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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43화 (43/130)

43화 바다가 보내준 하얀 꽃다발(4)

“잘... 모르겠어요.”

황후가 말하는 '좋아한다'가 호불호를 묻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제 엘리자베스도 알 나이였다.

그녀의 세상에서 레온은 늘 하나뿐인 길잡이별이었다.

선원들이 북극성을 가리켜 '좋아한다'고 하지 않듯 어쩌면 엘리자베스 또한 그런 의미에서 레온하르트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 황후는 어렴풋이 느꼈다.

“우리 엘리자베스가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

황후는 혼란스러운 표정의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황후의 관을 물려줄 때가 온 것 같아.”

"아, 아닙니다, 황후마마! 저는 황후가 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리지, 레온과 평생 함께하고 싶니?"

황후의 진담 섞인 농담에 엘리자베스는 손사래까지 치며 화들짝 놀랐다.

“평생....”

“서로의 고통도, 행복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함께 나눌 수 있겠니?"

황후께선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물끄러미 인자한 얼굴의 황후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황후마마께선 황제 폐하와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계신가요?"

황후는 뜻 모를 미소만 지을 뿐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슬픔을 함께 겪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황후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그이도, 나도, 서로를 너무 사랑하기에 때론 숨기고 홀로 괴로워하는 일들이 있단다.”

“그럼 마마께선 어째서 황제 폐하와 함께하시기로 결정하셨나요?"

“좋아하니까.”

좋아한다, 그렇게 말하는 황후의 볼에 불가사리보다 붉은 물이 들어있었다.

“그런 괴로움을 전부 감내할 만큼 좋아하고, 사랑하니 함께 하는 거란다.”

“잘... 모르겠어요. 마마께서 하신 말씀으론 그 모든 감정을 함께한다는 것이 곧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좋아한다는 감정이라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 괴로움마저 곁에 두고 함께한다는 일이 사랑이란다.”

“사랑이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만 자랐을 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사랑한다는 기쁨도 몰라서야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남은 어린애였다.

황후는 순진무구하게 푸른 눈만 깜빡이는 어린 숙녀에게 앞으로 가르쳐야 할 일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엘리자베스, 눈을 감고 황태자를 떠올려 보겠니?"

엘리자베스는 황후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레온하르트를 떠올렸다.

"어떤 느낌이 드니?"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요. 아주 고운 안개비를 맞고 있는 새싹처럼 흔들흔들, 무서울 정도로 작지만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어요.”

“그리고?"

“...레온이 웃는 얼굴만 자꾸 떠올라요. 저번에... 폐하와 마마께 심려를 끼쳐드린 그 밤... 불꽃을 등 뒤에 두고 저를 향해 웃어 주던 레온이 자꾸만 생각나요.”

"엘리자베스, 눈을 뜨고 거울을 보겠니?"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도 황후의 말을 따랐다.

거울 속의 그녀는 보는 사람마다 저절로 따라 웃게 만드는 여름 해바라기처럼 해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웃음이 나온다면 그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증거란다.”

“....황후마마께서도 황제 폐하를 생각 하실 때면 늘 웃음이 나오시나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만 나올까? 때론 울고 싶을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는걸.”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겐 웃음이 나온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 밖의 모든 감정도 전부 드러나는 법이란다.”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는 시무룩해진 엘리자베스를 책망하는 대신 그저 가벼이 웃어넘겼다.

“나는 형제 중 막내였단다. 첫째 오라버니의 결혼식 날 태어나는 바람에 여러 모로 큰일이었다고들 해.”

좋아하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다 말고 황후께서 갑자기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엘리자베스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렇게 늦둥이로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귀여웠겠니. 오냐오냐 받들어 주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대륙을 건너서라도 구해다 주고, 그러다가 사춘기가 와 버렸지 뭐야.”

“사춘기요?"

“딱 우리 아가 나이 때였을까? 마침 막내 오라버니가 몇 년 만에 바다에서 돌아온 참이라 연회가 열렸는데, 오라버니 곁에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어.”

황후는 아련한 표정으로 그녀의 오라비가 잠들어 있을 수평선을 응시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대륙 저편에서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낭만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그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니?"

“무... 무슨 일을 하셨나요...?"

황후는 쿡쿡 웃었다. 이젠 그저 추억으로만 남은 옛이야기였지만 그땐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이 캄캄했더랬지.

"늘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나를 안아 주시던 오라버니가 나보다 먼저 스스럼없이 그 여인을 끌어안는 것을 본 나는 오라버니가 다시 바다로 나가는 날까지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단다."

“네에?"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자애로울 것 같은 황후마마께서 그런 짓을 벌이시다니!

“유모도, 오라버니들도, 심지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도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 아니, 나가지 못했어.”

“어, 어째선가요?"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거든. 꼭 지금의 엘리자베스처럼."

"저... 저처럼요?"

황후는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오라버니를 보지 않으면 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이라도 그 여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오라버니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황후는 스케치북 구석에 제 형제들과 그들의 배우자 얼굴을 간략하게 그리며 후회했다.

