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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44화 (44/130)

44화 파도는 철썩, 마음은 두근(1)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네에?"

황후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레온에게 직접 물어보겠니?"

"그... 그래도 될까요?"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우리 황태자 전하께선 어떤 표정을 지으시려나?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사람 감정은 때로 진솔하게 서로를 마주하고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모를 때도 있단다. 그리고 대부분 큰 비극이 그런 사소한 일로 인해 일어나지."

"그... 그런가요?"

황후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 우리 며늘아기.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렴."

“명심하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멀리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붙잡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황후를 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 바람에 미처 몰려오는 커다란 파도를 보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머리부터 차디찬 바닷물을 뒤집어썼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레온하르트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새아가와 무슨 대화를 그리 재미나게 했소이까?"

"폐하!”

잠시 자리를 비웠던 황제가 돌아왔다. 황후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허허, 새아가가 벌써요? 세월이 흘러도 벌써 그렇게나 흘렀군요.”

“후후, 우리 전하께서 너무 놀라 오늘 밤 잠을 못 이루시면 어쩌죠?"

“그럴 리가. 나는 내 아들을 그렇게 심약하게 키우지 않았소.”

“하지만 폐하께선 제가 고백했을 때 그대로 한참을 굳어 계셨잖아요. 저는 모두 기억하고 있답니다?"

"황후, 그... 그때는....”

황후는 황제와 혼담이 오가던 시절 그를 반하게 한 눈웃음을 지으며 과일 주스만 홀짝였다.

하루 온종일 해변에서 실컷 노는 것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대신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황궁으로 돌아가서 알베르트며 미미르에게 전해 줄 추억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만드는 데 집중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우리 해변 말고 다른 곳에 가면 안 되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엘리자베스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레온하르트는 머쓱하게 뒷머리만 긁적였다.

“저기 레온.”

"응?"

엘리자베스는 작게 침을 삼켰다.

서로 잠자리에 들기 직전, 방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지금이 낮에 황후와 나누며 결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길 순간이었다.

"좋아해.”

“뭣?”

“레온도 나를 좋아해?"

레온하르트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가느다란 팔다리가 그대로 비치는 포말처럼 얇고 하얀 잠옷을 입은 어린 약혼녀가 지금 뭐라 한 거지?

좋아해, 너도 나를 좋아해?

그 말 한마디가 밤바다의 파도처럼 잔잔하면서도 끝없이 그의 귓가에서 철썩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레온하르트는 고민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레온하르트는 갈등했다.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레온하르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레온하르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덜컥 겁부터 먹었다.

“대, 대답 안 해도 돼! 미안해, 레온. 갑자기 이상한 소리나 하고... 황후마마께서, 아니. 아니야. 잘 자!"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뭐라 할 새조차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주르륵 미끄러지듯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은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해선 안 되는 말을 해 버린 걸까? 그래서 레온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황후께선 분명 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레온하르트의 눈에서 그녀가 읽을 수 있는 감정이라곤 당혹감과 불안함이 다였다.

심지어 마지막엔 늘 그녀를 마주할 때면 자연스럽게 짓고 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사람의 감정에 서툰 엘리자베스였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두려움은 밤 그림자를 잡아먹고 점점 몸을 키우기 시작했다.

혹시, 혹시라도. 만약에.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슬그머니 올라오는 척 뾰족하게 심장을 쿡 찌르는 송곳 같은 불안함에 입을 막고 비명을 내질렀다.

혹시라도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 혼자 좋아하는 건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몸집보다 커다래진 두려움이 바닷속 검고 기다란 해초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악몽을 꾸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늘, 늘 최고의 레이디가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한 손에는 코르셋을, 다른 손에는 굽 높은 신발을 쥔 어머니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턱 하고 단단한 것에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어머니의 표정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뒤를 돌아본 엘리자베스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다시 기어갔다.

그녀가 걸려 넘어진 건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은 아버지의 지팡이였다.

“이졸데! 그 천박한 움직임은 대체 뭐니!”

“이졸데.”

"어... 어머니... 아버지....”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어서 종아리부터 대거라!”

기괴할 정도로 입과 눈이 옆으로 찢어진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잡히면 안 된다. 본능이 그렇게 소리질렀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비명만 지르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억지로 움직이기 위해 마구 몸부림쳤다.

어느새 그녀의 발에는 높은 굽의  두가, 허리에는 뼈가 부러지고 숨이 막힐 만큼 지독하게 조여진 코르셋이 달라붙어 있었다.

"싫어!"

엘리자베스는 비명을 지르며 마구 허우적거렸다.

차갑고 소름 끼치는 손이 발목을 붙잡고 질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를 둘러싼 공간이 온통 새하얗던 공작저의 방으로 바뀌더니 얌전히 인형처럼 예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는 아가씨가 나타났다.

눈에는 생기라고 할 만한 빛 하나 없이 그저 숨만 힘겹게 내쉬고 있는, 도자기 인형보다 더 차갑고 낯선 존재는 엘리자베스와 똑같은 은빛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이졸데, 착한 이졸데. 모든 건 이졸데를 위해서야. 이 어미 마음을 이해하지?"

"네, 어머니.”

나를 위해서라고? 거짓말! 아니었잖아요! 아니잖아요!

