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폭풍우 치는 해변(3)
총 외에도 구멍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끄집어낸 건 사슴뿔 모양의 붉은 산호와 은가루를 넣어 만든 유리구슬, 자그마한 장난감 칼 따위였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아.”
“나도 그래.”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전리품을 바닥에 늘어놓으며 감상을 내뱉었다.
황후, 아니 귀한 가문의 영애가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기엔 너무 수수하고 보잘것없는 장난감을 왜 어마마마께선 벽까지 뚫어서 감춰 두신 거지?
“일단은 어마마마를 모셔 와야겠다. 리지, 여기서 기다릴... 알았어. 같이 가자."
나를 여기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이야? 그렇게 말하며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마주한 순간 레온하르트는 씩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일으켜 세웠다.
"보물을 찾았구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황후는 두 사람이 양손 가득 가지고 온 것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찾았니?”
"음... 어마마마께서 쓰시던 방의... 벽 안에서요.”
레온하르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는 그 말에 눈만 몇 번 깜빡이다, 이내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옆에 놓여 있던 쿠션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화, 황후?"
“어마마마?”
황제와 레온하르트가 기겁을 하며 달려들었다.
"그 방... 그 방은 내가 황궁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방이었단다.”
쿠션에 묻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황후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황궁으로 가기 전날, 황후는 어린 시절 형제들과 나눠 가졌던 소중한 추억들을 그곳에 숨겨 두었다.
큰 오라버니가 무역선을 타고 오가며 가져다준 산호, 병에 걸린 오라버니가 죽기 직전 그녀의 손에 올려 준 유리구슬, 장난기 많고 나이 차가 가장 적었던 막내 오라버니가 황태자비 자리를 때려 치우고 싶으면 차라리 기사나 되라며 준 장난감 칼, 그리고.
“프레이야....”
황제는 하얀 이불 위로 올려놓은 권총을 보며 나지막하게 황후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권총, 그것도 실탄이 들어 있는 녀석을 그곳에 넣었던 걸까.
혹시라도 황실 생활을 견딜 수 없다면 고향으로 돌아가 총을 사용하려던 생각이었을까.
불안함과 걱정에 황제의 훤칠한 이마 위로 깊은 골이 생겼다.
“....이제는 저에게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황후는 가까스로 쿠션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이제는, 이라는 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황제는 물론 레온하르트 또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두 손을 뒤로 모은 채 총을 관찰하고 있었다.
검보다 더 빠르고, 가볍고, 무시무시한 상처를 남길 수 있고,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처음 본 순간 엘리자베스는 강렬한 호기심과 흥미를 느꼈다.
“어... 황후마마.”
"왜 그러니, 아가?"
엘리자베스는 안 될 거라고 내심 짐작하면서도 황후에게 부탁했다.
"이 총, 제가 가져도 될까요?"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 앉았다.
그러나 부모님 앞에서 약혼녀의 어깨를 붙잡고 그게 무슨 말이냐 추궁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그녀를 추궁하는 건 황후와 황제의 몫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참 입술만 잘근거렸다.
"리지....”
레온하르트 또한 초조함과 불안함에 괜히 바닥 모서리만 노려봤다.
설마 엘리자베스도 황후와 같은 생각으로 총을 가지려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 전하를 지켜 드리고 싶어요.”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의외의 말이었다.
"나, 나를?”
레온하르트는 눈만 껌뻑이며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놀이.... 전하께서 소드 마스터가 되신 그날 밤,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먹었으면 저는... 저는...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고... 그게 너무 분해서... 분하고 또 서러워서....”
엘리자베스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투였다.
점점 웅얼거림에 가까워지는 문장이었지만 황제와 황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 혼내기보단 오히려 기특하다고 칭찬해야 마땅한 마음가짐이었다.
하지만 아직 엘리자베스는 어렸다. 총 같이 위험한 물건을 다루기엔 조금 더 자라야 했다.
황후는 엘리자베스를 손짓으로 가까이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황태자를 지키고 싶니?"
“전하를 지켜 드리고 싶어요. 제 몸을 스스로 지키고 싶어요. 전하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기특하기도 하지.”
황후는 엘리자베스의 당찬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 위로 짧게 키스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총은 아주 위험한 물건이란다.”
“여... 역시 그렇지요?"
역시 안 되는구나. 엘리자베스는 실망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웃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자라면 배우자꾸나. 이 황후가 직접 가르쳐 줄게.”
"네?"
"황후!"
“어마마마!"
황후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언제까지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조의 위기 앞에서 애꿎은 혀만 깨물고, 인질이 되어 아군의 발목을 잡고,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되는 짐으로 있을 수는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생각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일국의 황후가 될 아이가 위험할 일이 대체 무엇이 있겠소.”
황후는 물끄러미 황제를 쳐다보았다. 정말 모르겠냐는 눈빛이었다.
“...크흠, 흠.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제야 황후는 다시 웃었다.
“이 물건들은 황궁으로 돌아갈 때 가져가야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할 수만 있다면 이 바다 전체를 황궁 앞에다 옮겨 놓고 싶은 짐의 마음을 잘 알지 않습니까.”
