌 피 한 방울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모든 마법에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훌륭한 탓에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다른 사람들처럼 마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리를 얻고 마침내 마녀가 태워 준 커다란 해마 마차를 타고 해변가로 올라온 인어 공주는 물속과 전혀 다른 뭍의 공기에 괴로워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막이 내리며 1막이 끝났다.

“어떤 것 같아?"

레온하르트는 뭍으로 나온 인어 공주가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리는 장면부터 함께 가느다란 호흡만 이어 가던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막이 내린 뒤로도 한참 뒤에야 겨우 무대의 열기와 여운이 조금 진정된 엘리자베스는 들뜬 얼굴로 레온하르트에게 부탁했다.

“저 여자 배우분, 혹시 공연 끝나고 만나 뵐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그 말에 등 뒤를 올려다봤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후는 시종을 불러 꽃다발과 함께 메시지 카드를 주문했다.

“잊지 못할 시간을 만들어 준 배우들에게 마찬가지로 잊지 못할 선물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폐하, 저들을 궁정으로 부르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많은 귀족들이 연극제를 보고 싶어도 평민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선뜻 오지 못한다고 들었소. 못난 것들 같으니라고.... 그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겠지.”

다시 막이 올랐다.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에 온전히 동작과 표정으로만 상대 배우와 소통해야 하는 역을 과연 저 배우는 어떻게 소화해 낼까.

엘리자베스는 다시 두 손을 꼬옥 모으고 오페라글라스를 들어 배우의 손동작 하나, 표정 하나에 집중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고도 표현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었다.

심장을 감싸듯 손을 들어 올리는 몸 동작,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 위로 꽃잎비를 떨어트리고 한껏 웃어 주기, 몰래 다가가서 끌어안기 등등.

어떻게 보면 순수한 시골 처녀와 그에 어울리는 순박한 총각의 장난질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물론 관객들 모두가 어느새 그들의 애정 어린 모습에 흠뻑 빠져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출신도 모르고, 신분도 모르고, 심지어 말도 할 줄 모르는 이를 왕자와 결혼 시킬 수 없다고 귀족들이 먼저 왕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예법은 처음인지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두고 역시 천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느니 비꼼과 악의가 가득한 대사에선 레온하르트조차 순간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목소리는 낼 수 없지만 귀는 열려 있는 공주님은 필사적으로 왕실에 어울리는 숙녀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인간의 글자를 익히고, 예법을 배우고, 자유롭게 춤추던 것을 그만두고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춤을 출 때면 언제나 치맛자락을 들어 단 한 번도 땅을 밟아 본 적 없는 보드랍고 하얀 발을 내보이던 공주님의 발이 점점 피로 물드는 연출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한때는,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는 자신도 저렇게 자유롭게 춤추었을까?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 사이로 미소가 저절로 번지던 맑고 쾌활하던 공주님은 이제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왕자비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새로 채워 낸 빈 껍데기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맑고 초롱초롱했던 눈에서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그래도 공주님은 오직 한 사람, 왕자만을 바라보며 모든 고통을 감내했다.

바이올린 한 대에서 흐르는 단조 특유의 조용하고 구슬프며 애절한 음악을 바탕으로 배우는 공주의 고통과 고독, 그리고 갈등을 몸짓으로 연기해 냈다.

금방이라도 몸이 터질 듯 두 팔과 다리를 마구 뻗으며 회오리치듯 빙글빙글 돌다가, 돌연 모든 것이 두려운 듯 제 몸을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그래도 다시 도전하겠다며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장면마다 같은 배우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공주가 자유와 사랑을 맞바꾸며 점점 시들고 메말라 썩어 가는 생선 꼴이 되는 사이 왕자는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비천한 여자와의 사랑 따위에 눈이 멀어 왕위를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미리 정해진 대로 타국의 공주님을 왕비로 맞이하며 왕관을 쓸 것이냐.

