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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51화 (51/130)

51화 시계태엽은 다시 감기고(1)

황후의 말대로 언제 폭풍우가 몰아쳤다는 양 날씨는 온순하게 돌아와 있었다.

새벽 해와 함께 돌아온 갈매기들은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바다 위로 날개 모양 물결 그림자를 자아냈다.

뱃사람들은 마나난의 이름을 찬양하며 굳게 묶어 두었던 두꺼운 매듭을 풀고 다시 그들의 배를 바다 위로 내보냈다.

하늘과 바다가 다시 맞닿아 빛으로 부서져 내리는 맑은 날이었다.

모두가 유리창 너머로 무지개를 그리는 따스하고 하얀 햇살 한 조각씩을 입에 물고 있는 와중에 오직 레온하르트만 여전히 폭풍우 속을 뚫고 항해하는 선원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온, 왜 그래...?"

다시 밖에 놀러 갈 수 있다는 말에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마친 엘리자베스는 잔뜩 딱딱하게 굳은 레온하르트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휘휘 흔들어 보았다.

"으...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은 언제쯤 등대로 갈지 의논하고 있는 황제와 황후에게 고정했다.

“역시 저녁이 좋겠지요?"

할 수만 있다면 말리고 싶었다. 등대로 가지 말라고, 저녁에 절벽의 바위를 거닐지 마시라고.

그러나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엘리자베스와 함께 그녀를 따라가 황후가 헛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달래는 것뿐이었다.

“저녁 먹고 노을 보러 등대로 간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런 날이면 노을도 무척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일 거래.”

평소라면 반색을 하고 반겼을 엘리자베스의 말이 반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어마마마께서 모든 것을 내버리시면 어쩌지?

엘리자베스를 그냥 이곳에 있으라고 할까?

하지만 벌써부터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서 춤추듯 하늘거리는 걸음으로 걷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 보자. 설마... 설마 어마마마께서... 아닐 거야... 절대 아닐 거야......’

차라리 하루의 시간이 평소의 두 배로 늦게 흘러갔으면 하는 레온하르트의 마음보다 빨리 등대로 가서 노을 구경을 하고 싶은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조금 더 컸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황제와 황후는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단추 구멍이 엇갈린 것도 모른 채 옷을 입으며 어마마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레온, 단추가 엉망이야.”

엘리자베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언제든 단정하고 도도하며 기품 있는 황태자의 태도를 유지하던 그는 지금 셔츠 자락이 절반은 바지 속으로, 남은 반은 밖으로 튀어나온 데다 단추도 엉망으로 꿰어 입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혹여 누가 보기 전에 그를 방으로 끌고가 문으로 밀쳐 세웠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레온 하루 온종일 이상했던 거 알아? 갑자기 등대 주위에 울타리가 쳐져 있는지 질문하질 않나, 직접 먼저 가 보겠다며 고집을 피우지 않나....”

“내가... 그랬어....?"

이것 봐라? 엘리자베스는 황당하단 투로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봤다.

눈앞의 황태자는 이미 영혼이 반쯤 빠져나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려던 엘리자베스는 작은 손으로 레온의 뺨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찰싹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 혹시 내가 노을에 눈이 멀어 발이라도 미끄러지면 지켜 줄 사람은 레온밖에 없잖아.”

그 말에 레온하르트의 빛이 반쯤 꺼져 있던 자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맞아....”

"응? 뭐가 맞아?"

레온하르트의 단추를 엇나간 부분부터 전부 풀어 내려가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길로 엘리자베스를 꽉 끌어안았다.

“레, 레온....?"

셔츠 단추가 반쯤 풀어지며 드러난 맨가슴 그대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품에 안고 그녀의 향을 흠뻑 들이마셨다.

그제야 하루 온종일 머릿속에서 끝없이 메아리치던 모든 생각들이 천천히 소용돌이쳐 가라앉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아, 리지.”

얼떨결에 레온하르트에게 안긴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굳어 눈만 깜빡였다.

