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파도는 철썩, 마음은 두근(2)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앉았다.
엘리자베스의 숨소리가 손가락 한 마디 두께의 문 너머에서 들리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자베스 또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문을 열어야 할까? 아니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며 다시 자러 가야 할까?
강제로 문을 열까? 아니면, 그냥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갈까?
레온하르트는 조금 더 문에 바싹 기대앉았다.
"리지... 들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웅크려 있던 엘리자베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대답... 안 해도 괜찮으니까... 이야기라도 들어줄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문 너머 엘리자베스의 숨소리가 다시 평온해진 것을 눈치 채고 내심 안도했다.
"좋아해, 리지.”
레온하르트는 천장을 바라보며 주절주절 긴 고백을 이어갔다.
“네가 나를... 빨간색과 파란색 중에 파란색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식의 좋아함이 아니라, 정말로 한 사람을 좋아하는 의미에서 좋아한다고 말한 거라면... 나도 리지가 좋아. 네 모든 점이 좋아.”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럼 방으로 들어오기 직전 그 표정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아까 아무 말도 못 한 건... 놀라서 그랬어. 너무 놀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에라 모르겠다! 리지, 생각해 봐. 평소 좋아하고 아끼던 꽃이나 반짝이는 보석이나... 책도 좋겠다. 하여튼 늘 생각나는 소중한 존재가 어느 날 리지 너에게 '나도 네가 좋아!'라고 하면 어떨 거 같아? 너도 놀라지 않고선 못 배길걸?"
왜 나는 비유를 해도 꼭 이런 비유를 하지? 레온하르트는 긴 숨을 뱉으며 콧잔등만 긁적였다.
"...내가... 레온에게 소중한 존재야?"
파도에 고운 모래가 쓸려 나가듯 여리고 가냘픈 목소리였다.
불안함이 가득 넘실거리는 그 질문에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태어난대도 오직 리지 너를 위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칠 수 있을 만큼 소중해. 너무 늦게 알아차린 거 아니야? 서운한데....”
“미, 미안해! 그러면... 그럼... 레온은...."
“좋아해. 정말 좋아해, 리지.”
엘리자베스의 작은 심장이 또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그토록 아프고 저릿했는지.
가끔은 눈을 마주하는 일이 왜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졌는지.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마다 왜 항상 그가 함께했는지.
전부 레온을 좋아해서 그랬던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레온....”
“나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가 과연 너를 좋아해도 될까?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많이 좋아해도 되는 걸까?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네가 허락한다면 다신 너를 놓아주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다면... 내가 너를 좋아해도 될까?"
다시 한번 좋아해도 될까? 레온하르트는 벽지의 무늬만 노려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렸다. 오직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살았노라 자부할 수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사랑받는 일은 그의 욕심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가 하는 말뜻을 전부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커튼 색을 고르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너무 소중해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만큼 좋아서, 좋아하고 또 은애하는 건 자기 뜻대로 해도 되는 일 아닌가?
더군다나 레온하르트는 제국에서 세 번째로 서열이 높은 황태자였다. 원한다면 굳이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좋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는 허락을 구하는 걸까?
“내가... 안 된다고 하면 레온은 어떻게 할 거야?"
엘리자베스는 두려움을 꾹 참고 질문했다.
문 너머에서 순간 흡, 하며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의사를 존중할 거야. 만일 나와 한 약혼을 파혼하고 싶다면....”
"그건 싫어!"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무릎으로 서서 문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조금만 더... 도와줄게. 리지,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내 곁에 있고 싶어? 나와 함께하고 싶어? 내 모든 감정을 너에게 절반 나누어 주고, 네 감정의 절반을 다시 받아 가도 괜찮을 것 같아?"
“전부 괜찮아. 다 괜찮아. 나는 레온이 웃었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내 곁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고, 레온이 어떤 감정을 보여도 좋고, 내 감정을 전부 줘도 좋고, 좋고... 좋아서.....”
"엘리자베스, 나를 좋아해?"
엘리자베스는 미끄러지듯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으아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무릎 위로 그리웠던 얼굴이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느 때보다 다정하고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마디가 제법 굵어진 손등이 엘리자베스의 볼을 스치며 눈물 한 방울을 몰래 훔쳐 갔다.
“좋아해... 좋아해, 레온.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
레온하르트의 얼굴 위로 눈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코를 훌쩍이며 레온하르트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 앞에선 늘 예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괜찮아, 리지. 울지 마. 물론 울어도 리지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만 보이지만... 웃어 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우는 모습보다 웃는 얼굴을 보여줘. 응?"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손을 떼어 냈다.
이미 잿더미가 되어 너덜거리는 심장은 그녀의 울음에 다시 한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 고통을 꾹 참고 애써 웃었다. 꼭 엘리자베스에게 따라 웃어 보라는 듯.
엘리자베스는 그런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매만지며 힘겹게 웃어 보였다.
