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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48화 (48/130)

48화 폭풍우 치는 해변(1)

날갯짓 한 번마다 작은 파도를 일으키던 갈매기들이 자취를 감췄다.

노련한 선원들은 구름의 모양새를 보고 혀를 차며 배를 항구로 끌어 올렸다.

백사장을 원고지 삼아 이야기를 써내려가던 에이본도 불안한 표정으로 하늘만 노려봤다.

“오늘 날씨 굉장히 좋다!"

“폭풍이 올 거야.”

“폭풍?"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이 너무 눈부셔서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억울해 발만 동동 구르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레온하르트는 습기를 먹어 눅눅해진 종이를 넘기며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원래 폭풍은 오기 전이 가장 고요한 법이야.”

엘리자베스는 그럴 리 없다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황후는 바다에서 나는 것이라면 아예 냄새조차 맡기 힘들어했다.

시녀들은 혹시나 하며 그녀의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가능한 해산물이 아닌 것을 재료로 요리했다.

“모처럼 고향에 왔는데... 갓 따온 굴 위에 레몬즙을 뿌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폐하께서도 아시죠?"

"알다마다요. 하지만 황후의 상태를 보아하니 굴이 아니라 전복버터구이를 가져와도 먹을 수는 있을지 걱정입니다.”

“휴우... 죽기 전에 또 올 수 있겠지요?"

“무슨 그런 불길한 말씀을. 내년도, 내후년에도 다시 옵시다. 혹시 압니까, 그사이 해산물들의 질이 더 좋아질지.”

“...새우며 조개며 오동통하게 살이 오르려면 그만큼 먹잇감이 풍부해야 하는데....”

황제는 한 박자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폭풍이 오려는 모양이에요.”

“폭풍이요?"

“구름 모양을 보면 알아요. 큰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허어... 당장 내일이 연극제라 들었거늘....”

침대에 기대 누워 창밖을 내다보는 황후의 곁에서 그녀의 손을 토닥여 주며 황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넓은 바다 위로 작은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동그란 호선도 남기지 못하고 바닷물에 녹아 사라진 빗방울은 순식간에 바늘처럼 날카롭고 백백한 폭우로 변했다.

“정말로 폭풍우네....”

“내가 그랬지?"

"어떻게 알았어?"

“구름 모양을 보면 알아. 그리고 갈매기들이 모두 사라졌잖아?"

“비 들어올라, 혹시 모르니 커튼도 치는 게 좋을 거야.”

“커튼까지?"

레온하르트는 유리로 된 테라스 문을 닫고 커튼까지 꼼꼼하게 쳐 놓았다.

언뜻 본 바다는 미친 듯이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연극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거친 바람에 멱살을 쥐어 잡혀 허공을 날아다녔다.

“운이 나쁘면 내일 아침 테라스에서 물고기와 아침 인사를 나눌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운이 나쁘다면 연극제는커녕 황궁으로 돌아가는 일도 어려울 듯했다.

연극제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은 오후 티타임보다 먼저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의 귀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다들 유례없는 폭풍이라며, 바다의 신 마나난이 황제 폐하를 나름대로 환영하는 모양이라고 애써 위안했다.

지붕 위에서 아예 양동이째로 물을 퍼붓는 것 같다고 엘리자베스는 연신 두꺼운 창문을 두드려 대는 비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비 오는 바닷가의 저택이라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

"레온?"

레온하르트는 찻잔 속을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눈만 위로 치켜떴다.

“...듣고 싶어?"

우르릉 쾅. 그의 등 뒤로 번쩍하며 천둥 번개가 쳤다.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한구석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가 들려준 이야기는 어떤 저택에 숨겨진 비밀 이야기였다.

“옛날에... 암초가 많아 배가 좌초되기 쉬운 그런 해안가 절벽 위에 커다란 저택이 있었대....”

암초가 많아 배가 좌초되기 쉬운 해안가 절벽에 위치한 커다란 저택.

등대를 겸하기 위해 저택의 불은 절대 꺼지지 않았다.

폭풍우로 인해 배가 좌초되면 누구보다 먼저 구조를 위해 밖으로 뛰쳐나가는 저택의 주인은 칭송받아 마땅한 심성 고운 사내였으나 저택 안은 이상할 정도로 음침하고 스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런 저택에 한 아가씨가 찾아왔어. 다름 아닌 저택의 여주인 자격으로.”

"그...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이불로 몸을 꽁꽁 둘러싼 채 레온하르트의 이야기에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하지만 저택의 사용인들은 마치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어. 저택의 여주인으로서 마땅히 충성하고 모셔야 하지만... 꼭 인형을 대하듯 다들 차갑고 그녀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는 듯했지. 특히나 시녀장은 그녀가 복도를 지나가는 것만 봐도 걸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뜬 채 있다가, 그녀가 불편함을 느끼고 헛기침을 한 뒤에야 뒤늦게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는 거야.”

"왜... 왜? 그녀는 아무 잘못도 안 했잖아."

레온하르트는 눈꺼풀을 위아래로 벌리며 이야기 속 시녀장 흉내를 냈다.

"그런데 사실 그 저택과 친절한 저택의 주인과 사용인들에겐 아주 무시무시한 비밀이 있었던 거지!"

"히익!"

레온하트르가 팔을 크게 벌리며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 이불을 끌어당겨 눈을 덮었다.

"그 비밀이란 게, 대체 뭐길래...?"

푸른 눈만 겨우 이불 밖으로 빼꼼 내민 자세로 엘리자베스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검은 잉크를 쏟아 버린 듯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과 잠시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천둥 번개를 등에 업고 엘리자베스를 향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건 말이지....”

