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폭풍우 치는 해변(2)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잡고 본격적으로 방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마치 방의 주인이 금방이라도 돌아오길 바라는 것처럼 방은 일부러 정리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펼쳐진 채 가름끈 대신 먼지가 두껍게 앉은 책 위로 후, 하고 불어 내자 뱃사람들의 모험담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등장했다.
“벽에 저거... 분명 그거지?"
“배를 움직일 때 쓰는 키가 왜 벽에 붙어 있지...? 이 방의 주인은 어지간히도 배를 좋아했나 봐.”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레온하르트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좌초되어 기우뚱거리는 배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렸다.
침대 아래에서 갑자기 크고 메마른 손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다.
"어마마마의 형제분 중 한 분의 방일까?”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아.”
손가락으로 무언가 꼽아 보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 찾아본 방의 개수와 황후마마의 오라버니 수는 일치했다.
그 말은 이 방의 주인이 황후, 혹은 장기간 머무른 손님이라는 뜻인데....
“여기 스케치북이 있어.”
"스케치북?"
엘리자베스는 허락을 구하듯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허락 대신 스케치북을 대뜸 펼쳐 보았다.
첫 장부터 열 번째 페이지까진 선 연습, 그리고 구체와 정육면체, 사면체 따위가 나타나더니 서툰 수채화로 그린 정물화 따위가 등장했다.
“서명은... 없는 것 같지?"
“응.”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물화를 그린 사람은 아직 붓을 다루는 방법도 모르는 화가였지만 어딘지 그녀가 본 적 있는 화풍이었다.
“...어마마마의 가족들이군."
빠른 속도로 두꺼운 스케치북을 넘겨 보던 레온하르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렇게 변색된 그림 속에 활짝 웃으며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선 소년들이 있었다.
맏이보단 차라리 부모라 해도 믿을 것 같은 첫째를 비롯한 형제들은 가장 어린아이까지 해군 제복을 입고 있었다.
"황후마마께선 안 보이시네...?"
“그림에 너무 집중하시느라 정작 어마마마의 자리를 남겨 놓는 걸 잊으신 모양이야.”
종이와 맞닿는 앞 페이지에서 레온하르트는 황후의 자화상 조각을 발견했다.
구도를 망치기 싫어 아마 적당한 곳에 자신의 얼굴만 붙여 놓았던 모양이었다.
"모두들 행복해 보여....”
엘리자베스는 혹시 손자국이 남을까 봐 조심스럽게 종이 위 허공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어마마마께선... 가족 이야기를 그다지 해 주지 않으셨어. 오히려 시녀들이나 역사서를 통해 배웠지.”
레온하르트의 목은 완전히 잠겨 있었다.
어린 날의 치기로 제 족보를 궁금해했던 레온하르트는 그 길로 황후를 찾아갔다.
황후는 어딘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가족들의 이야기 대신 책 한 권을 안겨 주었다.
책 속에는 황후의 가문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닷가에 위치한 공작가는 대대로 걸출한 해군들을 배출해 낸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의 집안이었다.
그러나 공작가에는 간간이 피가 멈추지 않는 병에 걸린 아이들이 태어났고,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초대 가주가 터를 잡을 때 바다의 신 마나난과 거래를 한 탓이라며 수군거렸다.
세월이 지나 의학이 발전한 지금에서야 그 병이 혈우병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또 레온하르트가 문제의 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잠잠해졌지만 한때는 황후를 폐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제법 시끄러운 논란거리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 중 몇은 그 병으로 인해 사망하기도 했고 말이지....’
레온하르트는 그림을 통해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유난히 혈색 없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분들이 살아 계셨다면... 나는 조금 덜 외로웠을까?”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함께 그림을 내려다봤다.
그녀 또한 친가의 족보는 싫어도 달달 외우며 어느 귀족 집안의 몇 대 안주인이 엘리시움 출신인지 알아야 했지만 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외로웠어?"
"그랬던 것 같아. 늙은 대신들이 손녀나 외손녀를 언급할 때마다 나에게 조부님이 계셨다면 어땠을까 상상했으니까.”
역사책과 황실 초상화를 통해 만나 뵙게 된 조부님들을 보고 그 생각은 싹 사라졌지만.
레온하르트는 조모 되시는 분이 얼마나 당시 황태자비였던 어마마마께 깐깐하고 냉정하게 구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어마마마를 대신하여 초상화에 대고 혀 짧은 발음으로 '할마마마 미워요!'라고 소리친 적 있다고 엘리자베스에게 추억담을 늘어놓았다.
“정말로 그랬어?"
"어쩐지 초상화 중에 유난히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무뚝뚝해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던 분이 계셨는데, 그런 분이 할마마마셨다면 나는 아마 진작 질식해서 죽었을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은빛 종소리로 까르륵 웃었다. 황후의 스케치북 속에 남아 있던 다섯 살, 고집불통에 하라는 일은 절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했다던 그다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황후마마의 방을 이렇게 엉망... 아니, 꼭 다시 돌아오시길 기다리던 것처럼 남겨 두신 걸까?"
심지어 침대 위의 이불조차 한 뭉텅이로 덩어리져 있었다.
"돌아오시길 기다려... 리지 말대로 그런 것 아닐까?"
"응?"
"할마마마께서 어마마마를 굉장히... 음... 못마땅해하셨던 모양이야. 여차하면 황궁에서 하룻밤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올지도 모르니 내 방을 이대로 내버려 두라고... 그렇게 책에 써 있었어.”
"황후마마께서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어?"