“문고리만 한 번 돌리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 일이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어. 문 너머에서 오라버니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고 있는데, 문을 열 수 없었어.”

"마마....”

"그리고 오라버니는 다음 항해에서 내 축복이 담긴 키스를 받지 못한 탓에 지금은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산호초를 베고 누워 계신단다.”

"마마!”

엘리자베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니 엘리자베스, 후회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렴.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고, 몸을 움직인다 해서 행동이 아니듯 현명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단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황후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잘못은 무슨... 그저 사춘기를 너무 힘겹게 보내지 않길 바라는 뜻에서 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란다."

“사춘기... 요?"

“봄을 생각하는 나이.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수줍어할 나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속상하고 또 모든 일이 못마땅할 나이. 딱 지금의 엘리자베스 아니니?"

"황후마마, 그걸 어떻게.”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말대로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또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어 속상해하고, 생각지도 않은 날카로운 말에 후회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그게 사춘기라고?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오히려 이 황후는 무척 기쁘답니다. 처음 황궁에 올 때만 해도 인형처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좋은지 싫은지 재어 보지도 않고 마냥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만 움직이던 우리 어린 황태자비가 이젠 누군가의 웃음에 가슴 설레하다니!”

엘리자베스는 두 손으로 볼을 꼭 감싸 쥐었다.

황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름 햇살보다 더 뜨겁게 그녀의 볼을 데워 놓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레온하르트를 좋아하니?"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말을 듣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오직 그녀만 모르고 있을 뿐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뒤늦게 그것을 자각한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더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엘리자베스, 레온하르트를 사랑하니?"

황후는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사... 사랑... 이요?"

"단순히 좋아한다는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품을 수 있는걸. 하지만 사랑은 다르지. 내가 바다를 사랑하는 것과 황제 폐하를 사랑하는 것의 차이점을 우리 아가는 알 수 있을까?"

아직 엘리자베스에겐 어려운 질문이었다.

황후 또한 그런 그녀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짧은 웃음과 함께 다시 그녀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아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말하렴. 아직 정식으로 황태자비가 된 건 아니니까,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네?"

"아가는 조금 더 행복해져야 해요. 레온에게 아가를 행복하게 해 줄 자격도, 능력도 없다면 당연히 그보다 더 잘난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저는....”

“황후의 뜻을 그 누가 거역할까. 아니지, 오히려 내가 책임지고 아가에게 어울릴 사람을 찾아주마.”

"저... 저는... 레온이랑... 레온이... 그러니까.....”

"평생 함께해도 괜찮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내 아들이?"

"그러니까... 그... 그게....”

더 하다간 정말 울겠네. 황후는 엘리자베스를 채근하는 대신 그녀의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레온을 좋아하니?"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쁨도, 슬픔도, 행복하고 괴로운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눈다는 말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와 함께 즐거운 일만 하고 싶다는 마음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레온과 함께하고 싶니?"

“레온과... 늘 웃고 싶어요....”

그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황후는 허리까지 젖혀 가며 웃었다.

아무래도 어린 며느리는 제 아들에게 푹 빠진 모양이었다.

자기 빼고 전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엘리자베스가 언제쯤에나 눈치챌까 기대가 되는 한편으론 레온하르트가 조금은 가여웠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좋아... 한다... 인가요....”

귓바퀴까지 빨갛게 물들어 고개를 폭 숙인 엘리자베스는 더듬더듬 말했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감정을 대신 읽어 주었다.

“응.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좋아하고 있어. 적어도 이 황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고, 또 레온하르트도 그만큼 엘리자베스를 좋아하고 있단다.”

“레온도요...?"

엘리자베스가 조심스럽게 움츠렸던 몸을 펴며 입을 벌렸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황후마마께서도 혹시 마법을 쓰시나요?"

“응? 마법?”

황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얼굴을 붉힌 엘리자베스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엘리자베스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투로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엘리자베스, 이건 마법이 아니란다.”

“그, 그럼요? 사람의 감정이 눈에 보이시는 건가요?"

엘리자베스는 의자까지 조금 황후에게 당겨 앉으며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감정이 전부 표정에 드러나는 법이거든. 눈빛이며, 건네는 말 한마디, 그리고 동작 하나까지 전부... 세상에 견줄 물건이 없을 정도로 빛나고 있단다.”

“....저를 보는 레온도 그렇게 빛나고 있나요?"

황후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공작저에 다녀온 날 이후 레온하르트의 시선 끝에 늘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지금도 그는 겉으로는 기사들과 함께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지만 틈틈이 엘리자베스와 황후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대로 레온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전하께서도... 아시는 걸까요?"

“무엇을?"

황후는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 부러 모르는 척 뜸을 들였다.

여기서부턴 엘리자베스가 직접 판단해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 황실에 와서 원하는 취향대로 방을 꾸며 줄 때만 해도 이것이 좋은지 저것이 좋은지, 호불호를 선택하는 일조차 어려워하던 아이가 이젠 손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조심스럽게 마주해야 하는 감정을 느낄 정도로 자랐다.

황후는 엘리자베스가 그저 대견하고, 기특하고, 또 고마웠다.

“제가... 음...전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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