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파도는 철썩, 마음은 두근(3)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또 다른 꿈을 꿨다.
이번에는 환영식 때 모두들 가볍고 산뜻한 차림을 한 가운데 홀로 코르셋을 한껏 조이고 묵직한 보석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온 엘리시움 공작 부인이 등장했다.
공작 부인은 입이 귀까지 찢어질 만큼 섬뜩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팔을 벌렸다.
샴페인에 흠뻑 젖은 공작 또한 그녀의 곁에서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달리는 대신 눈을 꼭 감고 쥐를 떠올렸다.
작은 쥐, 미미르가 불러낸 생쥐 한 마리. 공작 부인의 기름을 듬뿍 발라 고정시킨 커다랗고 우스꽝스럽던 머리에서 튀어나와 예의 바르게 인사하던 귀여운 쥐 한 마리.
그러자 공작 부인의 머릿속에서 쥐들이 끝도 없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찍찍거리며 쥐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공작과 공작 부인을 둘러싸며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소리 내어 까르륵 웃었다.
그날 그녀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기억났다.
그들에게 남은 정은 레온하르트의 말대로 낳아 주고 키워 준 정뿐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포옹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 귓가에 속삭이던 달콤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잠에서 깬 엘리자베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긴 머리만 연신 손으로 빗으며 생각에 잠겼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엘리자베스는 아침부터 꾸벅꾸벅 약 먹은 병아리처럼 졸고 있었다.
바깥 산책을 하지 않겠느냐는 레온하르트의 권유도 거절한 채 엘리자베스는 서재로 향했다.
황궁의 장서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이곳에 황실에선 보지 못한 재밌는 책이 잔뜩 있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잠들 수 있게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담요도 하나 폭신한 것으로 챙겨 놓고.
차 한 주전자와 가벼운 간식거리까지 준비한 엘리자베스는 서재에서 눈길이 가는 제목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읽기 시작한 건 로맨스 소설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함께 극복하고, 마침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가 탑처럼 쌓아 놓고 읽는 책을 보며 시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감정이 결여되다시피 한 모습으로 황궁에 들어왔던 열 살 꼬마 레이디에게도 드디어 봄이 찾아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미리 준비한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콕콕 찍으며 코를 훌쩍였다.
지독한 사랑과 지독한 갈등은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서툰 엘리자베스에겐 너무 자극적이었다.
모든 로맨스 소설이 전부 행복하게 끝나는 건 아니었다.
행복해 보이는 제목이나 시작과 달리 갈등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이별하는 연인들 이야기를 읽으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원하는 것이 상대방의 행복이고, 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서로 함께하는 것인데 왜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알았다면 억장이 무너져 피눈물을 토할 생각을 하며 엘리자베스는 다음 책을 펼쳤다.
이 근방 바다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집을 엮은 책이었다.
연극제의 모티브가 된 설화도 각종 버전으로 들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뻔한 전개와 흐름은 적당히 넘겨 가며 호기심 가득한 눈만 깜빡였다.
'왜 사랑하는 주인공들은 서로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걸까?'
아직 어린애다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동안 자신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소설 속 문장처럼 '온몸이 녹 아내릴 것 같다'거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는 느낌이 드는 키스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부쩍 성장한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정중하게 대해 줄 때면 조금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렸다.
그 자세로 손만 뻗어 조금 전 읽고 있던 책 무더기 사이에서 어린 연인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있던 책을 꺼낸 엘리자베스는 페이지를 넘겼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설레어서 어쩔 줄 모르고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부끄럽고 또 수줍어서 겨우 손가락만 꼼질꼼질 움직여 톡 맞닿고, 그 작은 순간을 영원처럼 여기며 숨을 멈추는 어린 연인들의 마음을 작가는 레몬이라고 표현했다.
'레몬... 레몬... 레온....'
시답잖은 말장난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엘리자베스는 키득키득 웃었다.
비록 여주인공의 병으로 인해 끝내 이어지지 못한 슬픈 이야기였지만 해바라기 아래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황급히 키스를 나누고, 보름달이 떠 있는 여름밤을 오직 사랑으로 보낸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짧고도 강렬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었던 이야기였지만 엘리자베스는 다시 책의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넘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즈음 엘리자베스는 다시 훌쩍이고 있었다.
물 위에 비친 달이 흔들리는 어느 밤, 여주인공은 붉은 피를 토하며 남주인공의 품 안에서 달과 함께 마구 흔들렸다.
마지막 소원으로 나의 여름을 영원한 여름으로 만들어 주세요.
여주인공의 바람대로 그 여름은 그녀에게 마지막 여름이자,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름이 되어버렸다.
남주인공이 오열하며 이미 차갑게 식은 여주인공을 끌어안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엘리자베스를 울먹이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 * *
“오늘은 하루 종일 서재에 있었네?"
"눈시울이 붉은데, 슬픈 이야기도 좋지만 가끔은 가볍고 재밌는 이야기를 읽는 건 어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하루 종일 읽었던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온통 레온하르트의 얼굴과 겹쳐 보이자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리지?"