레온하르트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 훅 풍겨 온 향기는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녀의 얇은 발목에 족쇄를 채워 놓았다.

요 며칠 바닷가에서 지냈다고 평소 그가 쓰는 민트 향 비누 냄새 대신 조금 비릿하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는 손을 뻗으면 그대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괜찮아. 이번에야말로 전부 지켜 보이겠어.”

“전부? 전부라니?"

“엘리자베스도,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네 미래도, 내 미래도, 그리고 네 행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야.”

엘리자베스는 몸에서 풍기는 바다 향으로 자신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옭아 맨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아플 만큼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다친 짐승이 바위틈을 찾듯 그녀를 끌어안았던 레온하르트는 이제 반대로 그녀를 품어 주는 든든하고 따스한 항구가 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즐겨 사용하는 향수의 향이 이랬던가?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엘리자베스에게서 풍기는 향은 모든 불안한 생각을 지워 내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었다.

이렇게 소중한 이를 왜 나는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마냥 받아 주고 또 품어주고, 보듬어 주는 사람에게 왜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걸까.

썰물과 함께 물러갔던,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미래의 후회가 다시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애써 웃어 보이며 그녀를 놓아 주었다.

“....괜찮아?"

엘리자베스는 가장 먼저 레온하르트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진 몰라도 다행히 단추 위치를 맞춰서 끼울 수 있는 평소의 레온하르트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마지막으로 뒤집힌 셔츠 깃을 다듬어 주며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어째 시녀들이며 시종들, 황제와 황후의 표정이 이상야릇했다.

꼭 전부 다 이해한다는 양, 흐뭇하다는 미소를 듬뿍 물고 있는 얼굴에 의아해하던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조금 전까지 문에 기대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꼭 맞잡은 손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놓아 버렸다.

"크흠, 흠... 가... 갈까요?"

마냥 어린애처럼 손을 잡는 대신 정식으로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며 레온하르트는 헛기침만 반복했다.

엘리자베스 또한 발그레한 얼굴을 모로 돌리며 수줍게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 * *

황후가 사랑하고 또 자랑할 만한 절경이었다.

등대로 향하는 내내 엘리자베스는 소금기 어린 바람 속에 섞여 온 달큰한 꽃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가 아직 물러나지 않은 폭풍우의 거센 바람에 마구 펄럭이며 그녀의 여린 실루엣에 찰싹 달라붙었다.

레온하르트는 혹여나 그녀가 추워하진 않을까 염려하며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로 재킷을 덮어 주었다.

레온하르트 특유의 톡 쏘는 듯한 강렬한 민트 향과 모든 삿된 것들이 물러난 뒤의 맑은 바다 냄새, 그리고 들꽃 냄새가 들숨 한 번마다 엘리자베스의 온몸을 타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등대 뒤편에는 미리 황실 가족들을 기다렸다는 듯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의자 앞에 울타리가 쳐진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울타리도 있고, 아바마마도 있고, 어느새 어마마마 곁에 자리 잡고 앉아 버린 엘리자베스도 있었다.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여전히 마음을 졸이며 레온하르트는 황후의 옆얼굴만 쳐다봤다.

금빛 석양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며 우아한 옆선을 따라 황금빛 선이 황후의 이마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마마마께서 저렇게 아름다우셨던가. 레온하르트는 순간 숨 쉬는 것도 잊고 황후를 지켜보았다.

“아름다우냐?"

"아름답습니다. 어마마마께서 꼭 황금과 오렌지로 물들인 얇은 베일을 걸치신 것 같습니다.”

"이놈아, 황후를 보는 것은 내 몫이니 너는 네 약혼녀나 보거라.”

“그쪽이었습니까? 엘리자베스야 구태여 제가 말을 할 필요가...."

없군요. 레온하르트는 결국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입을 헤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는 피식 웃었다.