황제의 다정한 말에 황후는 웃으며 그의 든든한 품에 몸을 기댔다.
“참, 그러고 보니 저를 대신하여 보물을 찾아 준 우리 아가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내려 줘야겠군요.”
“황후의 말이 지당하오. 혹시 원하는 것이 있느냐?"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바깥 외출이 거의 금지당한 지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었다.
"외출을 허락해 주십시오.”
"윤허하여 주세요. 네에?"
엘리자베스는 입술까지 내밀며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황제와 황후는 졌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된 연극제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저택 안에만 가둬 놓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만세!”
레온하르트는 만세를 부르며 냉큼 엘리자베스와 허공에서 손뼉을 마주쳤다.
“비가 그치는 대로 등대를 보러 갈까 하는데, 황태자와 엘리자베스도 함께하겠니?"
어느새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었다. 어쩌면 내일 하루 정도는 맑을지도 모르겠다며 황후는 날씨를 점쳤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등대라는 말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알아차렸다.
'레온...?'
레온하르트의 제비꽃빛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마마마... 등대 쪽은 절벽이라 위험하니....”
"폐하께서 함께하실 건데 무엇이 걱정이니?"
그 폐하께서 어마마마께 죽음이란 자유를 선물하실까 봐요.
레온하르트는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입만 달싹였다.
“황태자?"
황후가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레온하르트는 핫, 하며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요 최근 어마마마께서 기운이 별로 없으시던 차에 괜찮으실까 걱정이 되어...."
"여름 더위를 조금 먹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의사를 부르려고 했어요. 황태자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일 엘리자베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줄 채비나 하렴."
돌려 말하는 축객령 앞에서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얌전히 물러나야 했다.
"레온... 표정이 안 좋아.”
엘리자베스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레온하르트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어디 아파?"
황후가 등대로 가겠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레온하르트의 낯은 하얗게 질리고 손마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리지.”
"듣고 있어.”
레온하르트는 신 앞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신자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내가 만약, 엘리자베스 네가 죽음을 원한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면... 나는 너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할까?"
“레, 레온?”
"어마마마께서 새장을 벗어나는 방법은 정녕 그뿐일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미래는 절대 바뀌지 않는 걸까? 미미스 브룬느가 그날 한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지? 리지, 리지... 나는 두려워.”
“뭐가 그렇게 두려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엘리자베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혹시라도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 이 모습을 볼까 봐 불안한 시선으로 발을 동동거렸다.
맞닿은 옷자락 너머로 마구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또다시 잃을까 봐, 너를 행복하게 만들겠노라 약속하고 또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고작 좋아하는 사람의 웃음 하나 지키지 못한 사람을 황제로 모셔야 할 이들이 가엾고, 또 절망에 빠져야 할 미래의 내가 가여워서, 그래서, 그래서....”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황태자 전하.”
엘리자베스는 두서없이 마구 중얼거리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양손으로 챱 소리 나게 찰싹였다.
빛을 잃었던 자색 눈동자에 가까스로 빛이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싱긋 웃었다.
"괜찮아. 레온은 잘할 거예요.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잘 모르지만... 레온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레온 곁이라면 늘... 늘....”
"리지, 내 곁에서 행복할 자신 있어?"
레온하르트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맞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그렇게 해 줄 거잖아? 그러니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레온을 믿어.”
그 말에 그제야 레온하르트는 조금 진정하고 눈앞을 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선 전부 괜찮을 거라며 그를 토닥여 주고 있었다.
은방울꽃과 수선화, 연꽃을 비롯하여 온갖 맑고 청아한 향이 날 것만 같은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대고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순간 긴장하여 숨을 멈췄다. 그가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 자세로 몇 번 숨만 고를 뿐, 별다른 행동 없이 다시 그녀를 놓아 주었다.
오히려 실례했다며 볼을 긁적이는 그의 귓불이 붉었다.
엘리자베스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몰라도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고, 슬쩍 손등을 대어 본 뺨이 후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리지.”
"내가 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잡으며 씩 웃어 보였다.
오늘은 날이 궂어 불꽃은커녕 복도의 촛불을 더 환하게 밝혀야 할 노릇인데 어째 레온하르트의 얼굴 뒤로 태양처럼 밝은 빛이 보이는 듯했다.
“일찍 쉴까? 바다에서 보는 일출이나 일몰은 정말로 아름답거든. 리지 너에게 꼭 보여 주고 싶어.”
“....레온, 이전에 바다에 다녀온 적 있어?"
“으, 응?"
엘리자베스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그동안 영 신경 쓰이던 것을 지적했다.
“바다는 처음이라면서, 되게 많이 경험한 것처럼 말하길래.”
레온하르트는 아차 하며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를 끝까지 추궁할 생각은 아니었던지 푹 쉬라는 인사와 함께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복도에 남겨진 레온하르트는 미미스 브룬느가 말한 신중함이란 단어만 속으로 외우고 또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