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파도는 철썩, 마음은 두근(4)
황실에서 때아닌 작고 수줍은 경사가 일어난 사이 연극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니, 눈과 귀와 코가 남아 있을 새도 없이 바빴다.
전부 얼마 전 찾아와 연극제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에이본과 대화를 나눴던 황태자 탓이라며 인부들은 이를 갈았다.
의상 팀과 무대 디자인 팀, 연출 팀장들은 특히나 레온하르트를 원망하며 에이본이 하루 만에 새로 써 내려간 대본에 맞춰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음악을 담당하는 연주자들조차 잠시 악기를 내려놓고 악기보다 훨씬 무거운 자재들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이본이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그 어떤 새로운 해석이라도 절대 바꿀 수 없노라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에이본이 가져온 해석은 지금껏 보지 못한 신선한 것이었고 또 기존의 해석과 달리 관객과 이야기 속 주인공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었다.
지켜보는 관객에겐 행복한 이야기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에겐 안타깝고 애달픈 이야기거나, 반대의 경우는 지긋지긋하게 봐 온 마을 토박이들도 이런 참신한 해석은 처음 본다며 감탄했다.
결국 에이본의 등쌀과 황태자의 황명, 그리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직접 무대 위로 꺼내 주고 싶다는 예술인들 특유의 욕심에 그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팀장님! 의상 피팅 준비 완료됐습니다!”
가능한 기존 의상을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새로 의상을 디자인한 의상팀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하늘로 날아가던 물거품 연출을 이번엔 바다로 내려보내게 생긴 무대 연출 팀은 장면 전환 방식을 놓고 몇 시간에 걸친 토론을 이어 나갔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에이본 홀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드레스 리허설 시작합니다!"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급작스럽게 결말이 바뀐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임시 극장의 막이 무사히 내리는 것을 확인한 순간,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해냈다. 본 공연까지 겨우 하루 앞두고 마침내 해냈다!
“누누이 말하지만, 에이본. 두 번은 없어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황태자 전하께선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흘리셔선... 제대로 기계들이 작동하다니, 이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머릿속에서 이 대사였는지 저 대사였는지 헷갈려서 미칠 것 같아요! 본 공연 직전까지 읽어도 실수하면 어쩌지? 심지어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도 오시는데!”
“자자, 다들 집중. 우리는 잘 해낼 겁니다. 마지막까지 힘내서 전하로부터 특별 하사품이라도 뜯어내 봅시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냥 잘했다는 말 한마디로 퉁치기만 해 봐, 아주 그냥 내가....”
"네가, 뭐? 해적 가문답게 칼 들고 황궁으로 쫓아가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하여튼 가만 있지 않을 거니깐....”
리허설 직전까지 누구라도 선뜻 건드렸다간 그대로 손끝이 베일 만큼 팽팽하게 날 서 있던 분위기가 겨우 누그러졌다.
에이본은 어린 황태자가 남기고 간 이야기의 씨앗이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꽃으로 핀 것을 보며 뿌듯해했다.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바다를 그리워하며 천천히 말라 죽게 된다.
황후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에이본은 감히 추측했다.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 작고 꼬물거리는 손을 꼭 잡아 주었을 소금기 머금은 바람과 어서 오라며 환영의 인사를 거세게 날렸을 파도 소리는 각인처럼 남아 다시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듣자 하니 황태자비 시절 제법 고생을 하셨다지....'
에이본은 황실 가족들이 있을 저택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디 이번 공연으로 황후라는 답답한 새장에 갇힌 그녀가 잠시나마 다시 자유를 맛볼 수 있기를.
에이본은 그렇게 기도하며 다시 무대 점검을 위해 발을 옮겼다.
* * *
바닷가에 가서 조개껍데기를 줍는 대신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조개와 해산물 모양 초콜릿을 직접 먹여 주고 있었다.
혹시나 초콜릿에서 비린 정어리 냄새가 나면 어쩌나 걱정한 것과 달리 정어리 모양으로 포장된 초콜릿은 여느 초콜릿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달달했다.
정어리 모양 초콜릿 앞에서 잠시 굳어 있던 레온하르트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무척 평온한 표정으로 테라스에 앉아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날이 많이 더운데 녹아내리기 전에 전부 먹을 거야? 아니면 하인들에게도 나눠 줄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얼굴 위로 햇살이 비치자 그녀의 머리 위로 모자를 씌워 주며 툭 내뱉었다.
엘리자베스는 괜히 먼 수평선만 바라보는 그의 귓바퀴가 붉은 것을 눈치채고 책으로 입을 가려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레온하르트는 재차 안심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조개 모양 초콜릿을 집어다 엘리자베스의 얼굴로 들이밀었다.
“아, 해 봐.”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입을 벌렸다.
조금 전부터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입이 심심할 틈도 없이 연신 달콤한 것들을 직접 먹여 주고 있었다.
“꼭 지금 읽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직접 초콜릿이나 달달한 간식을 먹여 주며 서로 사랑 고백을 하는 장면이거든.”
레온하르트는 막 들어 올렸던 컵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팔에 힘을 줘야 했다.
“사랑 고백?"
“좋아한다, 사랑한다, 오직 나만의 부드러운 초콜릿이 되어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문장에 괜히 제 볼이 벌게지는 것을 느꼈다.
"초콜릿 하나 더 먹을까? 제비꽃 사탕도 있는데.”
"초콜릿 말고 이번엔 사탕 줘. 그런데 대체 사랑은 뭘까?”
엘리자베스는 입을 벌렸다. 새콤한 레몬 맛 사탕이 초콜릿의 진하고 농밀한 단맛을 상큼하게 닦아 냈다.