엘리자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의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의 황후가 할 법한 말과 행동이라기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 어마마마는 다행히 계속 황궁에 계셨던 것 같지만. 이 방은... 어쩌면 사용인들이 정말 어마마마께서 돌아오셨을 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순식간에 잊을 수 있도록 일부러 이렇게 해 놓은 게 아닐까?"
“일부러....”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가문을 이어받을 남자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바다 위에서 전사하여 마나난의 품으로 돌아갔다.
혈우병을 앓던 남자 형제들 또한 열 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렇다고 이미 다른 가문의 주인이 된 방계 혈통의 아이에게 공작위를 물려주는 것도 애매하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황후의 가문은 역사책 속에 박제되었다.
“....엘리시움도 이렇게 되는 걸까?"
"리지?"
"나는 외동이고... 마땅한 친척도 없으니까... 이대로 우리 가문도 끝나는 걸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아서 사라져 주면 얼마나 좋을까.
레온하르트는 아직 가족의 정이 남아 있는지 어두운 표정이 된 엘리자베스를 달래며 벽지 사이에 숨겨진 문양이나 묘하게 발소리가 다르게 울리는 바닥이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 자리에서 콩콩 뛰기 시작했다.
“리지 너는, 어땠으면, 좋겠어?"
검푸른 융단 곳곳을 밟고 뛰었지만 아래 공간이 텅 비어 있는 곳 특유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벽지 또한 눈이 빠져라 쳐다보았으나 전부 평범한 덩굴무늬였다.
“....모르겠어.”
엘리자베스는 서가에 꽂힌 갖가지 모험담과 여행 서적의 제목을 확인해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네 가문이 너를 마지막으로 끝난다면, 그동안 너처럼 황후 수업이며 신부 수업을 받아야 했던 영애들 또한 없어진다는 거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쩍 엘리자베스를 떠보며 침대 아래를 살폈다.
침대 아래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만 흠뻑 뒤집어쓴 레온하르트는 머리를 탈탈 털고 재채기를 하며 엘리자베스의 눈치만 살폈다.
“...그런가...."
"물론 다음 대의 엘리시움 공작이, 만약 생긴다면 말이야. 생긴다고 해서 무조건 리지 네 부모님... 같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엘리자베스는 벽에 걸린 장식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제국의 역사와 함께하는 가문이 사라진다는 건 어쩐지 슬플 것 같았다.
“제국의 초대 황후마마도 엘리시움 출신이랬지?”
“그랬었나? 아, 그랬던 것 같다. 이자벨라... 미들 네임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그분도 나처럼 자랐던 걸까?"
“설마 처음부터 그랬겠어?"
“그렇겠지...? 그럼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엘리자베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
반질반질한 그녀의 구두코에 금빛 반사광이 비쳤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고 황금빛으로 번쩍였던 주인공을 찾았다.
“...황후마마께선 정말 바다와 해적, 해군 이야기를 좋아하셨나 봐.”
조금 전 그녀를 혼비백산시킨 해골 뒤로 두 개의 커틀라스가 겹쳐진 채 걸려 있었다.
아마 해군이었던 형제들이 선물로 가져다준 걸 거라며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안심시켰다.
"묘하게 비뚤어져 있네. 어마마마께서 이런 건 또 못 견뎌 하시는 분이시거든. 혹시 한쪽으로 무게가 쏠렸나?"
레온하르트는 발돋움을 하며 비뚤어진 장식을 다시 고쳐 놓으려 했다.
그러나 키가 닿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깡충깡충 뛰며 팔을 뻗었지만 그녀의 팔 역시 장식에 닿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리지, 네가 올라가.”
레온하르트는 거리낌 없이 바닥에 두 무릎과 손을 대고 발판을 자처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당황했다.
“저기 멀쩡히 의자가 있는데 왜...?"
“저, 저건 건드리면 안 되는 의자잖아!”
“그렇게 따지면 이 장식물도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건 어마마마께서 찾으시려던 물건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선뜻 레온하르트의 등 위로 발을 올리지 못하고 주저했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자인데, 황태자인데, 좋아하는 사람인데, 어쩐지 미안하고 또 부끄러워서 좀처럼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면 목말 태워 줄까?"
레온하르트는 슬쩍 옆을 보며 말했다.
“목말도 아니면... 그냥 업어 줄까?"
그제야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엘리자베스를 업고 벽 쪽으로 다가갔다.
"어때? 뭔가 잡혀?"
"으응... 아, 잡았다!"
"됐어?”
“됐다! ...어? 레온, 여기 뒤에 구멍이 있어. 구멍... 속에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장식을 슬쩍 밀어내자 누가 봐도 사람이 뚫은 것이 분명한 구멍과 그 속에서 반짝거리는 물건들이 보였다.
“혹시 어마마마께서 말씀하신 게 여기 있는 이 물건 아닐까?"
“그런가? ...꺄악!"
레온하르트는 순간 뒤로 휘청거리는 엘리자베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허리에 잔뜩 힘을 줘야 했다.
구멍 속에 팔을 집어넣었다 꺼낸 엘리자베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리품의 정체에 기함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총이잖아?”
"초, 총이 왜 여기 있어?"
“어마마마께선 대체 왜 이런 걸 가지고 계셨던 거야?"
레온하르트는 황당하다는 투로 낡고 거미줄이 엉킨 총을 발로 톡 건드렸다.
“...저, 레온.”
“응?”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등에 업힌 채 어깨 너머로 총을 구경하다 문득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슬슬 나 내려주면 안 될까?"
레온하르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