"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그냥... 책을 너무 읽었나 봐.”
“책을 읽는 건 나쁘지 않은데 너무 많이 읽으면 눈 나빠진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만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의 엘리자베스를 보며 조금 의아해하긴 했으나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복도에 홀로 남은 엘리자베스는 잠시 벽에 기대서서 눈을 감았다.
언젠가 레온하르트도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나를, 나를....
머리 위로 김이 퐁 솟을 정도로 얼굴이 붉어진 엘리자베스가 복도를 마구 내달렸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줄까?
공교롭게도 그녀가 읽던 책 중에 아직 어린 그녀가 읽기엔 부적합한 책도 섞여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을 정리하는 시녀들은 어린 그녀가 무얼 알겠냐며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관능 소설에 가까운 것들은 따로 모아 그녀의 눈길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꽂아 두었다.
누가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할까봐 후다닥 방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제 상체만 한 크기의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엎드렸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레온하르트와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여주인공 또한 자신과 전혀 다른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려고 하면 두 주인공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레온하르트와 제 얼굴이 대신해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침대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천장을 보며 드러누워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내일... 내일부턴 그런 책은 읽지 말자....’
엘리자베스는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모처럼 서재에 손님이 오기 시작했다는 말에 서재를 관리하던 시종들이 기뻐하던 보람도 없이 엘리자베스는 바로 다음 날부터 서재로의 걸음을 그만 뚝 끊어 버렸다.
책에도 부작용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지만, 레온하르트를 볼 때마다 책 속 주인공들을 묘사하던 문장이 떠오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으니까.
그러고도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보고도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부러 그를 피해서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모르는 레온하르트는 그저 엘리자베스의 사춘기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고 또 빌 뿐이었다.
"리지.”
"으, 응?"
"어... 아바마마께서 낚시라도 가겠냐고 하시는데... 같이 갈래?"
엘리자베스는 필사적으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일화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머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어... 싫으면 말고.”
눈을 꼭 감고 머릿속에서 허튼 생각을 떨쳐 내는 것을 오해한 레온하르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섰다.
엘리자베스는 기다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문은 닫힌 뒤였다.
엘리자베스는 속상한 표정을 하고 테라스로 나가 황태자와 황제가 사이좋게 낚시를 즐기고 있을 낚시터를 노려봤다.
물론 망원경도 없이 맨눈으로 그들의 모습이 보일 리 없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난간 위로 턱을 기대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었으나 정작 그걸 모르는 엘리자베스는 따스한 여름 햇살 아래에 눈을 깜빡이다 다시 침대로 가서 드러누웠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이 레이스 커튼 위로 소리 없는 노크를 남기며 엘리자베스가 있는 곳까지 몰래 방문했다.
엘리자베스가 한숨 달게 자고 일어났을 즈음 바깥이 제법 소란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밖으로 나간 엘리자베스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잡아 온 커다란 물고기를 들어 보이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풋 웃었다.
“폐하께서 직접 공수해 오신 식재료로 요리하는 영광은 황궁 요리사들도 아직 경험한 적 없을 겁니다.”
너스레를 떨며 주방 식구들은 황제와 황태자로부터 전리품을 받아 들었다.
한 번 가볍게 물로 씻었다고 해도 비린내가 풀풀 나는 몰골로 레온하르트는 계단 위를 올랐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레온 대단해!'라고 써진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먼저 세 칸쯤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보았다.
“.....리, 리지?"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 왔으니 그 보상이야!”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리는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확신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그런 레온하르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근두근, 콩닥콩닥, 이렇게까지 심장이 작은 너울을 타듯 마구 요동치며 설렐 리 없었다.
“...다음엔 고래를 잡아 와야겠다.”
"고래?"
레온하르트는 잠시 천장 모퉁이를 노려보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난 듯 계단 아래 1층 홀을 가리켰다.
"저기 모자이크로 만들어 놓은 물고기 보이지?"
“응. 다른 물고기보다 훨씬 큰 녀석 말이지?"
“저게 고래야. 어지간한 범선보다 더 커다랄걸?"
"그런 물고기가 어디 있어...? 레온 나 놀리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그 항구에선 십 년은 족히 어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니까?"
“헤에....”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하는 말 중 어디까지가 과장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하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이야?"
"진짜야.”
“그럼 나중에 꼭 보여 주기다?"
“약속할게. 그렇지, 서재에 어류 도감이 있을 텐데....”
금방이라도 서재로 향하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만류했다.
“레온, 바다 냄새 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돌려 말 한 뜻을 알아차리고 다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씨... 씻고 올게....”
그제야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놓아 주었다.
사실은 바다 냄새가 흠뻑 묻은 레온하르트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물고기와 싸워 이긴 그가 자랑스럽고, 또 대단해 보였다.
그대로 그 품에 안긴다면 어떤 느낌일까?
엘리자베스는 바닥의 모자이크 장식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