“저기 저 쓸모없는 계집애는 신경 쓰지 말렴. 저렇게 천박한 계집애 따위, 이 어미는 낳은 적 없단다. 우리 이졸데는 장차 황후가 될 귀하신 몸인걸!"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절규했다. 점점 더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이졸데.”

엘리자베스는 딸꾹질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늘 엄하고 화난 표정이시던 아버지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한 천하에 쓸모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엘리자베스 눈을 꼭 감고 몸을 웅크렸다.

"너는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겠구나! 공부가 필요해!"

"어머니 말씀대로 하거라.”

“애초에 네까짓 것이 감히 황태자 전하를 좋아한다고? 웃기지도 않지! 그분이 너 같은 걸 좋아할 것 같으냐?"

“아냐, 아니야! 그럴 리 없어요! 레온은... 레온은....”

“좋아한다는 감정도 모르는 주제에!"

“뭐가 좋고 뭐가 싫은지 혼자 결정하는 방법도 몰랐던 주제에!"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귀를 꼭 막았다. 그러나 그녀를 조롱하는 부모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회오리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레온... 레온... 어디 있어... 도와줘...."

엘리자베스는 애타게 레온하르트의 이름만 불렀다. 마법처럼 그가 짠 하고 나타나 부모님으로부터 자신을 데려가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더욱 끔찍한 악몽만 이어질 뿐이었다.

"잘 있어, 엘리자베스. 나는 너보다 더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았어.”

레온하르트의 곁에 하얀 드레스와 베일을 쓴 여자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보는 앞에서 레온하르트는 베일을 걷어 올렸다.

죽은 눈을 하고 허리는 한 줌조차 되지 않을 것처럼 기이하게 성장한 이졸데가 엘리자베스를 보며 히죽 웃었다.

"나는 널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어.”

"레온!"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손톱으로 땅을 긁고 또 오열했다.

"가지 마!"

날벌레들이 날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올이 고운 휘장이 쳐진 침대 위로 작은 사람 그림자가 벌떡 솟았다.

엘리자베스는 숨을 몰아쉬며 가장 먼저 허리를 더듬었다.

다행히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잠옷의 감촉만 느껴졌다.

‘꿈... 꿈인가?'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드러운 융단에 맨발이 닿자 그제야 엘리자베스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물 한 잔을 마신 엘리자베스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서늘한 바닷바람에 식히며 조금 전 악몽을 잊기 위해 애썼다.

똑똑똑.

테라스로 나가 의자에 기대어 앉으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조금 전 꿈에서 내지른 비명이 혹시 현실에서도 이어졌던 걸까?

그 소리를 듣고 걱정이 되어 시녀가 온 걸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리지, 리지? 괜찮아?"

그리고 문고리 앞에서 숨을 멈췄다.

문 너머에는 조금 전 세상에서 다시 없을 차디찬 시선으로 그녀를 내버린 레온하르트가 있었다.

* * *

레온하르트는 통 잠을 자지 못하고 넓은 침대만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좋아해, 그 말에 담긴 뜻을 과연 알고 말한 걸까?

그녀가 그 말을 할 거라곤 전혀 상상조차 못 했기에 기습처럼 찾아온 말 한 마디는 그의 모든 감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어마마마를 언급하려다 말았던 걸로 봐선 어마마마께서 짓궂은 장난을 치신 게 분명했다.

'장난을 칠 상대가 따로 있지...!'

레온하르트는 괜한 심술에 이불 속에서 발만 푸다닥거리며 다시 몸을 뒤집었다.

막상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쁨보다 걱정과 불안을 먼저 느끼다니.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한탄하며 다시 몸을 뒤집고 또 데굴데굴 침대 구석구석을 굴러다녔다.

'내가... 리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 사람일까?'

뻘밭처럼 진득하게 그의 발을 붙잡고 있는 건 죄책감과 후회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 좋아해가 나와 같은 좋아해면 어쩌지? 내가 그렇게 너를 탐해도 되는 걸까? 리지, 모르겠어. 나는 너를 웃게 만들었고, 즐겁게 해 주고, 지켜 주고. 오직 너를 위해 살겠노라 다짐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어. 정말로 내가 너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앞으로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걸까?'

팔베개를 하고 다리를 꼬아 누운 레온하르트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눈을 감으면 좋아해, 라고 말하며 웃던 엘리자베스의 얼굴만 동동 떠다녔다.

눈을 뜨면 자신의 반응에 실망하며 방으로 돌아가던 쓸쓸한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반측, 다시 침대만 뒹굴고 이불만 끌어안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리지, 엘리자베스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단번에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젖혔다.

엘리자베스의 방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귀를 가져다 대자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연신 비명과 아픈 신음 소리만 끙끙거리며 앓는 엘리자베스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리지! 리지! 문 좀 열어 봐, 리지!"

레온하르트는 애타게 그녀의 이름만 부르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대체 무슨 나쁜 꿈을 꾸길래 저렇게 아파하는 걸까. 레온하르트는 여차하면 사람들을 전부 깨워서라도 그녀를 꿈속에서 구해 주겠노라 다짐했다.

숨을 죽이고 방 안의 동태를 살피는데 문득 엘리자베스의 비명 소리가 그쳤다.

레온하르트는 불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단단한 나무 문은 맑은 소리로 그의 방문을 알렸다.

"리지, 리지? 괜찮아?"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한시름 놓은 레온하르트는 가장 먼저 엘리자베스가 괜찮은지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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