“우리 아가들!”

“꺄아아아아악!"

"엘리, 엘리자베... 리지! 목, 목 졸려! ...어마마마?”

레온하르트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저택의 비밀을 말하려는 순간 벌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레온하르트의 팔을 꼭 붙잡고 간을 졸이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그 바람에 완전히 혼비백산해 레온하르트의 목에 매달렸다.

그저 그녀를 조금 놀라게 해 주려던 생각이었는데 그 대가로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레온하르트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게 된 황후는 침대 위의 두 아이들을 번갈아 보다 어머, 하고 얼굴을 붉혔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거니?"

“좋은 시간이요?”

“어마마마,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엘리자베스의 얼굴 위로 이불 더미를 더욱 꼼꼼히 여며 주며 레온하르트는 말을 돌렸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속이 메슥거리는 증상은 남아 있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하고 있었니?"

"전하께서 비밀로 가득한 저택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어머? 혹시 그 이야기... 마침 잘되었 구나! 그렇지 않아도 폭풍우 탓에 심심할까 봐 재밌는 걸 가져왔단다.”

황후의 손짓에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비밀이라면 이 저택에도 제법 많이 남아 있단다. 나와 형제들이 어린 시절 시종들과 하녀들 몰래 숨겨 놓았던 것들이지. 내가 황실로 가기 전에 얼추 찾아서 정리하긴 했는데... 마지막 하나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말이야... 괜찮다면 찾아 주겠니?"

"단서는 있나요?"

“이 저택 전부가 단서야. 그러고 보니 딱 엘리자베스 정도로 자랐을 때 숨겨뒀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황후는 짝 하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어느새 이불말이에서 벗어난 엘리자베스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황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어지간한 사내보다 반 뼘은 큰 황후를 올려다보며 내심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 * *

그렇게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등불 하나만 들고 저택 여기저기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황후의 말대로 엘리자베스같이 아직 눈높이가 낮은 사람이 아니면 쉽게 찾기 어려운 곳에 이런저런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이것 봐, 레온, 벽지인 줄 알았는데 찢어진 벽지를 벽지 모양으로 그린 거야!”

“어마마마의 그림 솜씨는 이때부터 대단하셨나 봐.”

언뜻 봐서는 그림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벽지 무늬였지만 자세히 보니 유난히 그곳만 색이 달랐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관찰력에 감탄하며 다음 방으로 향했다.

“여긴....”

"남자가 쓰던 방일까?"

“그런 모양이야. 해군... 살아 계셨다면 나에겐 외삼촌 되시는 분의 방 같은데.”

“그러고 보니 레온도 주위에 친척이 없지?”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 황실이라 여기저기 방계 귀족들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딱히 친척을 만난 기억은 없던 것 같아.”

"그럼 레온도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혼자구나.”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엘리자베스는 최근 꾼 꿈이 신경 쓰이는지 심란한 표정으로 창밖을 살폈다.

창밖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리지!”

레온하르트는 창문을 열려고 하는 엘리자베스를 발견하고 황급히 그녀를 몸으로 막아 세웠다.

“...이런 날이면 바다에 홀리기 쉬워.. 조심해."

"바다에... 홀려...?"

“바다는 뱃사람들의 영원한 무덤이기도 하니까.”

“무,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꺄아악!"

무덤이라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냉큼 창문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어둠이 한순간 물러설 만큼 큰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거렸다.

“리지, 리지? 괜찮아?"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고 귀를 막고 있었다.

그녀 아래에 깔린 레온하르트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손을 들어 엘리자베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이제 좀 안 들려?"

아, 귀를 더 막아 버렸으니 당연히 안들리겠구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미안해!"

다행히 엘리자베스는 금방 자신이 깔고 앉은 것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후다닥 물러났다.

“어떻게 할까, 계속 찾을래?"

"으음....”

“무서우면 그만둬도 상관없고."

“아... 안 무서워!"

“....정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줬다.

무섭지 않다는 말과 달리 레온하르트의 손을 꼭 붙잡고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걸음으로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유, 유령이야아아!"

"리지! 목, 목 조르지 말라니까!"

문을 여는 순간 천장에서 무언가 툭 하며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넥타이를 다시 붙잡으며 매달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에 등불을 비춰본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세 걸음쯤 물러섰다.

"저... 저건....”

“바다, 바다에서 시체가 되살아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 있어! 분명 그거일 거야!”

“리지, 진정해 진정... 대체 이 방의 주인은... 그다지 좋은 취미는 아니군.”

레온하르트는 발을 뻗어 문 앞에 떨어진 것을 툭 건드려 봤다.

“해골 해골이 있었어, 해골이....”

엘리자베스는 거의 넋이 나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응. 해골이네. 검은 천으로 만든 인형 위에 물감으로 대충 그린 수준이지만. 아마 이 방에 청소하러 들어오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나 봐.”

“....인형?"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자베스의 발치에 떨어진 검은 인형 위로 등불을 들어 올렸다.

엘리자베스는 혹시나 해골이 혼자 덜거덕 덜컥 웃기라도 하는 건 아닐지 달달 떨며 천천히 그것에 접근했다.

등불 아래에서 본 인형은 먼지가 듬뿍 쌓여 있었다.

“정말 인형이었구나....”

엘리자베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골 그림이 그려진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숨으며 말했다.

“리지, 정말로 괜찮아?"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언젠가 그의 등 뒤에 섰을 때처럼 레온하르트의 등은 넓고 든든하게 그녀를 지켜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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