왕자는 갈등하고 또 갈등했다.

거울 앞에서 솔직한 자신을 마주하는 장면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시계탑의 주인 미미르를 만나러 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왕자를 응원했다. 그가 직접 결말을 바꾼 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후회하기 전에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귓가에 속삭이고 싶었다.

공주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몰래 뭍으로 나온 마녀는 해변가의 동굴 속에서 그녀가 탐냈던 젊고 아름다우며 생기 넘치는 공주 대신 텅 빈 눈을 한 우아한 숙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녀는 그녀가 원한다면 다시 인어의 꼬리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목소리 또한 돌려줄 수 있으나, 마법을 다시 되돌리는 대가로 왕자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공주는 목소리 대신 시계를 들어 보였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왕자는 그들의 대화와 몸짓을 동굴의 그림자 속에 숨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대망의 하이라이트자 결말 장면이었다.

공주는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춤추고 또 내면의 갈등을 몸 밖으로 내쫓았다.

방백으로 전해지는 공주의 속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왕자 또한 같은 시각, 공주의 바로 옆 방에서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자유가 필요한 공주님과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차마 막을 수 없던 왕자님은 침대 위로 자신의 왕관과 왕실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공주의 방으로 향했다.

“내 사랑, 나와 함께 바다로 돌아갑시다. 그대에겐 바다가 필요하고, 나는 그대가 필요하니 나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 선원이 되어 그대 곁에서 함께 바다를 누비겠소.”

공주는 전혀 상상도 못한 왕자의 결론에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자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후계 싸움에 질리다 못해 완전히 내쫓기다시피 밀린 탓도 있었지만 사실 처음 공주를 만난 순간 바다의 선원이 되고 싶었노라고 왕자는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선원이 되면... 그렇게 항해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한번 그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공주는 무엇을 말하려는 듯 연신 입만 달싹였다. 아, 아아, 아으으. 단어조차 되지 못한 흉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1막에서 바닷속 자매들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사람과 정말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흉했다.

배우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커다랗게 울멍울멍한 눈물이 그득하게 담긴 표정으로 공주는 왕자의 품에 안겼다.

다시 막이 내려오고, 올라갔다.

공주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었다.

무지갯빛 비늘을 가진 하반신은 그녀가 끝내 자유를 선택했다는 증거였다.

바다 위에서 여전히 스푼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며 공주는 언제 메마르고 빛을 잃었냐는 양 활기차고 명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앉아 있던 바위 근처로 커다란 범선 한 척이 다가왔다.

난간 위로 제독도, 일등 항해사도 아닌 아직까진 가장 낮은 등급의 선원인 왕자의 모습이 보였다.

공주는 왕자에게 손을 흔들며 거센 파도를 잠재우고 순풍을 부르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선장의 허락을 받아 공주가 있는 바다로 내려온 왕자는 어쩐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공주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공주는 잔잔하게 웃으며 그의 품에 안기고 먼저 입술을 탐했다.

마녀는 겉으로는 계획이 엉망이 되었노라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다는 등 중얼거리며 가장 먼저 무대에서 퇴장했다.

마지막까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막이 내려갔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친 건 황제였다.

황후는 벌써 세 번째 손수건을 바꿔가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황제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는데 그 누가 함부로 불평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서 무대 인사를 위해 다시 등장한 배우들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폐하.”

황제는 손수건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는 황후를 걱정스럽게 보살피며 귀를 기울였다.

“만일 폐하께서도 황위를 포기하실 수 있으셨다면, 저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요?"

황제는 물론 앞에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조차 흠칫할 만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해 본 말이에요. 저들이 황궁으로 오는 날이 벌써 기다려지는군요.”

훌쩍거리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 그녀가 부탁한 대로 호위 무사 하나만 대동한 채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황후가 주문한 꽃다발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카드에 어떤 문구를 써야 할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문장을 적어 꽃과 함께 주연 배우의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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