“좋아한다. 은애한다. 연모한다. 단심 (丹心)으로 어여삐 여긴다, 사모하다. 또 무슨 말이 있었지?"
"...전부 좋아한다는 뜻이네.”
“그런 마음으로 내가 너를 좋아해. 허락해 주겠어?"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엘리자베스는 그의 콧잔등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허락해 줄 테니 대신 약속해 줘. 평생 나만 좋아하기로.”
"새끼손가락 걸고?"
“응.”
레온하르트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좋아한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좋아한다.
그렇게 말하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다시 날아갈 듯 평온하고 따사로운 천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음... 리지, 안 무거워?"
레온하르트는 슬슬 그녀의 무릎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슬쩍 질문했다.
그제야 엘리자베스는 지금 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복도에 눕고 또 앉아 있는지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누... 누구 있어?"
“그런 건 아닌데....”
엘리자베스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늘 그녀를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감상할 기회였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도 돼?"
“무거우면 바로 말해야 해.”
레온하르트는 손을 뻗어 엘리자베스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라리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했다. 악몽이라면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그러나 극광처럼 부드럽고 찬란하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과 그를 향해 웃어 주는 푸른 눈은 악몽이라면 지독할 정도로 생생했다.
"나, 악몽을 꿨어.”
“악몽을?"
“이렇게 마구 눈과 입이 찢어진 부모님이 나오고, 레온이 나 말고 나를 닮은 괴물과 결혼하는 꿈이었어.”
“개꿈이네.”
레온하르트는 한마디로 일축하며 조금 더 엘리자베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슬쩍 몸을 꿈틀거렸다.
“그래서 너무 싫고, 무서웠어. 꿈에서 깨고 싶어서 마구 비명을 질렀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어.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두 뺨 위로 여름 장미처럼 고운 물이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혹시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그녀에게 들킬까 봐 숨을 죽였다.
"레온이 나를 구해 줬어. 이번에도. 고마워.”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다 말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조금 전 들린 비명은 역시 악몽의 탓이었구나.
다른 일이 아니라 다행인 한편 아직까지 그녀의 마음속에 공작저에서 괴로워했던 일이 앙금처럼 남아 있다는 점이 그를 흔들어 놓았다.
"괜찮아. 꿈은 꿈일 뿐이야. 다음에 또 그런 꿈을 꾸면 당한 만큼 되돌려 주는 건 어떨까?”
"되돌려 줘?”
“뭐... 공작에게 불에 달군 구두를 신기거나, 공작 부인에게 코르셋을 입히거나... 그런 상상?”
“아...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인데....”
레온하르트는 혀를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인데.
이 한 문장은 그녀가 죽는 그 순간까지 엘리시움 공작 내외가 황궁을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는 면죄부가 되었으며 끝내 숨을 거둔 딸의 옆방에서 그녀의 동생을 후처로 들이라는 망언을 내뱉을 구실이 되었다.
차라리 그녀가 잔인한 성정이었다면 나았을 것을.
천사의 피가 섞였다는 엘리시움답게 그녀는 공작 내외가 무슨 짓을 하든 '그래도 부모니까.'라며 눈감아 주고 그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차라리 네가 잔인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잠자리의 날개를 뜯어 놓듯 순수하고 또 잔인했다면 나았을 텐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죄 없는 잠자리 날개는 왜 뜯어?"
“리지, 그들이 과연 정상적인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낳아 주고, 먹여 주고, 키워 주고, 레온을 만나게 해 줬다.
그걸로 충분히 훌륭한 부모 아닌가?
“너, 저번 환영식 때 확인하고 싶다며 그들에게 안겼잖아. 그때 어떤 느낌이 었어?"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 부풀어 둥실둥실 솜사탕처럼 분홍빛 구름 위로 올라탈 새도 없이 그녀는 다시 먹구름을 마주해야 했다.
레온하르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스스로 먹구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해 주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나를....”
“낳아 주고, 키워 주고, 나와 태중 약혼도 맺고?"
"그러니까 그분들은....”
낳았으면 키우는 일이 당연하지.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미래의 황후로 삼았으면 더더욱 귀하게 키웠어야지. 그러니 그건 당연한 일이야. 오히려 너를... 괴롭게 했으니 그들은 부모 자격이 없어.”
"레온하르트!”
엘리자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온하르트는 몸을 일으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너무 늦었어. 다시 자러 가자. 또 같은 꿈을 꾸면 그땐 정말로 복수해 버려. 꿈인데 뭐 어때?”
레온하르트는 다 괜찮을 거라며 엘리자베스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맞닿은 가슴이 동시에 콩닥거리고 있었다.
“나... 가슴이 콩닥거려. 레온 얼굴을 제대로 못 보겠어. 이상해.”
“원래 그런 거야. 괜찮아.”
“...그걸 레온이 어떻게 알아?"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그야...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