"레온, 좋아한다고 말해 줘.”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순간 덜컹거렸다.
“좋... 좋아해, 엘리자베스, 이렇게?"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떤 식으로 좋아하는 건지도 말해 줘."
엘리자베스는 장난기와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머금으며 레온하르트에게 졸랐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어휘를 끌어올려 엘리자베스의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기적 같은지 구구절절 늘어 놓기 시작했다.
“네 말 한마디에 내 심장은 하루에도 천 번을 넘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 이 정도면 만족해?”
“음... 적어도 책보다는 나은 것 같아. 그 보답으로 초콜릿을 드립니다. 레온도 아, 해 봐.”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주는 초콜릿을 우물우물 씹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라리 낚싯대를 가져올 걸 그랬다며 투덜거리는 레온하르트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제법 책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녀가 오늘 읽고 있는 건 어른들을 위한 동화 모음집이었다.
단순한 동화 속에 얼마나 많은 비유와 상징,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와 사상이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며 엘리자베스는 피서 내내 책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질 만큼 읽고 또 읽은 참이었다.
“여기에 연극제의 원전도 나와 있어.”
“인어 공주 이야기?"
“응. 저번에 레온이 들려준 이야기와 완전 반대되는 이야기라 조금 놀랐어."
"흐응...."
레온하르트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 책은 이미 그 또한 읽은 적 있는 책이었다.
어린아이의 꿈과 희망을 지켜 주기 위해 얼마나 원전이 각색되었는지 알고 그 역시 제법 충격을 받았었다.
“왕자님은 결국 인어 공주의 어떤 점에 반한 걸까? 또 인어 공주는 대체 왕자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원래 사랑에 빠지면 다들 미치는 법이야.”
"그런 거 말고, 이 책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시선으로 동화를 보고 있단 말이야.”
"그럼 역시 떳떳하지 못한 관계?"
“떳떳하지 못한... 관계? 그런 것도 있어?"
레온하르트는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레온하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으로 얻은 배우자가 아닌 진정으로 사랑하는 후처라든가... 리지, 이 이야기는 이쯤 하자. 어린애 정서에 안 좋아.”
“나 이제 어린애 아닌데?"
“어린애 맞아. 그리고 아까 내가 한 말은 비밀이야. 어마마마께서 아셨다간 나는 물론이고 기사단까지 아마 훈계하실걸.”
“기사단은 왜...?"
"내 모든 미성년자의 정서에 좋지 않은 지식은 그 망할 놈들에 의해 강제 주입을 당했거든.”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우리도 정략결혼이지?"
"태중 혼약이니... 그렇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이야?"
“그럴 리가. 내가 엘리자베스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조금 전에도 말했잖아.”
“그럼 후처 같은 것도 안 들일 거지? 황후마마께서 그러셨어. 황실의 후계자는 많을수록 좋다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만, 그만! 거기까지. 대체 어마마마께선 너에게 뭘 가르치신 거야? 리지 네가 있는 한 나는 절대, 절대로! 하늘이 두 쪽 나는 일이 있어도 다른 여자 따윈 눈길조차 주지 않을 거니 걱정하지 마.”
“믿어도 돼? 황후마마께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남자들이 꼭....”
“맹세할게! 내 모든 걸 걸고, 이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의 인생에는 오직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뿐이라고.”
그제야 엘리자베스는 어딘지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나 마카롱 먹고 싶어.”
레온하르트는 친히 몸을 일으켜 엘리자베스의 입에 라즈베리 맛 마카롱을 물려 주었다.
"레온은 내 꿈 꾼 적 있어?"
엘리자베스는 책을 내려놓았다. 비록 악몽이긴 했지만 그녀는 꿈에서 그를 본 적 있는데, 그는 어떨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 내 꿈에 네가 나온 적? 어... 그러니까.”
레온하르트는 아차 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엘리자베스의 미간 사이로 가느다란 골이 생겼다.
"무슨 꿈이었어?"
레온하르트는 고개만 내저었다. 차마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하고 순진한, 손을 대는 순간 그의 색으로 물들 것 같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꿈이었다.
"나는 말해 줬는데, 불공평하잖아.”
레온하르트는 죽어도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한데...? 나온 적 있어. 물론 있지. 몇 번이고 있었는걸.”
“그런데 왜 내용은 말 안 해 줘?"
"그게... 그러니까... 어... 크흠....”
"혹시 나 몰래 혼자서만 맛있는 것 먹는 꿈이었어? 그런 거면 용서해 줄게. 대신 초콜릿 하나만 더 주라.”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초콜릿 껍질을 까서 엘리자베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오늘따라 날이 덥네....”
"딴소리하지 말고! 빨리 말해 줘, 응?"
레온하르트는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명예와 순수함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게 다 망할... 망할 어린 몸뚱어리 탓이야!'
지긋지긋한 사춘기를 두 번씩이나 겪다니. 레온하르트는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엘리자베스의 입을 달달한 간식거리로 막아 버렸다.
"그나저나! 내일이 드디어 연극제네?"
"또, 또 말 돌린다. 연극제....”
“연극제는 매년 하는 거니까, 내년에도 다시 보러 오자. 그리고 그다음 해도, 그다음에도, 응?"
"정말?"
"이번엔 어마마마를 위한 이야기를 썼으니 다음엔 엘리자베스 너를 위한 이야기를 쓰게 할게.”
"미리 결말 알려 주기야?"
"그런 건 아니고....!”
"약속할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레온하르트는 기꺼이 손가락을 걸었다.
“매년 연극제 보러 오기. 약속하는 거예요, 황태자 전하.”
"약속할게. 엘리자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