두 남자에게 석양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황후와 엘리자베스는 불꽃처럼 화려하고, 황금처럼 반짝이며, 수천 조각으로 박살 난 거울에 비친 빛처럼 바다 위에서 흔들흔들 떠다니는 노을을 한 조각조차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꼭꼭 기억했다.

그리고 황제와 레온하르트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저들의 반려들을 보며 가슴 설레 했다.

엘리시움에게 천사의 후예라는 이름을 가져다준 엘리자베스의 환상적인 은발은 이제 석양에 완전히 잡아먹혀 정수리부터 귀한 향유를 뿌린 듯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솜털이 남은 여린 볼 위로 빛이 비치자 황홀한 장관에 쭈뼛 서 버린 솜털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언제까지고 어린 줄로만 알았던 얼굴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어느새 오똑하게 자리한 콧대며 도톰한 입술, 발그레한 볼이 감히 장담하건대 어떤 여신과 견주어도 부족함 없는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은, 아직은 겨우 절반만 핀 꽃봉오리였지만 이미 레온하르트의 심장 위로 가장 굵고 커다란 뿌리를 뻗어 버린 꽃이었다.

저 꽃이 만개하는 순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엘리자베스를 향해 뻗으려던 손을 붙잡아 거두며 침만 꿀꺽 삼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옆에 앉아 있는 것 정도는 되겠지.

레온하르트는 헛기침을 하며 황후와 엘리자베스 사이를 파고들었다.

얼떨결에 옆으로 밀려난 황제는 오히려 잘되었다는 양 아예 무릎 위로 황후를 앉힐 기세로 그녀의 허리를 한 번에 휘감아 끌어안았다.

세기의 사랑이라 불리며 한동안 제국 신문 일면을 장식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심장이 불타는 것처럼 새빨간 석양을 배경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맞대고 조금 더 서로에게 품을 내어 주고 또 파고들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엘리자베스만 바라보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질겁하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이끌고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등대 옆으로 이동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선 대체, 체통이라는 걸, 내가 미쳐 정말!'

두 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미래의 며느리와 아들 앞에서 대체 무슨 짓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며 의아해하는 엘리자베스를 앞에 두고 레온하르트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여기는 왜...?"

“어, 어어... 그러니까... 여기서 보는 노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잔디밭 위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 황후의 치맛자락이 걸쳐져 있었다.

눈앞에는 석양과 밤하늘이 물감처럼 섞여 들어가는 또 다른 장관이 연이어 펼쳐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재킷을 돗자리 대신 깔아 주며 엘리자베스를 그 위로 앉혔다.

이렇게 둘만 있는 게 얼마 만이더라?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또 한참만의 일인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몰래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보며 그녀 쪽으로 엉덩이를 쪼짝쪼짝 움직였다.

그리고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바닥을 짚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향해 엉큼한 손가락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옮겼다.

“어휴, 레온하르트 바보!"

그가 엉덩이를 움직일 때부터 모든 것을 눈치채고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던 엘리자베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먼저 레온하르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버렸다.

이대로 모르는 척,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입이라도 맞춰 준다면 좋겠다고 엘리자베스는 몰래 욕심내었다. 그러면 차라리 안심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서... 석양보다 네가 더 예뻐서 그랬어.”

같은 얼빠진 말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참 갈등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장밋빛 뺨을 콕 찌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거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그런 건가?

에라 모르겠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딱 감고 아랫배에 힘까지 주며 엘리자베스의 보드라운 뺨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슬조차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에 남몰래 피어난 장미 꽃잎처럼 황홀한 향과 보드라움에 순간 모든 감각이 아찔함을 느꼈다.

이렇게 심장이 마구 뛰어도 괜찮은 걸까? 레온하르트는 덜컥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잔디를 뜯어다 레온하르트를 향해 던졌다.

“레온하르트 황태자 전하, 정말로 바보!”

말과 달리 겨우 볼에 하는 키스에도 그녀의 작은 심장은 이미 잔뜩 졸아들고 홀라당 타 버려 쓰라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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